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력의 사람들
발레리아 루이셀리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사람은 누구나 중력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신이(神異)한 능력을 가진 이를 묘사할 때 상투적으로 "물 위를 걸었다"는 표현이 쓰이듯, 무거운 지구의 끌어당김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그 사람은 이미 모든 속박과 굴레와 아픔과 고뇌로부터 초탈한 존재나 마찬가지겠습니다.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사는" 같은 말이, 높은 이상을 품고 살아도 현실의 제약을 무시할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비슷하죠. 현실의 한계를 유념해야 꿈도 이룰 수 있다는 게 물론 상식인데(마치 중력장의 위력이 우리 모두의 상식에 속하듯), 혹시 정반대로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요? 알고 보면 우리 모두는 공중부양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이미 허공을 떠 다니고 있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혹은, "꿈은 (언젠가)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이미 꿈은 이뤄졌다든가 말이죠.

이제는 삼십대 중반을 넘긴, 북미 일대와 널리 스페인어권에서 단연 주목받는 멕시코 여성 작가인 발레리아 루이셀리가, 아직 서른이 되기 전 완성했던 장편이 반갑게도 한국말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불교 철학에서 "제법무아" "제행무상"을 말하는 것처럼, 어쩌면 존재하지도 않는 걸 제 생존의 편의를 위해 색(色)을 가르고 경계를 지르는 망동을 사람은 일삼아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은 본문 중 쉴새없이 등장하는 문학가, 예술가들, 그들의 작품, 또 작품들 속에 쓰인 상징과 기호(대부분 서유럽과 미국, 간혹 남미 스페인어권 소속)의 방대한 인용을 잠시 잊는다면, 이런 동양적 세계관을 진하게 환기시켜 주는 주제를 담습니다. 주제만 그런 게 아니라 소설의 형식마저 그에 걸맞게도, "빠르게 교차하는 미니쿠엔토들이 태피스트리처럼 직조되며(역자 후기에서의 표현입니다)", 서로 멀찍이 떨어진 시공간을 넘나듭니다.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핵심 줄기는, 사이가 좋았다가 멀어질 뻔하다, 다시 가까워지는 듯하며 서로를 잃어버리고, 기묘한 계기를 밟아 다시 만나는(?) 어느 가족을 다룹니다. 이야기만으로만 좇으면 매우 단순하기 짝이 없죠.



"다시 만난다"라는 표현은 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자께서는 후기의 해설 속에서 이 작품의 구조를 크게 N, N1, N2의 세 갈래(의 층위적) 서사로 나눌 수 있다고 하십니다(이하, N 등은 소설 본문 속이 아닌 역자님의 표기, 규정입니다). N에서는 주인공이 여성인데, 그녀는 시나리오 작가인 남편과의 사이에 "중간아이"와 "아기" 두 자녀를 둔 엄마, 아직 유아인 둘째에게 (때로 아주 힘들어하며) 수유를 해야 하는 꼼짝없는 평범한 주부입니다. 다만 그녀는 허름한 출판사에서 엉터리 번역(본인 스스로 이 일을 한다고는 안 했지만, 사연의 진행을 보면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나쁘다고나 해야) 등 출판 쪽 일도 하기 때문에 맞벌이 비슷한 사정이었으나, ..... (이후 어떻게 되는지는 직접 읽어 보시길요)

N1은 이 여성이 N 속에서 써내려가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중간아이(자기가 붙인 이름인데 이유는 스스로 그럴싸하게 대더군요)와 남편이 함께 읽기도 하는데(참여는 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과 등장인물들도 역시 같습니다. 즉 남편, 중간아이 등 가족이라든가, N 속에 나오는 주인공 여성의 친구(근데 이게 실존인지 환영인지가 모호하죠. 어차피 구분이 의미가 없다지만)들도 고스란히 등장합니다. 나중에 가면 어느 게 N이고 N1인지 더 뒤섞이는데, 이상하게도 우리 독자들은 머리를 써 가며 "가만, 이게 소설(속 소설)이 아니라 액자인가?"라며 헷갈려하지 않습니다(SF라면 그래야 하는데요). 오히려, "아 N과 N1을 나눌 필요가 없구나. 그냥 읽어내려가야 더 편한 하나의 이야기였구나."하고 깨닫게 되죠. 이 규칙을 알아야 이해가 빠르다는 게 아니라, 작가가 이를 자연스럽게 독자한테 납득시켜 준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한마디로, 소설(=소설 속 소설)이 현실(소설)이고, 현실이 소설이란 뜻입니다.

