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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시간을 걷다 - 한 권으로 떠나는 인문예술여행
최경철 지음 / 웨일북 / 2016년 10월
평점 :
1) 유럽처럼 우리와 정서, 문화, 취향, 살아온 지난 내력 등이 판이하게 다른 지역을 여행하려면, 물론 가벼운 마음으로 현지에 떨어진 후 자연스럽게 와 닿는 느낌대로만 즐기다 와도 본인만 뿌듯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래도 미리 공부랄까 마음 자세 같은 걸 다듬고 갔다 오면 아마 남는 게 더 많고 더 충실한 시간이 되는 게 보통입니다. 준비를 해야 주어진 시간도 더 알차지고, 행여 돌발 변수가 나타나도 유연히, 별 손해 없는 대응도 가능하기에, 요즘은 다들 각자 능력 범위에서 (따로 돈 들 것도 없는, 그저 공부니까) 뭔가 챙겨 보고 떠나는 게 보통이죠.
2) 반대로 현지에 다녀올 생각은 없지만 그냥 교양과 지식을 쌓고 싶어서 이런저런 책을 들춰 봐도, 해 본 사람은 알지만 책(혹은 인터넷이나 기타 시청각 매체)만으로 접하는 타지, 타향이란 정말 그 진정한 이해에 한계가 있습니다. 안 갔다와 보고 아무리 열심히 파 봐야, 나 자신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기로나 정말 어느 선을 못 넘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타자, 타지에의 이해는, 책도 읽고(폭 넓은 간접 체험), 현지 답사(집중도 있는 직접 체험)가 동시에 이뤄져야 가능합니다.
3) 아무리 역사책을 파고들어도 이해가 안 되던 내용이, 해당 시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삼은 소설책 한 권 읽고 말끔히 납득되던 체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합니다. 물론 역사(팩트 사항)와 문학(픽션 속에 스며든 일정한 주관적 지향성)은 구별해야 하지만, 어떤 관점을 내 비전의 메인으로 삼을지는 좋은 기회(적절한 문학 작품)를 만나 더 강렬히 내 것으로 새기고 성숙시킬 수 있기 때문이죠. 직간접 체험으로도 충족 안 되는 어떤 목마른 부분은 상상과 영감의 결정체인 문학으로 해갈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위 1) 2) 3)이 모두 한 권에 담긴, 정말 보기 드문 정성과 내공이 담긴 멋진 책입니다. 저는 지금껏 이런 포맷으로 쓰여진 책을 한 번도 못 읽어 봤는데요. 우리 같은 일반 대중 독자가 읽기 좋게 쉽고 친근한 말투로 쓰여 있지만, 우리의 소양을 쌓아 줄 가르침은 적잖이 깊은 수준까지 파고 드는 서술입니다.
보통 텍스트로만 이어지는 서술이라면 그게 아무리 정확성을 기하더라도 전달에 한계가 있는데, 이 책에는 좀 이해가 어렵겠다 싶은 대목에서 반드시 맞춤형 도판이 등장합니다. 4) 만약 건축이면 말 본문 서술을 돕는 범위에서, 다른 사항이 생략된 평면도, 측면도 등이 딱 옆에 제시됩니다. 5) 주제가 되는 건축물의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양식을 저자나 다른 정평 있는 견해를 통해서만 묘사하면, 아무리 빼어난 문필가의 솜씨라도 역시 한계가 있겠는데, 이 책은 구도가 잘 맞는, 찍는 사람의 의도가 선명히 구현된 사진으로 본문을 뒷받침합니다.
