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은 여자
가쓰라 노조미 지음, 김효진 옮김 / 북펌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참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여성 사기꾼을 소재로 삼은 장편이라면 한국에서도 큰 히트를 친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가 다들 생각나실 것 같은데, 이 장편은 평생을 사기치고 다닌 어떤 여성을 냉연히 관조, 추적, 서술하는 내용이면서 미유키의 그 대표작과는 결이 다릅니다. <화차>가 솔직히 장르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 작은 은근 본격문학의 향취를 풍길 만큼 여운이 짙게 남습니다. 가독성은 가독성대로 좋고 흥미 만점이면서도 말입니다.

읽으면서 저는 사기꾼 낫짱(나쓰코)의 뒷모습만 부지런히 따라가는, 뒷모습의 그림자만 밟아가는 게 아니라 "그녀가 저지른 사고의 뒷마무리까지 부지런히 수행하는" 변호사 데쓰코가, 우리 독자를 놀라게할 만한 진짜 사연을 감추고나 있지 않을지, 지극히 장르적이고 통속적인 기대를 품었더랬습니다. 그런 범속한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지만, 대신 잔잔하고 은은한 감동 비슷한 걸 얻었지요. 어떤 독자들은, 반듯하고 올곧은 1인칭 화자 데쓰코가, 저런 사악한 뜨내기 같은 인생 나쓰코를 교화라도 하지 않을까, 그래서 회개와 개전의 눈물을 흘리며 두 (먼 친척이기도 한) 여성이 결말에서 감격어린 포옹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역시 장르문학 팬 다운) "창작형 독서"를 하는 것도 봤습니다. 작가 가쓰라 노조미 씨는 성숙한 솜씨로 그런 흔한 바람 역시 뿌리칩니다. 마치 극중의 나쓰코가 "사기꾼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이기적이긴 마찬가지면서도 어리석기까지한" 여러 뜨내기들을 등쳐 먹으면서, 쓰디쓴 교훈을 통해 "주제파악"을 시켜 주듯 말입니다(최근에 인기를 끈 드라마 <38사기동대>에도 그런 대사가 나오죠).

나쓰코는 분명히 사기꾼이고, 사연의 끝(동시에 자기 인생의 황혼)에 이르기까지 전혀 뉘우치는 기색이 없는 악질입니다. 처음엔 그저 타고난 미모를 이용한 임기응변식 사기를 치고 살았지만, 더 이상 그런 매력을 유지할 수 없는 노년에 이르러서야 "진화라도 한 듯" 머리를 쓰고 치밀한 전략을 꾸리는 법도 배웁니다. 그러니 교정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작중에 그런 말은 한 번도 안 나오지만) 싸이코패스라 불려도 지나치지 않은, 악질 중의 악질인 셈입니다. 나쓰코는 인생 초기 단계에, 큰 봉변을 당하고(자업자득) 전과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운 좋게 먼 친척인 데쓰코(이 소설의 1인칭 화자)의 도움을 얻어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런 걸 보면 치밀한 머리씀으로 인생의 국면을 대비하는 타입 같지도 않은데, 저는 바로 이 점이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중요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즉, 나쓰코는 보통 장르소설에서 흔히 간판(미끼)으로 내세워지는 악마형 안타고니스트가 아니며, 오히려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주인공 프랭크 애빅네일 2세처럼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이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인간적인 구석"이 있으며, 무엇보다 나쓰코는 그녀가 사기를 치고 다닌 피해자들, 나아가 우리 독자들과 공유하는 바가 무척 많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반듯한 데쓰코가 그녀를 단죄하거나 버리지 못하고 내내 뒷수습을 하고 다니며, 그녀의 파멸이라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조바심을 치는 것입니다.

데쓰코는 그녀와 친척 간이며, 그런 인연 이전에 여러 건 뒷수습을 하고 다니다 붙은 정 비슷한 게 있었다고나 하지만, 신참 수습 변호사(소설 처음엔 그렇게 나옵니다)인 그녀를 고용한 오기와라 변호사는 전혀 "낫짱"과 안면이 없으면서도 나중엔 데쓰코 만큼이나 그녀를 역성들고 나섭니다. 이 오기와라 씨는 매사에 데면데면하고, 좋게 말하면 쿨한, 나쁘게 말하면 "성실하지만 열정이 없는", 현명하긴 해도 지극히 사무적인 개성입니다. 남한테 내세우는 정의나 원칙 같은 건 없어도 자기 나름대로 지키는 매우 보수적인 준칙 때문에, 이 "낫짱" 같은 타락한 뜨내기 인생은 사람 축에 넣지도 않고 볼 법도 한데 말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정말 낫짱에게는 모든 남자에게, 죄를 짓고도 태연히 용서를 구하며 그런 용서가 먹혀들 법한 어떤 치명적인 마력이라도 있는 여성이라서일까요?