꿈은 이루어지나요?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돕...는 건 아니고ㅋ, 자기 실현적 예언이란 말이 있죠. 물론 물리계는 엔트로피의 법칙이 지배하기에, 부정적인 기대는 현실화하기 쉬워도 그 반대는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이 비슷한 뜻으로 작품 중에 나오는 말 중에, "인생에서 배운 쓰디쓴 교훈은 다만 너무 늦게 깨닫게 되기에, 교훈으로서도 별 쓸모 없는 게 대분이다"라는 게 있기도 합니다. 여인은 처음에 꼭 갈 필요도 없는 필라델피아 출장을 우기는 남편("시나리오 작가가 왜 촬영 현장에 따라가야 하지?")을 의심합니다. 미래의, 혹은 가상의 배신에 복수하기 위해, 여인은 선제적으로 자신의 소설(N1) 속에서 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심지어 여자(사람)친구와도 친구 이상의 관계를 가집니다. 여전히 이 완성 중의 소설을 읽는 남편은 이제 불안해하고, 어디까지가 소설인지 계속 따져(그러나 소심하게) 묻습니다.

"그걸 왜 궁금해해?" 이 말은 아내가 저 소심한 남편에게 되묻는 질문이 아니라, N2 속의 힐베르토 오웬이 눈먼 늙은 괴짜에게 듣는 말입니다. 오웬은 맨해튼 체류 시절 호머 콜리어(앞의 장님)에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먼저 듣습니다. "이봐, 아직도 자네의 미래가 기억 안 나나?" 미래가 어떻게 "기억"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오웬은 골똘히 생각에 잠기지만 노인의 저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를 딱히 여기며 노인은 다시 한 마디를 던집니다. "자네가 쓴 글을 보란 말이야."

아내는 이제 남편과 아주 사이가 멀어지고, 급기야 남편은 짐을 싸서 그녀를 떠나기까지 합니다(여기까지는 N에서의 메타적 언급이 있으므로, N1만에서의 사정임이 확실하죠). 여인은 초대를 받고 방문한 장소에서, 일련의 미술품에 한참 시선을 빼앗깁니다. 웬 뚱뚱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작품의 창작자가 자신이라며 집에 초대를 하는군요. 나흘 정도를 머무는데 처음에는 이 뚱보가 발기가 잘 안 되어 애를 씁니다. 뚱보의 몸집에 걸맞은 거대한 욕조 안에서 혼자 놀기 심심해진 그녀는 친구 다코타를 불러 남자를 그녀에게 인계합니다.. 자, 이 모두는 아직도 그녀가 쓴 소설(N1) 속에 머무는 내용일까요, 아니면 소설 속으로 빠져 나와 자기 실현을 시작한, 상위 서사 N의 일부일까요? 여인은 소설을 통해, 그간 불길히 여기다 못해 기정사실화해 버린 미래의 한 줄기를 현실로 만들어버린 걸까요?