4)와 5)는 다른 책에서도, 이 책에서만큼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전혀 못 보던 시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은, 건물과 유적과 미술품에 담긴 본원적 의미를 캐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역사적 배경을 독자 앞에 제시하기 위해, 6) 맞춤형 지도를 수십 컷 본문에 삽입합니다. 제가 지도 마니아라서 지도책도 모으고 웹 여러 곳에 있는 멋진 그래픽도 혹 보일 때마다 PC에 저장해서 컬렉션을 나름 꾸미는데, 이 책에 나온 지도는 (모르긴 해도) 저자님의 직접 편집이라 제가 딴 데서 본 적도 없고, 텍스트와 긴밀히 연결된 정보를 담은 덕에 본문의 방주(傍註)처럼 기능합니다. 정보는 필요한 걸 적절히 집중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 단계에서 불필요한 사항을 과감히 생략하는 요령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이 책에 실린 지도들은 그런 점에서 너무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른 역사책을 읽으면서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백지도를 하나 펼쳐 놓고 책 텍스트의 설명에 맞추어 손으로 그려 (채워) 가면서 스스로의 이해를 돕기도 하는데요. 이 책을 읽으면서 평소에 머리 속에 그림이 잘 안 잡히던 사항까지 말끔히 이해시켜 주는 지도를 여러 컷 만나 너무도 반가웠습니다. 좋은 책은 이처럼 저자가 자신의 의도를 잘 전달할 뿐 아니라, 독자가 평소에 품던 다른 의문까지 풀어주기도 합니다. 이 모든 미덕이 7) 깨끗한 천연색 인쇄로 이뤄져 독자가 보기에 너무도 편합니다. 이런 책은 저자와 편집진의 노고를 감안해서라도 목욕 재계하고 최대한 맑은 정신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만큼요.
책 표지에 나와 있듯 유럽 중에서도 서유럽, 그 중에서도 독, 불, 영, 서(스페인), 이탈리아의 문명에 초점을 맞춥니다. 대체로 a) 건축물과 미술품 b) 고대(초기 희랍 문명과 헬레니즘, 로마 제국까지 두루)에서 중세에 이르는 시기의 정치사, 문명사 c) 소설 형식으로 풀어주는 민중의 생활사 등 세 가지 줄기가 번갈아 서술됩니다. 한 가지 주제를 아무리 재밌게 풀어도 장시간 집중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데, 이 책은 a) b) c)를, 페이지 바탕색까지 달리 잡아가며 적정 분량씩 노출시키기에 독자의 시선을 내내 붙들어 둡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거나 다소 의문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책의 편집과 참신한 구성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무조건 저자의 치밀하고 꼼꼼한 설명에 동조하고까지 싶어졌습니다. 책 읽으면서 이런 느낌과 공감을 갖기도 드문 체험이었네요.
모두 여섯 개의 챕터인데, 첫 장은 로마네스크 양식입니다. 이처럼 일단 주된 모티프나 토픽은 건축물이나 미술품 등 현재 우리에게 남아 전해지는 유형적인(tangible) 대상입니다. 건축물과 유적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곁다리를 쳐나가듯 역사 이야기, 심지어 당대를 지배한 사조와 철학의 설명에까지 옮겨가는 식이죠. 앞서도 말했듯 이렇게 이야기를 끌어가도 이해를 돕는 보조 자료가 없으면 서투른 독자는 보조를 못 맞춰 가는데,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독자를 배려하는 품이 압권입니다. 수사(구교의 수도사), 석공, 그리고 제법 긴 분량(함께 모은다면)의 소설에서 중요 인물 중 하나인 클라우스가 등장하여, 건조하고 박제된 꼴이 아닌 피와 살을 갖고 살아 숨쉬는 "인간들"이 받아들이고 꾸려나간 역사, 인문, 미술, 조형 등의 의미가 무엇인지, 시간의 고금을 초월하여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어조와 감정을 불어넣으며 그럴싸한 한 편의 소설이 이어지는데, 이런 다차원의 접근을 통해 독자는 저자의 의도대로,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역사와 문화, 사상,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 서유럽인이라는 인간들"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갑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저 신학자에 그친 인물이 아니라, 당대 서유럽 문명권이 이해하던 모든 지식을 백과전서적으로 정리한, 중세 전반의 큐레이터적 지식인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를 다루며 종래 우리가 알던 평면적, 파편적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먼저 고딕 양식(성당 등)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화제를 꺼내고, 이에 반영된 "빛"의 원리를 중세인이 어디까지 이해했는지를 설명하며, 그 지식 체계의 챔피언이라 할 성 토마스의 견해와 철학까지 논급하고, 이어 중세라는 시대의 성격을 함축적이면서도 풍성하게 정의합니다. 그러니 줄글 한 편을 읽으며 건축, 미술, 종교, 역사 모두에 독자가 접근, 공감, 이해하는 셈입니다. 모든 지식이란 분야별로 따로 놀아서는 죽은 지식이며, 참된 지혜란 가능한 많은 사항이 이처럼 유효한 하이퍼링크로 연결연결되어야 생성 가능하죠. 뿐 아니라 이렇게 영양가와 밀도 있는 공부를 해야, 여행 갈 마음도 부쩍 내키지 않겠습니까? 한 번 갔다 온 곳이라도 말입니다.