사연이 처음 시작될 때 데쓰코는 물론 그녀를 고용한 오기와라 변호사, 혹은 (사무직원에 불과하지만 이 법률 사무소의 정신적 지주처럼 자리잡아 버린 착실한) 미유키 씨조차, 적성과 자질이 있을망정 모두 어딘가는 (사회인으로서) 어설픈 모습들이었습니다. 근 5년마다 한 번씩 사고를 치며 그들 앞에 나타나는 낫짱이 어떤 계기나 마련해 준 듯(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들은 매 국면마다 더 성숙해지고 더 치밀해지며, 사건과 사태의 겉모습보다는 숨겨진 진실을 더 잘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갖게 됩니다. 오기와라 변호사처럼 (허탈할 만큼) 성실하고 곧은 인물은, 낫짱이 사기를 치고 다닌 많은 "피해자들" 중, 제 직분에 충실하거나 정직한 사람, 최소한 낫짱을 만날 때 남부끄럽지 않은 태도로 살던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낫짱 같은 썩은 인생에게 일말의 동정도 품지 않을 만한 오기와라 씨는, 어떤 의뢰인에게는 "다시는 나쓰코 씨 앞에 나타나지 마시오. 경찰에 바로 연락해 버릴 테니." 같은 으름장을 놓기도 합니다. 전혀 안 그럴 법한 이가 저처럼 정색을 하고 나서니, 독자들은 오기와라의 내면에 무슨 생각이 오가는지, 천박한 낫짱의 사기 행각 그 실시간의 국면에서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 생각을 곱씹게 됩니다.

서평 앞에서 "혹시 데쓰코 변호사야말로 뭔가.." 같은 점잖지 못한 기대를 품었다고 말씀 드렸지만, 이분도 사실 아주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는 좀 튀는 인생입니다. 소설 초반에 "...아무리 능력 있어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얄팍한 구직조차 쉽지 않은..." 같은 대목이 있는데, 물론 이게 현재이 일본 실정은 당연히 아니며, 대략 결말(현재)에서 데쓰코 씨의 나이를 70대로 잡았을 때 근 오십 년은 거슬러올라가야 하니 시대상이 얼핏은 감이 올 것입니다. 데쓰코는 자신의 친오빠조차 "낫짱은 꽤 미인이지. 남자들이 쳐다도 못 볼 '진'까지는 못 되어도 그에 버금가는 '선'은 충분하고, 바로 그런 타입이 남자들이 정녕 사족을 못 쓰는 거라구."처럼 맞는 말(?)을 해 줘도 안 받아들입니다. 표정이 풍부해서 매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나 호들갑을 떨어 줄 만큼 미인도 아니다, 차라리 내 언니가 외모로는 더 낫다. 어떠신가요? 대체로 가까운 지인에 질투를 느끼는 여성들이 이런 식으로 "불편한 마음"을 정리, 아니 기만하고 넘어가는 것 같지는 않을지. 그런데 소설을 끝까지 읽어 보면, 데쓰코 변호사는 매우 솔직하고, 그런 솔직함은 자신의 감정이나 내면을 향할 때에도 별반 순도가 흐트러지는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화자"는 사실 "광인, 범인"으로 이어지는 장르 공식이 있긴 한데, 앞서 말했듯 저는 이 소설을 장르물로 보지 않기로 했으므로 이 공식은 폐기해야 할 듯합니다.

여담입니다만 낫짱 같은 타입은, 일본은 모르겠으되 한국에선 의외로 드물지 않게 보는 유형입니다. 일상에서도 이런 과대망상형, 타인 착취형 사기꾼들은 종종 목격되고, 한국 현대사에서 큰 물의를 일으킨 몇몇 여성들이 그 대표격이죠. 그나마 외모가 낫짱처럼 빼어나기라도 하면 (아무리 굴곡지고 비루한 인생일망정) 제 활개는 펴고 다니는데, 그렇지도 못한 인생은 고작 인터넷에서만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하곤 합니다. 입만 벌렸다 하면 거짓말이고, 주관적 망상이 객관적 현실인 양 사기를 치곤 하죠. 실물로 보면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여건이라는 게 다행이긴 합니다만.

