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의 여자들 1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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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들은 다 알겠지만, 매컬로 여사의 대하 역사 소설 <마스터즈 오즈 로마>의 제5부 제목이 "카이사르"이고, 그에 앞선 이 제4부의 제목은 (오히려 부가어가 몇 더 붙은) "카이사르의 여자들"입니다. 우리 상식으론 "어떠어떠한"이라든가, "~의 무엇"이 붙은 제목이라면 그 후편에 배치되거나, 아니면 본편이 아닌 외전으로 구성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대뜸 생각될 텐데도 말이죠. 매컬로 여사가 이 넷째 사연(총 3권)을 구상하고 완성할 무렵이라면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진 시점도 아닌데 왜 이런 편제일까. 그런 의문은 역시 책을 직접 읽어 봐야 풀릴 수 있습니다. 풀려도 아주 시원하게 풀립니다.

역사 소설만이 이룰 수 있는 미학적 성취랄까 존재 이유라 하면, 현전 기록의 빈 부분을 메꾸고 그 타당한 (잃어버린) 고리들을 건전하고 학식 깊은 상상으로 복원하는 데에 있겠습니다. 바로 이 점에 매혹되어, 이미 정사서나 연구서들을 두루 읽고 제법 지식을 쌓은 독자들조차 (양질의) 역사 소설에 열광하며, 저자의 담론과 이야기 속으로 신나게 빠져 드는 것입니다. 한편, 잘 짜여진 역사 소설은 과거 행적의 그럴싸한 복원 외에도, 문학 본연의 기능인 "고아한 인간성의 강조, 감동과 보편적 주제의 만남"이 가능하기 때문에, 故 매컬로 여사처럼 탁월한 작가의 걸작을 읽는 체험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자 보람입니다.

"로마의 마스터(즈)"라 함은 누구입니까? 1부의 제목이기도 한 "로마의 일인자"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나 술라 중 한 사람이기만 해야 정해진 답일까요? 소설의 배경이 된 당대에는 "primus inter pares"라 불린 이 최고의 실력자는, 사실 시대의 과제와 소명을 영웅적으로 해결해 온 여러 걸출한 인물들에게 두루 붙었으며, 무려 반 밀레니엄을 공화정 체제로 이어온 그들에게, 제정 시기의 현란한 이름들이 아니라 해도 여럿이 존재했음이 명백합니다. 한편으로, primus inter pares는 그저 동료(par. 저 라틴어 pares의 주격 형태)들 중의 으뜸이라는 뜻이니, 스스로를 신 혹은 그의 아들로 지칭한 오리엔트(나중에는 로마 제국 역시)의 군주와는 다른, 보다 겸손하고 합리적인 자세와 세계관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제위에 오르지도, 천수를 다하지도 못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지만, "로마의 일인자"라는 어구가 첫번째로 연상시킬 빼어난 정치가, 군인, 지도자가 그라는 점에는 아마 거의 모든 이들이 동의할 것 같습니다.

지난 3부에서 우리 독자들은 광기 어린 독재자, 어린 시절의 상처와 고생이 그 영혼에 깊은 흠결을 남긴 불행한 영웅 술라가, 어떤 모습으로 최후의 몸부림을 치고, 또 어떤 과정으로 정치적 몰락에 다다랐는지 실감 나게 살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새로운 시대가 희구할 만한, 전혀 새로운 타입의 파격적인 영웅이, 전혀 예상 못 한 지방 신흥 가문에서 어떻게 "라이징"하는지도 숨죽여가며 지켜 보았습니다. 저는 그 스트라보의 아들, 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자칭)의 행적을 볼 때면 역시 그만큼이나 거침 없는 개성에다가, 유서 깊지 못한 (그러나 당대의 활력이나 재력은 누구 못지 않은) 가문의 귀한 아들이, 이 혼란스럽고 무가치한 방황을 일삼는 시대를 일거에 쓸어버리겠다는 듯 난폭히, 그러나 화끈하게, 창과 칼을 휘두르는 장관 혹은 혼란상이, 꼭 일본 전국 시대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지난 적폐를 청산하고 활짝 열리려면, 저처럼 머리에 든 것 없고 발상은 무모하며 도대체 당면한 위험이 초래할 수 있는 재앙 그 치명적 크기를 계산할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런 무법자 타입이 아니면 구질구질한 폐습과 썩은 기득권을 일소하지 못합니다. 그쪽이든 여기든 언제나 사정이 그랬습니다.

