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신동준 선생님의 평에 의하면, 분량 면에서 이 사마천 史記 <세가>는 <본기>의 두 배이고
<열전>의 절반입니다. 중요성 면에서도 그럴까요? 제 생각에는 이미 대중화한 <열전>이나, 아무래도 미화,
가공, 예찬의 성격이 강한 <본기>보다도, 오히려 이 <세가>에서 우리 일반 독자들이 취할 만한 교훈이 많을 것 같습니다. <본기>는 특히 漢 고제를 다룬 서술의 경우, 승자의 역사로서 마냥 곧이곧대로 수용하기에는 꺼려지는 대목이 없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물론 그는 최후의 승자였던만치, 그 놀랄 만한 처세와 용인의 기술은 현대인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바가 적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史記> 전체를 통틀어, 만약 조직(회사) 내 정치 다툼에서 마지막의 승리를 쟁취하고 싶은 독자가, 주의 깊게 읽어야 할
행적의 위인을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단연 이 고제 유방을 들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의 경우, 어떤 회사건 오너,
오너의 후계자 등이 누리는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지는 못 합니다(비슷한 예가 최근 한 분이 있긴 했는데 결국 잘 안 풀렸죠). 이
때문에, 조직 내에서 2인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상을 점한 여러 "次上"의 성공자들이 남긴 행적에 대해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역자 신동준 선생님이 "2인자들의 성공학"이라며 이 책에 대해 총평한 것은 그런 취지에서 비롯했다고 생각되네요.
<세가>는 제후의 지위에 오른 이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의 사적을 담은 기록입니다. 제후라 함은 중원의 최고 통치자에 의해
분봉되어 지방 각지에서 군주로 군림한 이를 대체로 가리킵니다. 초기에는 왕(주나라 왕은 帝로 불리지 않았다고 <사기
본기>에 언급되었고, 제가 쓴 리뷰에서도 이를 밝힌 바 있습니다)의 同姓 실력자(형이나 동생, 가까운 친척)들이 이 자리에
올랐지만, 이후에는 그런 원칙이 꼭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해당 지역에서 권력을 잡으면, 여러 명분을 만들어 주 왕실에 사후
승인을 받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죠. 춘추 전국 시대의 사정은 이러했으며, 漢 고제 유방에 의해 천하가 통일된 후에는 개국 공신,
그리고 일가 친척들이 제후에 임명되었습니다.
제후는 자신의 자리를 자손에게 세습시킬 수 있었으나, 그 자손들은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거나 모반의 혐의를 쓰고 봉지를 빼앗기기
일쑤였습니다. 이로부터 한참 후, 중화 제국의 통치 시스템이 성숙기에 이르면 황제가 임명한 관료가 지방을 다스리는 게
보편화되고, "제후국"이라면 사실상 중원의 통치권이 미칠 수 없었던 우리 고려, 조선 등에서나 볼 수 있게 되었죠. <사기
세가>에서 다루는 제후는 이처럼 고전적인 의미의, 대륙 내 존재했던 지방 실력자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책의 맨처음에 <오태백 세가>가
등장합니다. 역자 신동준 선생님의 표현에 의하면 "제후의 전범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기에, 이런 편집상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는
취지입니다. 적장자(맏아들)가 있는데도 더 영특한 동생에게 보위를 양보하고 자신은 먼 험지로 나아가 왕화(중화 문명의 혜택)를
널리 입게 함은 확실히 귀한 신분으로서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림이겠는데요. 우리 역사로 눈을 돌리면 태종의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왕위를 이은 고사가 언뜻 연상되기도 합니다(만 배경상 차이가 크겠죠?).
역자 신동준 선생님은, 태백은 이름이 아니라 항렬의 표시일 뿐이라고 하십니다. 각주에서 <사기색은>을 인용하여, 태(太)가 항렬이고, 백(伯)이 이름이라는 취지이신 것 같은데요. 이는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백중숙계"의 기호에 다소 어긋나기도 해서 흥미롭습니다.