나중에 입사한, 앞으로는 오기와라 법률사무소를 이끌고 가야 할 이소 변호사를 두고, 선배들(사무직 미유키씨도 포함해서)은 "그가 장래성이 있어 보입니까?" 같은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저는 이 대화가 짠하게 느껴진 게, 사실 이 이야기는 "낫짱을 간판으로 내 걸고 펼치진, 속을 까 보니 뎃짱의 일생을 다룬 성장 소설"로 정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모든 게 서툴고 고객의 기분도 하나 못 맞춰 주는 데쓰코는, 과연 한참 뒤의 이소 변호사처럼 가능성이 엿보이기나 한 인재였을까요? 데쓰코는 물론 성격이 차분하고, 정직하고, 친절함보단 진정성으로 의뢰인과 소통하며, 무엇보다 머리가 좋습니다(마지막 장에서 단 한 큐에 소란꾼을 말로 제압하는 장면을 보십시오. 물론 그녀가 장년을 넘긴 후의 일이긴 하지만, 노련함만으로는 쉽게 정리가 안 되는 쟁점을 날카롭게 짚어낸 겁니다). 하지만 특유의 깐깐함과 직설적 성격, 그녀 같은 인재를 아직은 품을 준비가 안 된 미숙한 사회로부터 그녀가 입을 수 있었던 상처 때문에,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로 언제든 주저앉을 수 있는 취약함이 있었던 겁니다. 그랬다면 사카구치 씨와 이혼할 일도 없었겠고, (결말에서 암시되듯) 꽤 성공적인 커리어는 완성되지도 못했을 겁니다.

저기... 보험 사기꾼과 대화를 나누는 중간 부분에서, 그네에 앉은 쓸쓸한 낫짱과 자신이 겹쳐 보였다는 대목 기억나실 지 모르겠습니다. 대략 그 시점부터 데쓰코는 낫짱으로부터 뭔가 배우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자신이 겪을 시련과 좌절을 몇 발짝 앞서 미리 부딪히고 대신 헤쳐주는(물론 본인이야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겠으나) 낫짱에게, 무형의 혜택까지 입었던 겁니다. 낫짱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의 수호자라고 제 입으로도 말한) 데쓰코에게까지, 몇 번이나 수임료를 떼어먹고, 대체로 인생 내내 민폐나 끼치는 약탈형 이기적 인물처럼 보이지만, 데쓰코는 왠지 그녀의 타인들을 상대로 한 사기행각(데쓰코 자신은 결코 감행 못 할)에서 왠지 대리만족까지 느꼈던 거죠. "세상에 전적으로 순진하고 선량한 피해자란 없다. 그들 역시 남을 이용하고 갈취하려 들지만, 낫짱 같은 이가 더 순발력이 좋고 영리했기에 승자와 패자가 갈렸을 뿐이다. 정말 선량한 이 같았으면 애초에 낫짱과 엮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캐릭터들의 성격이 소설 내내 일관되게 구축되었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단역의 경우 한참만에 나타나면 "이게 누구였지?"하며 잠시라도 갸웃거리게 되는데, 가쓰라 노조미는 어느 장면에서도 인물의 개성을 분명히 드러내므로 그런 헷갈리는 수고가 독자로서 최소화됩니다(나왔다 하면 아 누구 하고 바로 생각이 난다는 거죠). 직설적인 설명 없이 주인공 데쓰코의 성격이 (이소의 표현처럼 "무사") 독자 앞에 완전히 그림이 그려지는 것도 좋았는데, 에피소드나 타인의 표현뿐 아니라 심지어 소설의 플롯을 통해서도 그렇습니다. 여자한테 "결혼"이란 사건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집니까. 헌데 데쓰코의 결혼과 이혼은, 낫짱과의 조우와 헤어짐이란 "메인 이벤트" 사이에서, 마치 "처삼촌 묘 벌초나 하듯" 심드렁하게 회고될 뿐입니다(심지어 우리 독자에게도, "아 그 사카구치 상과 한때 맺어졌었구나! 근데 뭐, 전 남편이라고?" 같은 반가움과 충격을 던질 만큼). 쿨한 주인공의 성격이 쿨한 "플롯"을 통해서도 부각된다는 건 또 흔치 않은 체험입니다.

데쓰코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입니다. "커리어 우먼"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흠 잡을 데 없는 인생인데, 이건 그녀가 초심을 유지한 직업인이었을 뿐 아니라, 그 쿨하고 정직한 감정상의 개성을 인생의 황혼까지 지켜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반면 낫짱은 사기꾼으로서 딱히 파멸을 맞지도 않았고, 끝까지 큰 액수의 합의금을 뜯어내며 윤택한 노년을 보내는 것 같기는 하나 왠지 인생의 승자(아무리 너그러이 봐 주려 해도) 같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법률사무소에선 "진화"라고 평가했지만(물론 이건 냉소입니다), 나쓰코 자신이 자신을 돌아봐도 "이게 과연 누구일까?" 싶을, 변신과 타협과 굴복을 거듭했던 졸렬한 수성이 아니었을지요. 하지만 처음의 자신을 지켜낸 데쓰코도 마냥 떳떳하지만은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 떠맡았을 수도 있는 죄업이라든가, 감수했어야 할 굴욕을 어찌 보면 공인된 사기꾼인 낫짱이, 각각의 인생 먼 무대에서 대신 떠맡았던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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