"엄마, 아빠가 바퀴벌레처럼 작아져 보이질 않아, 찾아야 할까봐." 그런데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바퀴벌레는 마치 카프카의 <변신> 중 그리고리처럼 제법 클 수도 있고, 어쩌면 이 작품 후반부에서 공포를 독자에게 선사하는 꼬리 없는(잘린?) 고양이만한 덩치일 수도 있습니다. 느닷 작아져 아이 눈에 안 띄는 남편은, 정말 그녀가 예언처럼 작성한 소설 속의 서사처럼, 서로의 감정상 거리를 반영하듯 멀어졌는지(줄어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여인은 전철을 타고 출퇴근합니다. 어두운 통로를 달리는 열차의 차창을 응시하면 일부는 바깥이 보이고, 일부는 유령처럼 허공에 떠 있는 자신이 보이는 게 당연하죠. 헌데 여인은 자신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실존 인물 오웬, 즉 힐베르토 오웬을 보게 됩니다. 이때부터 소설 속에는 N2가 다른 섹션으로 깔리고(사실 이는 독자의 오해인데, 그 이유는 뒤에 설명하겠습니다), 오웬은 청년기, 부유한 가문의 여인과 잠시 가정을 이루다 이혼하고 "전 아내"를 "상처 입고 재능을 비로소 꽃피운 유명 인사"로 만들어 준 후 굴욕감에 떠는 중년기, 그리고 (호머 콜리어를 만난 후 그처럼 눈이 멀어 버린) 노년기, 이렇게 세 시기의 자아가 교차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따라서 이 소설은, 그 지분 1/3을 가진 주인공이 이 힐베르토 오웬인 셈입니다.

힐베르토 오웬은 물론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그 멕시코의 시인이 맞습니다(철자는 Gilberto인데, 스페인어라서 e, i 앞의 g는 ㅎ처럼 읽습니다. 장군을 "헤네랄"이라고 하는 것처럼). 멕시코인인데 성이 오웬인 이유는 부모가 아일랜드인 이민자 출신이라서입니다. 말하자면 콜롬비아 보고타(아내의 출신지)에서나, 맨해튼에서나, 자신의 무덤을 미리 본 필라델피아 어디서나 이방인으로 머물렀던 셈이죠. 이런 그가 "사진에 안 찍히고 맹인 눈에는 오히려 보이는" 유령인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하겠는데, 생전에나 사후에나 유령인 그가, 현대 미국에서 (역시 이방인으로 사는) 주인공 여인과 전철에서 기묘하게 조우한 것 역시 당연합니다. 참고로 하필 전철(의 창)이 첫 만남을 위한 장소로 등장한 건, 이 작품 중에도 인용되듯 오웬이 뉴욕의 전철에서 느낀 강렬한 위화감(아니, 친밀감)과 관계 있습니다. (물론 에즈라 파운드의 그 작품 역시 교묘한 맥락으로 환기됩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젊은 시절 동거했다거나, 필라델피아에서 노년을 보냈다거나 멕시코 부영사로 근무했더거나  하는 부분은 실제 오웬의 삶과 일치합니다(물론 세부적인 장면은 다 작가의 상상이겠지만). 헌데, 젊어서 날씬하고 매력적이었지만 다 늙어서 눈도 멀고 볼품없이 살도 찐 이 노인은, 의욕의 한계를 느끼며 애써 이룬 가정도 다 해체되어가던 그 순간 여인의 집 한 구석에서 "중간아이"에 의해 "발견"됩니다. 우리는 이미 여인이 오웬과 동일인물이란 사실을 눈치챘는데요. 둘은 성별도, 속한 시대도 사는 공간(일부가 겹치긴 하나)도, 심지어 생사 여부도 다르지만, 인격의 동일성을 유지, 아니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장면에서, 오웬은 알고 보니 바로 자기 남편(이거 스포일러일까요...)임이 "발견"되니, 세 사람은 결국 한 사람이었던 셈입니다. 진정한 경계 해체, 그리고 피안과 차안, 나와 너, 이승과 저승, 죽음과 삶이 화해하는 순간입니다.

"죽음과 삶은 관점을 달리했을 뿐 결국 같다." 저는 그런데 이런 논리가, 작품 중에도 나오듯 sorites의 역설로도 해결 가능하다고 봅니다. 머리가 십만 가닥 있는 사람은 대머리인가? 아니다. 그럼 그 사람보다 한 가닥 적은 사람은? 역시 아니다. 이런 식으로 수를 하나하나 줄여나가면, 결국 머리가 하나도 없는 자 역시 대머리가 아니라는 결론이죠. 우리는 누구나 매 순간 조금씩 늙어갑니다. 늙어간다는 건 생명의 원기가 몸 속에서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처음 만난 유부녀를 끌어안으려다 마구 구타당하던 시점의 오웬은 이미 죽은 목숨인가요? 창 밖을 내다보며 수음하던 시절의 날씬한 청년(오웬 자신)보다는 죽음에 가까워졌지만, 그렇다고 죽은 건 아닙니다. 이미 살아도 산 게 아닌(눈도 안 보이고 가족들로부터도 배제된) 오웬이 아직 죽은 게 아니라면, 유령으로서 여인과 소통하는 오웬도 죽은 게 아니라는 게 작품의 논리입니다.