오태백의 후손 중 지혜롭고 겸허한 처신으로 이름 높은 계찰이, 오나라 왕의 분부를 받잡고 천하를 순회하며 사자 노릇을 한 기록이
이어집니다. 노나라에 머물며 음악을 감상하는데, 이때 거론되는 곡명은 모두 그 유명한 사서삼경 중 하나인 <시경>에 실린 시가들입니다. 중국 고전 애호가들은 이 대목을 읽으면서 결코 놓칠 수 없는 게, 같은 신동준 선생님이 번역하신 <완역 시경>이 올해 2016년에 출판되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 책을 소장하고 있기에 비교해 가면서 읽었습니다.
계찰이 노나라에 머물며 음악 총평을 한 기사는, 이게 노나라에서 이뤄졌기에 노나라의 역사를 다룬 <춘추>에 나오지 않을
수가 없죠. 실제로 사마천 역시, 수백 년 전의 <춘추>를 원전으로 해서 이 부분을 저술하기도 했고요. 저본으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문장 표현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다른 리뷰에서 언급한 "교언영색"과 "교언선색"의 차이처럼,
사마천의 당대인 감각으로 자신의 시대에 잘 통하지 않는 용례다 싶으면 과감히 풀어 쓴 까닭입니다. 언어는 역사성(시대에 따라 뜻이
변천함)을 속성으로 가진 실체이니 말입니다.
마침 신동준 선생님이 완역한 <춘추좌전>도
있어서, 이 <오태백세가>를 읽을 때는 세 권을 함께 펼쳐 놓고 읽었습니다(김원중 역 <세가>와 정범진
판까지 합하면 다섯 권). 신동준 역은 언제나 한문 원문이 함께 실려 있기에, 춘추의 원문과 사시 세가의 원문이 어떻게 서로 같고
다른지를 대조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이
책 p20 이하에 나오는 곡명들은 <시경>의 순서와 같습니다. 다만 <위풍>은 그나마 이름이라도 거론하나,
<조풍>은 본문에서 계찰이 듣지도 않았다고 하며 아예 이름 언급이 없습니다. "상소"와 "남약"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이 전혀 없는데(김원중 교수님 판에도 없습니다), <춘추 좌전>에는 본문 중 괄호 안에 해설이 실렸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조하십시오(한길그레이트북스 제75권, p395 중간쯤). 이들은 악곡의 종류이며(서양 고전 음악에 비기면 교향악,
소나타, 환상곡 하듯이), 대무(주 무왕), 소호(은), 대하(하), 소소(순 임금) 등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나눈 분류입니다.
다만 어떤 대목은 김원중 판이 더 친절한 부분도 없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 "팔악"이 무엇인지에 대해 후주에서
"금석사죽포토혁목"라고 밝히고 있습니다(김, p63 후주 20번). 오음(=궁상각치우), 팔악 같은 건 그냥 상식으로 간주해서 신
선생님께서 생략하셨는지에 대해선 저로선 알 수 없습니다.
같은 구절인데도 같은 역자께서 아주 미세하게 다른 느낌으로 번역한 대목도 있습니다.
사심재, 도당씨지유民 근심이 깊다 <사기 오태백세가 계찰> - 반말
사심재, 도당씨지유風 생각이 깊습니다 <춘추> - 높임말
근심, 생각으로 각각 번역어가 다른데, 원문에는 "생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역시 신동준 선생님 책은 한자 원문을 그대로 싣고 있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 누릴 수 있는 편의지요. 이는 뒤의 구절 何憂之遠也을 참조하면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은 여기서 근심이란 뜻입니다.
이 책 p22에는 "燕之巢于幕"이란 사마천의 원문이 나오는데, 그가 참조한 <춘추(좌전)>에는 燕之巢於幕上이라고 되어 있습니다(한길그레이트북스 제75권 p398:7). 于와 於는 그저 같은 말이지만, 아무튼 이렇게 서로 작은 차이를 보이네요. 신동준 선생님도 <춘추>에 上자가 더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어서 그 유명한, 돌아오는 길에 서나라 군주의 묘 근처 나무에 기어이 보검을 걸어 주고 떠났다는 계찰괘검(季札掛劍)의 고사가 나옵니다. 이 고사의 주인공이 바로 계찰이죠.
