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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미술관 - 길 위에서 만난 여행 같은 그림들
박준 지음 / 어바웃어북 / 2016년 10월
평점 :
발길 닿는 대로 각처의 미술관, 박물관을 들르는 건 여행자의 특권입니다. 강대한 권력자는 정치 투쟁의 정점에 선 후 거대한 건축물, 조형물을 짓지만, 풍요의 탑을 쌓은 시민들은 경기 활황의 끝에서 (이상하게도) 예술가의 산고가 낳은 작품의 전당을 찾아 그 기교와 분투의 혼에 경배하곤 합니다. 덕분에 타지를 찾은 이방인은 지친 혼을 달래기에 적합한 객잔을 이런 미술관에서 마련하기도 합니다.
박준 선생님은 자신이 세계를 둘러보며 방문한 여러 미술관에 대한 기억을, 자신이 찍은 사진들과 함께 책 속에 예쁘게 펼쳐 놓고 있습니다. 미술관이라는 시설, 건물, 고유의 개성과 구조도 좋은 화젯거리지만, 그 미술관에서 자신이 가장 인상 깊게 본 작품, 혹은 그 미술관을 대표, 상징한다 할 만한 마스터피스를 주제로 잡아, 자신만의 감회와 평가, 이에서 비롯한 인생에 대한 그의 소회를, 독자로서 이해하고 공감하는 맛이 특별한 책입니다. 아주 범속하게 평가하자면, 간만에 돈 들여 나선 나의 해외 여행, 현지에서 이 미술관은 적어도 들러서 이런 작품 정도는 밀착거리에서 봐 주고 감흥을 느껴야 손해가 아니라는, 어떤 가이드 정도로 활용하기에도 그만이라고나 하겠습니다.
모두 칠십 개가 넘는 꼭지, 화제로 이뤄진 구성이라 아니 그만큼이나 세계에 다녀 볼 만한 갤러리가 많았구나 새삼스런 각성도 듭니다. 전반부는 "미술관에서 꾼 꿈", 후반부는 "만난 사람" 이야기로 가를 수 있는(제목도 그리 붙었듯) 편제고요. 이야기의 배경이 된 갤러리들이 몇 겹치는 게 있긴 해도 워낙 세계 곳곳의 알찬 미술관을 속속 맛보고 오신 기록이라, 독자가 체감하기로는 칠십 군데 이상의 여행기를 한 권에 압축해 접한 것만 같습니다.
이 책을 쓰신 시점에도 여전히 체류하신다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쉬른(Schirn) 미술관에서 그가 만난 작가는 오노 요코입니다. 이 미술관은 다른 기획측에 비해 그녀의 성취를 후히 평가하는 듯, 회고전도 자주 열고 이 책에서 알 수 있듯 작품도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존 레논의 대단히 재치있는 표현처럼 "가장 유명한 무명작가"였던 그녀는, 유명 아티스트의 "안 어울리는" 배필로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을 뿐 예술가로서의 평가는 박하기 짝이 없었고, 그런 까닭에 이 미술관의 태도는 우리 눈에 각별히 두드러질 수밖에 없네요. 불안에 잠식당하고, 정처없이 떠밀려가는 것만 같고, 그러면서도 근거 없는 자기애는 넘쳐나는 듯 여튼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한 그녀에 대해 박준 선생은 오히려 공감을 표합니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요소 중 하나는, 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주친 알바생 미케니아처럼, 작품의 감상과 사람과의(그저 스쳐지나갈 뿐인 제한된) 만남에서 받은 느낌을 묘하게 버무려 서술하는 그의 독특한 태도입니다.
프랑크푸르트에는 미술관 내부 말고 거리에, 조나선 보로프스키의 그 유명한 거대 조각 <해머링 맨>이 있죠. 요즘 같은 제목을 단 어느 소설이 화제인가 본데 소설을 읽고 나서 무식한 소릴 안 하려면 이처럼 현대 미술에도 어느 정도는 소양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박준 선생은 "외로우니까 여행을 하지만, 여행을 함으로써 더 외롭기도 하다"며 묘한 소회를 털어 놓습니다. 근데 우리 모두는 답을 찾으려고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하나 더 추가하려고 답을 찾아 다닙니다. 저 덩치 큰 "해머질하는 남자" 역시 다른 데다 뭘 박아 넣으려고 망치질을 하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의 가슴이 어디쯤 있는지 찾으려 청진기를 들이미는 부질없는 수고를 하는 중이죠. 여기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보로프스키와 "통한" 건데, 현대 미술가들은 이처럼 단순한 데서 대중과 소통 접점을 찾기에 마음만 열려 있고 거짓만 없으면 누구나 뛰어난 청중이 될 수 있죠.
