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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몽전 1 - 난세의 한가운데 떨어지다
청빙 지음, 권미선 그림 / 폭스코너 / 2016년 8월
평점 :
초등생, 중학생 때는 별의별 망상에 다 빠지기 마련입니다. 야릇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성적(性的)인 판타지도 만족시켜 주면서, 동시에 여전히 의지도 유약하고 지식도 부족한 자아에게 일일이 멘토링해 줄 누군가가, 그것도 여럿이, 곁에서 자신을 지켜 줬으면 좋겠다는 헛된 생각이 떠날 때가 없죠. 그런가 하면 친구들이 즐겨하는 온라임 게임에도 빠져, 가상의 세계에서만큼은 최강의 능력치를 가지고 싶은 욕구도 자아 깊숙한 곳에 심어 놓습니다. 지루한 등굣길이나 자율학습 시간도 이런 유쾌한 상념과 함께라면 언제 지나가는 줄 모르는데, 성인이 되고 하나 뿌듯한 게 있다면 현실의 문제를 마주하며 그 해결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지 어떤 망상으로 좌절감을 몰아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이버에 장기간 연재된 웹소설이 종이책으로 정리, 출간된 이 작품은, 어렸을 때 빠져 들기 쉬운 <삼국연의>(게임이든 책이든)의 여러 모티브와, 어렸을 때만 빠져 들 수 있는 갖가지 환상과 페티시(..)를 잘 버무려 놓은 깔끔한 판타지입니다. 장르의 전통을 충실히, 군더더기 없이 잘 따르는 데다, 이지적이고 날카로운 발상이 군데군데 돋보이기까지 해서, 킬링 타임용으로 읽어내기 안성맞춤인 오락물입니다. 장르물이라고 마냥 폄하할 게 아니라 동심으로 잠시 돌아가고 싶을 때 이런 동반자도 곁에 두기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더군요. 그렇다고 성인이 너무 이런 장르에 빠져드는 건 곤란한 게, 솔직히 낯간지러운 서술과 묘사가 너무 자주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게 이 작품의 단점이라는 게 아니라 본디 장르 자체의 문제입니다.
주인공은 과다기억증후군(병)과 순간기억능력(재능)을 보유한, 미소년 고등학생인 진용운입니다(하필 성씨가 陳인게 벌써 무협지 냄새를 풍기는). 아버지는 특별한 능력을 보유한 분인데 중국에서 갑자기 실종되었고, 무슨 까닭인지 국정원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주변을 감시하기까지 하는 그의 현재입니다. 혼자 사는 데다(재산은 넉넉해서 별 문제가 안 생기는 건 쿠도 신이치, 기타 많은 망가나 라이트노벨에 나온 이들과 상황이 같네요. 내 수중에 돈은 많고 간섭하는 어른은 없었으면 하는 것도 많은 틴에이저들의 공감을 얻는 환상) 성격도 안 좋으니 친구가 있을 리 없고, 다만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였던 여자애 민주가 속으로 좋아하는 정도입니다. 저렇게 기억력만 좋은 건 성적 향상으로 잘 연결이 안 되기에, 학교에서 아주 석차가 높지는 않네요.
소설은 우리 현대의 미소년 진용운이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삼국 시대 유비의 군사(軍師)가 되어 있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이렇게 개요 설명 없이 이야기의 중간부터 서술이 시작되는 형식을 문예비평용어로 In medias res라고 하죠. 많은 웹소설들이 시간순 구성을 따르지 않지만, 여튼 독자가 그것때문에 곤란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이 작품 역시 성공한 웹소설이 보통 그렇듯, 오히려 사연의 중심부로 더 자연스럽게 독자를 끌고 들어갑니다. 라이트 노벨이나 망가가 채용하는 많은 설정 중의 하나가, 현대에서 아주 평범한, 그것도 나이까지 어린 주인공(꼭 주인공일 필요는 없지만)이,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면 일종의 초인이 되어 상황을 지배한다는 발상입니다. 진용운뿐 아니라 많은 캐릭터들의 경우 현실(과거건 현재건)의 다른 제약을 받기 때문에 이런 기대는 곧 깨지기 일쑤지만, 진용운은 대단히 현실적인 성격이므로(망상에 젖고 싶은 어린 독자들을 매혹하려면 적어도 주인공만큼은 정반대로 현실주의자라야 하죠) 주위 세계와 자신의 포텐을 신중히 잘 저울질하며 조심스런 행보를 잇습니다.