<제태공 세가>
p43
에 보면 제 태공이 사악의 후손으로 나오는데, 四嶽에 대해서는 <오제 본기>를 참조해서 읽어야겠습니다. 참고로, 이 책
<陳杞世家> p175에 보면 "泰嶽(태악)"의 후손이란 대목이 한참 뒤에 또 나옵니다.
p67 중간쯤에 보면 제 여공의 이름이 無忌라고 나오는데, 후대의 인물인 위공자 신릉군도 같은 이름이죠. 사기 마니아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며,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고 배무기 교수님의 선친께서도 특히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아드님의 이름을 지었다고 전합니다.
강태공을 태공망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때 "태공"은 누굴 가리키는 걸까요? 김원중 교수님은 아마도 "태공"이 보통은 아버지를
가리킨다는 근거에서, 본문 중 설명 형식으로 "문왕의 아버지인 계력"이라고 하십니다. 신동준 선생님은 다소 모호하게 "선대의
왕"이라고 새깁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작년 이맘때쯤 쓴 이 서평을 참조해 주십시오.
제 태공은 물론 우리가 아는 강태공 그 사람입니다. 이 신동준 선생님의 책을 보면 "태공이 대략 100세에 죽자, 아들 정공 급이 즉위했다."(p47:3)라고 되어 있는데, 한자 蓋 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
본기>에 보면 주 문왕이 유리에 갇혀 있으면서 "아마도 육십사괘를 만들었을 것이다"라며, <사기> 전체를 통틀어
흔치 않은 추측성 문장이 있습니다. 사마천이, 신뢰할 만한 기록에 근거하지 않고 세간에 전하는 바에 따라 기록할 때 보이는
태도지요. 이 때 "蓋 = 대개(大槪)'이겠습니다.
김원중 교수님은 이 蓋를
문장 전체에 걸치는 걸로 해석합니다. "아마 태공이 죽은 지 백여 년이 되었을 때 아들 정공이 즉위했을 것이다."(김원중 판
<사기 세가>p74 중간쯤) 다만 당사자가 죽은 지 백 년이 지났는데 그 아들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으므로, 이는
신동준 선생님의 해석을 좇아야 할 것 같네요.
<연소공 세가>
p141
중간쯤에 보면 유세가인 녹모수의 말 중에 "나라를 재상 子之에게 양위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이
김원중 판에는 정반대로, "옳다"고 되어 있어 흥미롭습니다. 어느 분 주장이 옳을지는 독자들이 직접 읽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p209 중간쯤에 나오는 삼진은 三晉입니다. 이때부터 전국 시대의 서막이 열리는 거겠죠.
<월왕구천세가>
신동준 선생님은 이 파트를 일러 사실상 "범리열전"이나 마찬가지라고 평합니다. 거의 망국 군주가 될 뻔한 구천을 도와 천하의 패자로
군림시켜 놓고도, "구천은 어려울 때는 몰라도 평안할 때 같이 영화를 누릴 위인이 못 된다"며, 나라의 반을 갈라 주겠다는
구천의 제의를 뿌리치고 제나라 등 타국으로 망명합니다. 빈손으로 시작해도 워낙 수완이 좋았기에, 가는 곳에서마다 사람을 모으고 큰
사업을 일으켜 억만장자로 부러울 것 없는 신분이 됩니다. 마치 셈 족의 시조 아브라함을 보는 듯합니다.
이 범리의 말년 일화 중 재미있는 게 있어 요점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 범리의 둘째 아들이 초나라에서 사람을 죽이고 옥에 갇혀 사형 집행만 기다리게 됩니다.
- 범리는 막내 아들더러 "초나라의 장선생"을 찾아 그에게 황금을 주고 형을 구해 오라고 명합니다.
- 이 소식을 들은 첫째 아들이 "아버지께서 장자로서 나를 믿지 않으시니 분하다"며 자결 소동까지 벌이자, 할 수 없이 범리는 이 맏아들을 초나라로 보냅니다.