trustafarian은 스페인어는 아니고 영어 어휘입니다. 부유하면서도 지레 겸손한 척 격식없는 척 가난한 예술가연하는 젊은이를 뜻하는데, 별로 젊지는 않지만 N1에 잠시 등장한 저 뚱보(여자를 자기 집 욕조로 초대했던)도 그런 타입이고, N2의 젊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도 여튼 젊은 시절에는 그런 삶을 보낸 게 맞습니다(이 사람은 진짜 재능있는 예술가였지만). N1과 N2에 이처럼 겹치는 요소가 많으니, 이 두 하위계열 서사는 이미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N과 N1은 처음부터 경계가 모호했으니, 이 세 서사는 결말에서 역시 하나로 통합됩니다. 호머 콜리어의 말처럼 과거와 미래 역시 구분의 필요가 없는 하나였으니 더 거리낄 게 없겠고요.

역자 후기가 끝난 후에는 작가 루이셀리가 2014년 한 잡지에 작품 해제 삼아 직접 쓴 글이 하나 더 실려 있는데, 여기서 작가는 막 취학할 무렵의 자신이 (아직 냉전의 긴장이 가시지 않은) 서울에 체류하며 외국인 학교(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의 기억을 털어 놓습니다. 한국어판만을 위한 기고는 아니지만 여튼 이 때문에 우리 한국 독자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죠. 여기서 그녀는 외교관 자녀로서 겪은 여러 추억을 털어 놓는데, 힐베르토 오웬도 말년에 원치 않게 부영사직을 지냈으므로 두 인물(오웬과 작가 루이셀리) 사이에 교차점이 또 하나 마련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권말의 이 짧은 글이 "N 0(제로)" 정도로 다가오던데, 어차피 우리가 중력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서사의 층위, 국적, 성별 따위는 다 무시할 권리가 있기도 하니 이게 독단적, 자의적 규정이라고는 생각 안 되기도 하고, 이 멋진 작품을 끝까지 즐긴 독자의 특권이기도 하겠습니다.

삶의 해체를 글쓰기로 이겨낸다는 게 대강의 요약이겠지만, 사실 해체와 복원(혹은 재생)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할 것 같네요. 작가(주인공)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그 유명한 서두를 언급하는데, 거기서도 crack-up과 break-down은 의미가 상반되는 두 부사(파티클)로 같은 외연-내포를 이룹니다. 이처럼 상충되어 보이는 게 알고보니 하나라는 깨달음은 이 소설에서 여러 모로 중대한 암시를 던집니다.



소설 속에서는 "엉터리 번역" 이야기가 나오지만(이는 미국 안에서 영원한 타자로 살아야 하는 라티노들의 비관적 인식과 각성을 상징합니다. 미국인들은 영원히, "가까운 이웃"을 오해하며 살고 그 오해의 틀과 경계에서 결코 안 빠져 나오려 드는 거죠), 이 한국어판은 너무도 풍성한 후주(라기보다 아예 작품 해설)가 달려 있어 독자의 이해를 친절히 돕습니다. 오웬의 작품에 대한 주코프스키(객관주의 유파 시인. 오웬과 거의 동년배였습니다)의 번역이 새로 발견되었다며 가짜를 지어낸 그녀의 대담한 행동을 보면, 마치 고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가 생각나기도 하며, 또 그만큼이나 방대한 문학적 상징이 작품 곳곳에 녹아든 모습입니다(이래서 역주가 중요해지고요). <푸코의 진자>에서 장난스러운 주인공들은 위조 문서 때문에 목숨을 잃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어쩜 근원의 각성과 화해, 평화, 해탈을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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