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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평점 :
H G 웰즈의 <타임 머신>을 읽어 보면, 먼 미래에 인간이 엘로이와 몰록 두 가지 종(種)으로 분화하여 대립, 적대하는 쪽으로 진화한다는 설정이 나옵니다. 두 종은 용모, 기질만 다른 게 아니라 서식하는 지역까지 빛과 어둠으로 완전히 나뉩니다(A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타고난 체질과 지능 따위가 신분 요소이며 서식지가 크게 강조되는 차별 요소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건 "진화"라기보다 퇴화에 오히려 가깝죠(엘로이, 몰록 모두에게). 퇴화는 두 종의 대립, 항쟁으로 멸종의 비극이 가까워졌다는 결과론적 의미뿐만 아니라, 과정의 불건전함까지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아울러, 바람직하지 못한 이런 퇴화는 악의 배태이자 종말이라 평가할 만도 하죠.
"다른 지구(地區)의 삶을 한번이라도 들여다 본 적 없이 세계관이 형성된 사람은, 법을 만들 자격도, 판단, 적용할 자격도 없는 겁니다."
레오 마샬은 특권 신분의 자제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이들만이 입학할 수 있는 프라임 스쿨의 수업 시간에서 교수에게 이렇게 일갈합니다. 대개 이런 소설에서 지배층, 특권층은 빼어난 용모, 지능, 품성 등을 타고난 행운아이며, 그런 이들은 엄격한 시험을 거쳐 입학생을 선발하는 학교에 입학하고, 그 학교에서 특별한 사람으로 길러져 체제를 수호, 관리하는 운명이죠. 이런 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란 19세기의 소위 "사회적 진화론" 비슷한 색채를 띠게 마련입니다. 이런 이념은 (이 소설 속의) 상위 지구인 1지구만 (뿌듯한 자부심으로) 누리는 게 아니라, 저 아래 하위 지구 거주자들에까지 대체로 패배주의의 한 형태로 널리 퍼지는 게 보통입니다. "가장 우수한 자, 가장 적합한 자(the fittest)만이 살아남게 마련이다." 적자 생존 기제를 이렇게 표현하는 건 대체로 사회적 진화론의 지지자이며, 반대로 새뮤얼 베케트 같은 이는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며 아주 음울하고 비판적인 어조로 작품 속에 피력한 바 있습니다.
위에 잠시 언급한 레오 마샬은 프라임 스쿨의 재학생이지만, 동료 학생들 주류의 가치관과는 다소, 아니 많이, 동떨어진 상념에 침잠하고, 이를 행동으로까지 옮기는 타입입니다. 이런 성향은 아무래도, 비판적인 성향의 컨텐츠를 많이 제작하는 그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브이 포 벤데타>에도 결국 체제를 전복하는 단초는 미디어 제작자들이 만든다는 식인데, 이 소설 속에도 그런 크리에이터들의 각별한 사명 같은 게 은근 암시됩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 다윈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을 뿐 아니라, 용기 있고 일단 바른 판단이 섰다 하면 누구의 의견도 개의치 않고 직접 위험에 뛰어드는, 모두의 신뢰를 얻을 자격이 있는 품성의 소유자입니다. 다윈은 레오와 그 부친들 대(代)부터 서로 아는 사이이기까지 합니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 부모들도 정통 성골 신분이 아닌데도 사회적으로 꽤 높은 직위까지 올랐으며(물론 한 사람은 정부 섹터, 다른 사람은 미디어 분야의 유력인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 아들들을 프라임 스쿨에 합격시켰다는 사실입니다(전자보다 후자가 더 어렵다고들 합니다).
프라임 스쿨에 다니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위 두 사람, 그리고 다윈 영이 첫눈에 반한 여학생 루미, 얘네들 집안은 세대간에 그리 화목한 분위기가 자리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자신의 출신성분과 지향점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한다는 표면적 상황 설정, 둘째(이게 진짜 중요하지만) 이런 회의로 가득한 성장 배경이, 주인공들(모두 3대째의 어린 학생들)이 이 사회와 세계의 바른 진상, 그리고 과거의 미스테리에 대한 정확한 해결과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성장통 노릇을 하기 때문이죠. "진정 진화된 종(種)은 자신을 포함한 일체의 현상, 존재를 회의할 수 있어야 한다." 원래 확신과 폭주는 그저 백치들의 특권일 뿐입니다.
프라임 스쿨에 다니는 학생들은 태도도 의젓하고 의복에도 위엄이 서려 있어, 누구라도 그 특권적 신분을 알아 볼 정도죠. 엄격한 학풍에서 교육 받고 졸업한 후에는, 설령 그 부모님들이라 해도 "자신보다 더 성숙한 어른 같은 자녀들"에게 함부로 말을 건넬 엄두를 못 내고, 학생들은 어느 새 가족들보다 동료들 사이에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게 보통입니다. 다윈과 루미 역시 이런 그들의 소중한 행운과 의무감을 잊지 않는 명철한 정신의 소유자들이지만, 글쎄 진정 탁월한 영혼이란 모든 것을 한번쯤은 의심해 보는 그 자질에 자리잡고 성장하는 법이죠. 30년도 넘게, 이제는 자신의 아들이 그 나이에 갓 도달할 정도인, 어려서 죽은 자신의 친구 그 추도식에 매번 참석하는 문교부 차관 니스 씨,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진 속 말고는 본 적도 없는 "제이 아저씨"를 거의 인생의 지향으로 삼다시피한 다윈, 속 시원히 미스테리의 진상에 파고들 마음을 못 먹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처음에는) 출신 성분에 대한 경멸로 표현하는 루미, 이런 루미를 사랑하다 못해 존경심까지 품는 다윈... 역시 이런 소설은 일단 주인공들이 매력적이라야 합니다.
이 소설은 이런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괜히 사연을 복잡하게 꼬지 않고(레이 아저씨의 죽음, 그리고 이 체제가 꽁꽁 숨겨 온 비밀을 추적하는 내용인데도) 모험심과 애정으로 추동되는 흥미진진한 사건들을, 뒷장을 더 넘겨보지 않고 못 배길 만큼 재미있게 풀어 들려 줍니다. 과연 그런 끔찍하고도, 동시에 슬퍼지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다가도 의분에 떨며 분연히 일어서게 만드는 "진실"이 숨어 있더군요. 비겁한 어른들이 채 직시 못하고 가려 온 진실을, 나와 연인의 양심 말고는 아무것도 무서울 게 없는 아이들의 손에 의해 밝혀지게 하는 것은 신의 섭리, 혹은 속 깊은 작가의 치밀한 계획이었겠습니다. "The Child is the father of the Man." 다윈 영 네 집안 어르신들이 이 소설 중에서 자주 거론하는 저 명언은 계관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가 그의 대표작 <무지개>의 한 행에 배치한 구절인데, 그 역시 이 소설의 다윈 영처럼 명문학교 출신이었죠. 엄청 두꺼운 분량인데 하도 술술 잘 읽혀서 세 번이나 마치고 난 후 이 서평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