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블 인 헤븐
가와이 간지 지음, 이규원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을 읽을 때 보통 그 붙은 제목에 큰 기대를 걸지는 않습니다. 어떤 주제가 책 한 권으로 낱낱이 해명되기를 바라는 건, 단돈 3만원으로 세상의 지혜를 수 분 안에 패스트푸드처럼 손에 넣기를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무모하고 탐욕스럽습니다. 아니면 동전 몇 푼을 집어넣고 레버 한 번 당긴 후 수백만 달러가 나오길 진지하게 갈망하는 도박꾼만큼 어리석다고나 할까요. 헌데 이 책은 정말, "제목값을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트럼프 카드 한 장 뒤에 그려진 "죽음의 천사"가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닌다고는, 장르물 폭식이란 나쁜 습관을 들인 독자로서 순진하게 믿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모티프로 미스테리를 끌어 나갈 계획일까?(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반 쯤에 크리스채니티 관련 각종 상징과 암유가 등장할 때도 "작가가 연구 많이 했군. 하지만 장식이겠지" 정도로 넘겼는데요. 소설 끝까지 읽고 이 작가님이 "앞에서 벌인 모든 떡밥을 성실히 회수하고, 깐깐하게 해명하며, 심오한 주제까지 장엄히 펼치기까지 하고" 마무리하는 데 감탄했습니다. 결말이 멋지기도 했지만, 이런 묵묵한 작가적 화룡점정에 더 박수를 보내느라 그 멋진 맛을 음미할 차례를 잠시 잊었네요.

일본의 사회파 작가들은 보통 화려한 도시 그 이면의 추악하고 찜찜한 사정을 철저히 연구한 후 작품을 펴냅니다. 너무 준비가 철저해서 업계로부터 항의까지 받는다는 뒷말이 있을 정도죠. 이 작품은 2023년이라는 근미래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습니다만, 마치 현재 진행형의 비위를 고발이라도 하듯 실감이 나며, 그 상상은 바로 지금의 모순과 직접 꼬리를 닿아 있기에 독자로서 경각심까지 생깁니다. 2023년이란 연도는 1) 작가의 창작 시점으로부터 10년 뒤, 2) 두번째로 도쿄에서 열리는 올림픽 그 후의 시점 이란 의미를 가지겠는데, 그나마 저 중요한 건 2)의 뜻입니다. 인구 구조는 점점 노령화하고, 성장의 한계에는 진즉에 부딪혔는데,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노인들을 국가로서 어떻게 대하고 다뤄야 할까. 여기에 대한 답은 여럿이 가능하겠으나, 이 소설에선 가장 무서운 것을 내놓고, 냉혹하게 집행하는 시나리오입니다. 극중 캐릭터인 보험 조사원 하마나의 말을 잠시 빌리죠. "당신은 국가가 정말, 시민의 생명을 중히 여긴다고 믿습니까?"

소설은 불법 영업 카지노에서 바카라 게임에 몰두하는 어느 조폭 두목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일진이 좋지 않았던 그는, 불가능한 확률 상황에서 계속 따기만 하는 푸른 눈의 젊은이에게 대신 화풀이를 하려 드는군요. 이 장면에서 젊은이의 용모에 대한 묘사가 자세하지 않았는데, 결국 이게 일종의 복선이더군요. 젊은이는 무슨 비결이 있는지 결국 "밑장빼기"까지 시도한 딜러와 웨이터, 조폭 두목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더 쎈 수"로 승부를 걸어 완승을 거둡니다. 하지만 이런 재주로 판을 쓸어 담는 돌출분자에게 세상이 공평할 리 없고 하물며 거기가 도박판이라면 말할 것도 없죠. 독자들의 안타까움을 뒤로 한 채, 이 젊은이 - 마슈라는 이름 -은 생사의 기로에 놓입니다.

저런 마슈와는 처지가 사뭇 다를 법한, 어느 축복받은 인생이 따로 있습니다. 유복한 부모님 슬하에서 나고 자라 미국에 머무는 이 젊은이는, 느닷 양친의 사망이란 비보를 접하고 귀국을 서두릅니다. 프롤로그는 여기서 호흡을 끊는데, 이 인물은 2부부터 다시 같은 신원이라며 등장해서, 세월이 십여 년 지난 현재 사법시험 합격, 변호사 개업, 중의원 당선 이란 출세 코스를 다 밟아 촉망받는 정치인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습니다. 프롤로그에서 살짝 서술 트릭이 개입했는데, 하우스의 직원이 "원체 총명한 두뇌를 타고 나셨으니,..." 운운하는 대목이 그것이죠. 이게 false compliment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전부터, 왜 일본에서는 소비자 금융(좋게 말해서)이 저렇게나 발달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일본은 1980년대 중반만 해도 전세계로부터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도 같았죠. 이러던 게 성장 동력을 잃고는 만만한 자국의 서민들한테 체계적으로 푼돈을 모아들이는 쪽으로 영 건전성이 떨어지고 만 게 그들의 거시 경제입니다. 이 소설은 이런 일본의 시스템적 문제에 대해, "국가가 아예 야쿠자로 변했다."며 지독한 비판을 날립니다. 이런 착취와 경제 질서 왜곡은 누구의 음모로 벌어지는 걸까요? 답은 소설 중반쯤에 이미 나옵니다. "부도덕한 체계 속에서는 집합자아(group ego)라는 게 절로 형성되어, 악마 같은 개인이 배후조종하지 않아도 특정 목적을 향해 일사불란 작동되게 마련이다." 이 결론은 물론 작품의 대단원에도 한 번 더 강조되며, 작가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곱씹게 합니다. 과연 범인은 OOO이었을까요? 물론 소설은 명시적으로 그를 지목하며 심판까지 받게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 모든 게 거대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OOO는 특히 후반부에서 내내 강조되듯,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그 많은 희생자를 낳은 건 사악한 체제 자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거죠.

소설은 이런 담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세상 곤란을 모두 잊고 라스베거스의 VIP 숙소에서 호사를 누리던 귀공자의 부모를 죽인 자는 누구였을까요? 누구도 못 말릴 정의감과 한 여인을 지키려는 의무감에 불타던 진자이 형사는 그 사건 이후 어떻게 된 걸까요?(약간 이 대목에서 납득이 안 되던 게, 무장한 폭력배들을 단신으로 모두 살해한 "cop hero"에게 책임을 오히려 물을 공권력이나 여론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작가께서 설정상 좀 오버하신 듯) 참으로 고지식하게 형사로서 본분을 지키려는 스와 형사는, 이 불리한 형세를 어떻게 헤치고 거대한 악과 맞설까요? 플롯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성실히 답하며 짜릿한 반전까지 예비합니다. 만약 결말이 내내 마음에 안 차는 독자가 있다면, 이 글 바로 위 문단 마지막 문장처럼, 범인을 그저 "체제"라고 새기면 됩니다. 하마나, 기자키 계장이 갑자기 미스테리 해결 과정을 확 진척시키는 약간의 구성 불균형만 빼고는, 저 개인적으론 간만에 최고의 스릴러를 읽었다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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