이 4부에서, 2부 말미에 어린 소년으로 첫 모습을 보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제 어엿한 청년으로, 그것도 뭇 여인의 혼을 쏙 빼어놓을 만한 미남자로 자라나, 역사에 남을 그의 치적만큼이나 유명한 엽색 행각을 이어갈 서곡을 요란하게 연주합니다. "여인들"이란 어구가 4부 전체의 제목에 붙어도 이상할 바 조금도 없을 만큼, (원서를 이미 다 읽어 본 독자로서) 이 4부에 담긴 사연은 말 그대로 "여자들과 정신 없이 얽혀드는 카이사르의 호색한(好色漢) 행각"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 나이우스 폼페이우스도, 먼 옛적 알렉산더 대왕을 연상케 할 만큼 늠름한 미남자이며, 한창 때의 욕구를 어떤 식으로건 풀어야 할 만큼 정력적인 면모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행위" 혹은 "연애"와는 다른 것이, 그의 스타일(이라 부를 만한 게 혹 있다면)은 그저 폭력적이고 투박하며 일방적입니다. 반면 카이사르는 섹스를 할 때도, 상대에게 긍지와 보람을 느끼게 할 만큼 예술적인 소통에 성공하는 능력자입니다. 여자는 그저 육체적 자극만으로, 남자가 베푸는 충격의 무식한 강도(强度)만으로 행복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한 남자가 상대 여성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사랑하는지는, 전희와 본 의식, 후희의 전과정에 걸쳐 남자가 들이는 성의와 기교의 수준을 느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카이사르는 어느 여성에게나 최고의 연인이었으며, 일시적이든 정식 혼인을 거친 관계이든 그의 곁에 머문 여인들에게 생애 처음으로 육신의 절절한 환희를 느끼게 해 준 은인과도 같은 남성이었습니다. 매컬로 여사의 작품 중에 형상화된 젊은 카이사르(아마 실제 역사에서도 이랬을 개연성이 크지만)는, 이처럼 도무지 실존했을 법하지 않은, '마스터 오브 러브"에 가까운, 에로스의 현인태(現人態)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카이사르는 어쩌면 이렇게 완벽한, 여성들의 위로자이자 극한의 연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이미 1부, 2부에 충분히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위대한 인물에게는 위대한 어머니가 항상 배후에 버티고 있었으며, (비슷하게도) 사랑스러운 남성 역시 애정을 듬뿍 담아 성장기 내내 양육한 살뜰한(그리고 아마, 본인 역시 한때 매력적인 여성이었을) 어머니가 길러내는 법입니다. 사랑을 넉넉히 받고 자란 남성이라야, 다른 여자를 바른 방법 효과적인 테크닉으로 사랑할 수 있고, 또 여성으로부터 아낌 없는 사랑을 받는 법입니다.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위대한 정치가이자 매혹적인 연인(현대 영어로 표현하면 smooth operator)을 한 남성의 육신 안에 동시에 빚어낸,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다 할 가장 성공적인 어머니였습니다. 이리 어머니 한 편에다 공을 다 돌려도 되는 것이, 그 부친 가이우스(아들과 이름이 같죠)처럼 유약하고 우유부단한(게다가 일찍 죽기까지 한) 위인에게 아들이 무슨 좋은 영향을 받았을 것 같지가 않아서죠.

