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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철도 분실물센터 ㅣ 펭귄철도 분실물센터
나토리 사와코 지음, 이윤희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5월
평점 :
독자에게 잔잔한 웃음을 머금게 할 줄 아는 작가가 진정 재주꾼입니다. 우리도 모든 역사...는 아니고 특정 역의 사무실에 가면 "유실물 센터"가 꼭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예컨대 당고개 같은 종착역에서 내릴 때면 선반 위에 (아마도 어떤 학생이 놓고 내렸을) 노트나 학용품 등이 봉투에 싸인 채 놓인 걸 보고 역무실에 갖다 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교통 카드를 놓고 내린 경우도 보는데, 그런 분은 나갈 때 어떻게 개찰을 했을지 모르죠. 아마도 친구들과 수다 떨며 긴 여정을 보내다 잠시 깜빡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오래된 피처폰을, (노인분들에게 흔한 습성대로) 테이프 등으로 둘둘 감아 둔 게(표면에 상처 안 생기라고 노인들이 자주 이러시죠) 어쩌다 주머니에서 떨어졌는지 좌석에 덜렁 떨어진 것도 간혹 봅니다. 역사 내 질서유지 요원으로 간혹 노인분들이 봉사하시는데 이런 걸 신고하면 남 일 같지 않은지 그렇게 반겨하시더라구요.
펭귄이 그리 귀여운지는 때에 따라 확신이 안 서고, 심지어 무섭기까지 느껴질 때도 있는데 이건 그야말로 일체유심조라고, 보는 이의 마음 상태에 따라 바뀌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은 꼭 뭐가 우스워서 웃는다기보다, 뭐가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지 않거나 정상 질서에서 약간 어긋난 바만 있어도 웃음이 터지곤 하는데, 생존을 위한 경쟁과 투쟁이 워낙 치열한 가운데 조금이라도 여유를 찾아 희열의 에너지를 축적, 보완하고자 하는 진화 과정의 몸부림 그 소산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아무튼 뭐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필요한 게 없거나, 반대로 엉뚱한 곳에 무엇이 버젓이, 보란 듯이 놓여 있으면 "이게 뭐래니?"하는 헛웃음이 누구에게서건, 어지간히 마음이 각박한 이가 아니라면, 터져 나오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분실물 센터에 펭귄이 놓여 있다면 더욱 그렇겠죠.
다치바나를 언제나 마음에 품고 있던 교코는 정이 많고 마음이 여린, 그래서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언제나 조연에 머물 수밖에 없던", 우리 주변에서 알고 보면 흔히 보는(어쩌면 우리들 자신인) 그런 여성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라 해도 꼭 고양이 집사 구실을 자처하는 건 아니고(남의 반려 동물에는 관심을 보여도 자신이 키우는 건 싫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아끼던 고양이가 죽었다고 유골함까지 항상 끼고 다니는 이들은 더욱 드물게 보는데, 놀랍게도 이 유골함이 든 백을 전철에서 잃어버리고, 똑 같은 겉모습을 한 다른 유실물 당사자가 그녀의 물건을 (잘못) 먼저 찾아가기까지 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란 확률적으로 0에 가깝죠.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의 사건, 그 빛깔도 비록 다른 이의 것과 서로 닮았을망정, 100% 같은 건 극히 드뭅니다. 우리가 사는 소소한 순간이 알고 보면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한 번 벌어지기 힘든 기적에 가까움을, 이 짧은 에피소드는 잘 전하고 있습니다.
키가 큰 소헤이는 (바로 앞 에피소드에서 교코와 잠시 엮이는 걸 우리 독자들이 보았듯) 이 분실물 관리실의 책임자(?)입니다. 이번에는 은둔형 외톨이인 후쿠모리 겐과 마주치게 되는데, 하루종일 게임 캐릭터만 붙들고 사는 한심한 은둔형 외톨이 아니라 멀쩡한 사람이라고 해도, 느닷 얼척없는 곳에 펭귄이 떡 자리하고 있으면 "이거 무슨 서커스단이에요?"하고 놀라는 게 당연합니다.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에만 침잠하여 정상적인 인간들과의 소통 감각을 상실하면, 사실 놀라야 할 것에 놀라지 않고 당연한 데서 충격을 받는 식으로 감성이 왜곡될 수 있는데,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겐은 아직 가망이 남아 있긴 한가 봅니다. 보통 사람 이름자를 적을 땐 한자나 가타가나로 적는데, 버젓이 그 일부가 히라가나로 적힌 것까지 겐은 정상이 아닙니다. 헌데 게임만 하다가 정말 정신에 착란이라도 온 건지, 꿈이 아닌 현실에 "미소녀" 하나가 떡 나타나 이 낙오자에게 온갖 호의를 베푸...려는 듯 보이네요. 이는 펭귄의 마력이 발휘되기라도 한 건지, 아님 그 역시 냉혹한 현실의 알레고리이기라도 한 건지, 독자가 읽고 각자 판단할 일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유형은, 남에게 잘 보이려고 혹은 이용하려고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남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자신도 괴로우면서 연극을 하는 유형입니다. 이런 사람들 중 일부는 "여튼 내가 남을 위해 손해를 본 건 사실 아냐?"라고 어느 순간 분노와 회한을 느끼고, 그 다음부터는 진짜 사기를 치려고 나쁜 마음을 먹기도 합니다. 무슨 부조리극에 나오는 괴인 캐릭터가 아니라, 주위에서 의외로 간혹 목격되는 불쌍한 인간형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다이라 지에는 그 정도로 가망 없는 사람은 아니고, 오히려 너무 착해서 매번 누구에게나 손해를 보는 사람이라고 파악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남편 미치로는 제가 보기에 참 답답한 사람인 게, 아내 지에가 이처럼 대책 없이 착한 사람이면 자기도 그에 맞는 세팅을 하고 살아야지, 그냥 여성 누구의 "추상적인 남편" 역할, 아니 연기에만 충실해서 결국 아내에게 큰 부담을 준다는 겁니다. 여튼 여기서도 우리의 펭귄과 키 큰 소헤이가 등장해 꼬인 일을 "해결"하는 데 한 몫 거듭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여태 무슨 <환상특급>이나 보듯 기묘한 사연의 굴곡, 미스테리를 다 해결해 주는 사연입니다. <환상특급>은 사실 현실의 모순을 고발할망정 그간 벌어진 초현실의 배후를 시원히 해명하지는 않는데, 이 마지막 이야기는 (아주 속시원하지는 않아도) "왜 뜬금없는 펭귄이 그 자리에 있어야 했는지"는 밝혀 주고 마무리짓습니다. 앞의 세 사연만 해도 우리 독자들의 마음이 훈훈해지기엔 충분했으나, 이 마무리로 인해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지는 듯하죠. 하긴 잔잔한 일상을 성실히 살며 다른 사람에게 상처 안 주고 밥벌이를 하려 애 쓰는 우리들 모습이 어쩌면 다 기적이고 경이입니다. 최소한 이 흐뭇한 소설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