이 책에 실린 상당수 작품과 그에 딸린 감상은 뉴욕의 여러 미술관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에밀리에의 키스>를 보면 확실히, 저자님 말씀대로 "안아서는 안 되는 어떤 여인에 대한 불측한 욕망"이 잘 드러납니다. 자신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잘 표현했기에 당대 평론가나 관람객으로부터 욕도 거하게 먹는 건데, 이런 예술가들이 몇 세대 후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의 대상이 되는 것도 아이러니죠. 더 잘 알려진 예를 이 책에서 하나 더 찾으면, 바로 <풀밭 위의...>를 그린 마네의 일생입니다(요건 파리 오르세 미술관). 여기 실린 많은 예술가들이 지독히 척박한 삶을 산 사실과 대조적으로, 마네는 일생 동안 물질적 풍요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질 나쁜 여성에게 성병이 옮아 어이없이 생을 마감한 그를 두고 저자는 "여자에 관해선 종 어리석을 수 있는 게 남자들"이라 하시지만, 어디 남자가 어리석은 게 그일뿐이겠습니까.
김춘수의 시에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라는 구절이 있죠. 저자께선 런던의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이런 데가 있다는 것도 전 처음 알았습니다)에서 특히 이백 년 전 처음 카이로에 발을 디딘 에드워드 윌리엄 레인의 조상을 소개합니다. 아랍의 문화에 이방인으로서 깊은 이해와 동감을 표시한 이들은 T E 로렌스라든가, 리처드 버튼 경 같은 이들이 유명하죠(물론 현대 진보 담론에선 "오리엔탈리즘"으로 비판받지만요). 여기서 그는 "신부의 면사포를 막 걷어올리려는 동방의 신랑"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터번을 두른 그의 앉은 모습은 신부의 자태를 막 감상하려는 설렘보다, 혹 예상치 못한 충격과 조우하지는 않을까 불안감이 다분히 서린 인상이네요. 이런 분들은, 본향인 서유럽(대체로는 그 중에서도 영국이군요)에 완전히 속하지도 못하고, 자신이 제2의 정체성을 찾은 타향에서도 여전히 겉도는, 정체성의 근원적 미정(未定)에 시달리는 영혼이죠. 저자께서 별달리 긴 소회 없이 이 낯선 남성을 우리에게 소개하는 의도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됩니다.
저자님은 일본의 여러 미술관에 들른 자취도 이 책 곳곳에 진하게 남깁니다. 저는 특히, 한국의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런 일본의 마이너 갤러리의 고유한 매력이 많이 담긴 게 좋았습니다. 나오시마 베네세하우스를 이 범주에 넣으면 실례 혹은 과오일까요? 여기서 저자는 리처드 롱의 <내륙해 유목 서클>이란 작품을 소개합니다. 바로 뒤에 소개되는 뒤샹의 변기가 이미 그 파격의 단초를 마련했었지만, 한참 뒤 "창작"된 이 작품 역시 그저 정체 불명의 나뭇조각을 이리저리 묶어 놓은 거나 외관상 마찬가지죠. 음... 저자께선 이 작품에 특히 "익명의 슬픔"이란 의의를 마련하시는데, 아니 나뭇조각이란 그 존재만으로도 별반의 효용 없음과 시선으로부터의 소외에 슬픔이 느껴지는데, 아예 출처마저 불명확하다면(어디, 어디로부터 건진 잔해입니다요 라든가), 이들의 모임이란 진정 무상성과 미미한 존재감의 극치 아닐까요. R 롱과 직접 대화를 나누신 건지, 아니면 다른 출처에서의 인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하찮아 보이는 나뭇조각조차, 진실은 그 존재의 유일성을 과거에 간직한다는 게 차라리 충격입니다. 샤워 줄을 목에 감고 어느 작품의 컨셉처럼 자살하려다, 모방이 아닌 자기 길의 색다른 모색("줄을 풂")으로 자기 생을 되찾았다는 저자의 고백처럼, 극단에 이르러 비로소 깨닫게 된 소름끼치는 유일성이란, 모든 걸 비운 후에야 진정한 환희로 맞아집니다.
이 책에는 무려 칠십 개가 넘는 꼭지가 실린 만큼, 매우 잘 알려진 거장들의 친근한 작품도 저자님만의 해석을 통해 독자들의 주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술 서적이나 방송 프로그램을 거친 게 아닌, 맨눈과 기타 오감으로 현장에서 본연의 모습으로 만난 작품들은, 대개는 여행자에게 객지에서의 조우와 "소통"을 제공하기에, 벌거벗은, 외로운, 그러면서도 존재의 충만한 날것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여행과 미술의 온전한 감상이란 그래서 불가분의 관계이며, 이 책은 이 두 체험이 어디서 절묘한 교점을 이루는지 가르쳐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