르네상스라는 전혀 새로운 시대의 조류가 문화계, 지식인을 중심으로 도도히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기독교(구교)의 몰락이 반드시 그와 수반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역사상의 모든 조류와 사상, 대세는 반드시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배타적으로 몰아내어야만 제 자리가 잡히는 건 아니죠. 그러나 가톨릭의 교세는 유럽 전체에서 전반적, 불가역적으로 퇴조하는 모양새였는데, 저자는 이에 대해 (이런 성격의 책에서 꼭 다룰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상세히 개인적 논증을 펴고 있습니다. 물론 특정 종파를 비하하자는 게 아니라, 앞선 두 챕터에서도 자상하게, 또 주제(건축과 미술)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설명이 나왔듯, 직전 시대의 성과와 미덕(아쉬운 대로라도)을 그대로 이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배려의 산물에 가깝습니다. 동시에, 이 책이 그저 건축 양식이나 명소, 미술품에 대한 단선적 설명이 아닌, 인문과 역사 전반을 조망하자는 보다 깊숙한 저술의도를 잘 실현하는 시도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바로크 시대로 넘어가며 처음 등장하는 내용이, 주인공들 중 하나인 프란치스코가 어느 과부의 화형식을 무기력하고 침통하게 지켜 보는 장면입니다. 언제나 시대의 전환이란 점이적(漸移的)이어서, 미처 청산되지 못한 구풍의 잔재와 인습이 미래의 앞길을 (미미하게, 혹은 지저분하게) 가로막기도 하는 법이죠. 책을 읽으시는 분들은 이처럼 연재 소설처럼 이어지는 내용이, 집중만 하면 꽤 재미가 나기 때문에 결코 놓치시기 말길 바랍니다. 이 소설이 또한 시대와 공간을 압축적인 이미지로 한번에 확 전달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바로크 시대 건축물 하면 알프스 이북만주로 떠올리기 쉬운 게 한국의 독자들인데, 이 책은 로마 인근을 두루 짚고 있어 선입견 때문에 소홀하기 쉬운 곳도 살피게 돕습니다. 그러니 아 다음엔 여길 한번 가 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정말 절로 듭니다.
서서히 대영제국의 시대가 열리며 등장인물도 워렌 같은, 그 시절의 전형을 일부나마 대변할 만한 캐릭터가 새로 등장합니다. 신고전주의가 등장하여 정연한 질서와 체제의 미덕을 변호하는 풍조가 생성되는가 하면 계급 혁명의 전조를 예고하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들이 지성계와 예술계에서 이미 두드러진 사조로 부상합니다. 이처럼 모순되어 보이는 거대한 두 흐름이 맞부딪히며 서유럽은 오히려 전례 없는 발전과 혁신의 동력을 마련하며, 건축과 미술에도 이런 인간 정신의 방향과 역동성이 반영되는 흔적이 뚜렷해지고, 저자는 예리한 눈길로 독자에게 일일이 이를 포착하여 주체적인 시선으로 소화해 볼 것을 권유합니다.
책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지금까지 진지한 소통을 이뤄 온 상대였던 그들의 과거가 어떻게 현재에 안착했는지, 바로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대화와 소통의 의의는 무엇인지, 현대 미술과 건축, 그리고 이 분야 거장들의 자취와 업적을 통해 다시 정리를 시도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특히 좋았는데요. 과거 역사, 인문, 문화에 대한 회고는 여태 많은 저자들이 시도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입체적으로 돌아본 서유럽의 역사와 종적이 당시에는 어떤 비중과 색채였는지를 파노라마(그것도 3D)로 보여줬을 뿐이라, 이런 의의를 현재에까지 유기적으로 접목시켜(4차원이라고 해야겠네요)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기까지한다는 거죠. 책을 읽고 나서, 교양이 늘고 보는 시야가 넓어졌을 뿐 아니라, 아 밖의 넓은 세상이 이처럼 친근하고 현재적 의미로 다가올 수 있구나 하는 각성 때문에 문득 영감과 의욕까지 솟게 하는 게... 별 열 개가 아깝지 않은 멋진 체험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