일단 애가 예쁘게 생겼기 때문에, 유비, 조운 등 주요 인물(이 소설은 주무대가 중국의 후한 시대이며, 우리가 아는 <삼국연의>와 설정이 대부분 같습니다)들의 호감을 얻는 데에는 실패하지 않는군요. 물론 이 시대 인물들이 그에 대해 어떤 페도필리아나 동성애 같은 심리를 갖는다기보다, 그 시절에 보기 힘든 인물상이나 피처에 대한 호기심이랄지, 혹은 그런 용모로부터 짐작되는 고귀한 출신, 비범한 자질에 대한 동경 같은 게 더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일종의 OOPARTS라고도 여길 수 있겠네요. 진용운은 영리한 편이기 때문에,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이용할 줄 압니다. 제가 재미있게 본 건, 누구나 호감을 가질 만한 외모인 진용운을 두고, 유비가 내심으로는 100만점에 50 정도의 신뢰밖에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진용운의 말을 빌리면 "과연 일세의 효웅이라서 남을 전적으로 믿는 법이 없는" 그만의 자질이라는 건데요. 이뿐 아니라 다른 이가 보이면 위선의 제스처라는 게 빤히 드러나는데도, 유독 유비의 언행은 지극히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상대에게 남다른 신뢰와 공감까지 유발한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삼국연의 분석서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진단이지만, 여튼 장르물에서치고 흔히 접하긴 어려운, 깊이 있는 문장이죠.
고속주행을 하는 인체에서 손이 잘리자 더 맹렬한 속도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든가, (진용운 지가 키운 아이템이니) 분명 익숙은 한데 기대했던 바와 좀 달라서(왤까요?), 게다가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존재겠거니 여긴 탓에 더 늦게 알아봤다든가 하는 설명은, 장르물의 전통에 그리 익숙지 않은 독자들에겐 와 그럴 수도 같은 놀라움을 줄 수도 있겠습니다. 여튼 서로 닮아가며 크는 웹소설들의 개성과 특징을 고려하면서도, 그 좋은 점만 잘 추려 장착한 이 작품의 장점에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네요. 유머 감각도 장르가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인데, 의형제를 맺은 조운에게 뭔가 고마움의 표시로 주고 싶었지만 주머니에 진통제 한 알과 500원짜리 동전밖에 없어서 그걸 그냥 건넵니다. 이런 진용운에게 조운이 극구 사영하며 하는 말,
"이 형태나 질감은 보기 드문 귀한 금속이다. 게다가 금방이라도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학의 움직임과 깃털 하나하나의 묘사까지. 그걸 조각한 자는 천하 제일의 장인임에 틀림 없다. 내 이 귀한 보물을 어찌 감히 받을 수 있단 말이냐."
인격자인데다 딴 맘 품지 않고 수련만 해 온 자룡에게 익히 나올 법한 진정어린 대사지만, 보는 우리는 너무나 웃겨서 말이 안 나올 정도죠(자룡의 개성을 이해하는 만큼 더 우습기도 합니다). 천하의 조운을 고작 500원짜리 동전으로 저렇게 감격시킬 수 있다니. 이런 게 다 작가의 재능이고, 다만 다 좋은데 나중에 그 전개는(스포일러) 식상할 뿐 아니라 개연성(뭐?)에도 의문이 생깁니다. 이렇게 자룡 같은 인물의, 본디부터 평면적인 경우에 대고는 우리 현대인(현대 독자)의 합의나 기대에 충실하면서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 주는 상상력이지만, 앞에 말했듯 유비 같은 보다 입체적 성격을 두고서는 제법 깊이 있는 통찰이 보이는 것도 소설의 재미와 완성도를 높이는 것 같아요. 2권까지 계속 읽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