이 4부 1권에는 좀 충격적인 성애 묘사(전편들에 비해)가 종종 눈에 뜨입니다. 카이사르, 뭇 여인에게 성애의 신으로 군림한 그가 본격 주인공으로 구성상 부각되는 단계니 어쩔 수 없습니다. 말과 지성과 배려와 책략과 다양한 육체적 기교와 타고난 미모("체모 하나 없는")로 여자를 녹이는 그이지만, 이런 그조차도 쓴맛을 다시게 한 여인이 두 명 나옵니다. 그 중 한 명은 지면으로 고작 그녀를 접할 뿐인 독자조차 충격에 빠뜨리고 공분을 자아내었던 만행으로 아직 기억에 생생할, 어느 누구의 생모인 포악하고 잔인하며 자기 중심적인 세르빌리아입니다. 역사상 "대체 왜 그가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같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종적으로 남긴 인물은 여럿이 있는데요. 그 중의 하나가 경력상 절정기를 누리던 카이사르를 동료 여럿과 함께 암살한 브루투스입니다.

그의 먼 선조가 폭군을 축출하는 데 큰 기여를 한 이였다는 점에서 누백 년 간 이어온 핏줄의 운명을 거론하는 이도 있지만, 매컬로 여사는 이처럼 그 인물의 성장 과정과 가문 간에 얽혀진 복잡하고 비극적이며 불쾌한 "사연"에서 그 단초를 찾으려 합니다(물론 이 부분은 작가의 상상이므로 그 이상의 의미 부여는 불필요합니다). 행위 중 상대의 엉덩이에 깊은 상처를 새기고서야 직성이 풀렸던 독부(毒婦), 그런 숨막힐 듯한 모친 밑에서 얼마나 큰 반항심과 좌절감, 열등 의식을 키웠어야 했을까 싶은 브루투스, 이 4부에도 잘 드러나듯 어머니의 간부(姦夫)이기까지 했던 시저를 내내 근거리에서 응시해야 했던 브루투스, 용모든 기질이든 매력이든 민활한 두뇌 작용이든 뭐 하나 카이사르보다 나을 게 없었기에 내면을 갉아먹는 고뇌에 시달려야 했던 불쌍한 브루투스가 그의 좌절된 자아를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는 거대한 복선이 벌써 여기서부터 깔리는 셈입니다.

신녀를 유혹하고 그 신세를 망치게 함으로써 비열한 자존을 채우려는 어느 한심한 귀족 자제의 에피소드도 들어 있고, 1~3부를 관통하던, 현대 워싱턴 캐피틀 힐(물론 이 소설의 배경이기도 한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따온 이름이죠)에서 벌어지는 정상배들의 모략은 저리가랄 만큼 간교한 정치가들의 책략 다툼도 여전합니다. 여사의 작품은 이처럼 시대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되, 그 속에는 살아 있는 개성과 실감 나는 의지의 충돌이 멋지게 구현되었다는 점은 이미 1부~ 3부를 읽고 등록한 제 지난 리뷰에서도 밝힌 바 있습니다. 번역도 정말 꼼꼼하게 이뤄졌는데요, 예를 들어 "티베리스" 강은 종래 다른 영문 소설의 영향 때문에 "티베르" 강으로들 알고 있지만(심지어 학교 세계사 교과서도 그렇게 나옵니다), 이는 영어식 표기일 뿐이고(그나마 "타이버"로 읽습니다), 이 책에서 올바로 표기하는 것처럼 주격이든 소유격이든 모두 "Tiberis"일 뿐입니다. 로마 시대의 지명이니 당연히 고전 라틴어로 표기해야겠고, 비슷한 예로 우리가 흔히 "도리아"로 잘못 알던 지명 역시 "도리스"로 바로잡혀져 있습니다. 이런 몇 가지 예만 보아도 얼마나 정성 들인 번역과 기획이 이뤄졌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고, 이런 걸작이라면 이 정도의 성의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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