-
맏아들은 장선생을 찾아 부탁하고, 황금을 받은 장선생은 범리의 명성을 익히 알았기에 반드시 청탁 내용을 이루겠다고 다짐합니다.
장선생은 맏아들에게 "즉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지만, 왠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맏아들은 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 맏아들은 초나라에 머물며 별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자, 자신이 따로 챙겨 온 뇌물을 초나라의 다른 실력자에게 별개로 전달하여 일을 처리하려 듭니다.
-
한편 천문을 관찰하던 장선생은 몇 달 후 별자리가 적당하게 배치되자, 이를 핑계로 초나라 왕을 알현합니다. "징후가 심상치
않으니 큰 덕을 베푸셔야 하겠습니다." 장선생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임하던 왕은 곧 대사면을 베풀 것을 지시합니다.
-
맏아들이 뇌물을 준 다른 실력자는 이 사정을 전혀 모른 채, 맏아들에게 가서 "곧 대사면이 단행될 것 같다"며 귀띔해 줍니다.
맏아들은 괜히 장선생에게 거금을 썼다는 판단에, 장선생을 찾아가 "선생이 애 쓰시지 않아도 동생이 풀려날 것 같다"며 황금을 돌려
달라는 눈치를 보입니다.
- 장선생은 처음부터 돈 욕심이 없었으며, 다만 이번 일을 계기로 삼아, 재산가로
이름 높은 범리에게 평판을 얻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일이 잘 처리되면 그러지 않아도 돌려줄 생각이었던 청렴한 장선생은, 이런
맏아들의 태도에 모욕감을 느낍니다.
- 장선생은 다시 초나라 임금을 찾아갑니다.
"왕께서 대사면을 베푸시는 데 대해, 항간에선 범리에게 뇌물을 받은 소치라고 여깁니다. "
왕은 진노합니다. "내 어찌 범리 좋은 일을 시키겠소!"
- 범리의 맏아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형이 집행된 동생의 시신만 수습하여 귀향하게 됩니다.
-
모두가 애통해하는 가운데, 아버지인 범리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조용히 웃습니다. "맏아들은 나와 고생하며 함께
재산을 모은 애라 돈을 아끼는 성격이오. 하나 막내는 고생을 모르고 자란 터라 내가 시킨 대로 돈을 쓰면 그만이었겠지. 모든 걸
염두에 두고 막내를 보내려 한 것인데..."
<鄭 세가>
서문에서 신동준 선생님은 이 정나라에 대해 복잡미묘한 느낌을 서술합니다. 朝晉暮楚처럼 시세에 따라 강대국에 영합해야 하는 한심한 처지를 겪기도 하나, 정자산이란 명재상의 대에 이르면 대륙의 허브 국가로서 그 지정학적 위치를 최대한 잘 살리는 능란한 수완을 발휘하기도 한다고 평하십니다.
공자와 달리 사마천은 안영을 좋아하고 정자산을 소홀히 기술했다는 게 신 선생님의 견해인데요. 과연 그런지 다시 이 책의 앞으로
돌아가 숙독해 봤습니다. pp.71~81(제태공세가)를 보면, 제 영공에서 제 경공에 이르는 시기까지 안영의 행적이 자세히
다뤄집니다.
p430에 보면 정 환공의 질문에 태사 백의 대답이 "제는 백이의 후손이다."이지만, 정작 <제태공세가>에는 그런 언급이 전혀 없어서 흥미로웠습니다.
鄭君 乙이 보위에 오르고 한 애공이 나라를 멸망시키는 대목에서 이 파트가 끝납니다. 공교롭게도 전국시대의 출범과 맞물려 나라가
망하고, 이 다음부터 <조세가>가 시작되며,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간다는 의미에서 책의 정확한 정중앙을 이룹니다.
<趙세가>
시작 부분에 서왕모, 그리고 녹이 등 준마의 설화가 또 반복됩니다. 우리 나라 시조 중에도 "녹이 상제 살지게 먹여~" 운운하는 구절이 있죠.
참고로 정범진 총장님 책(까치판)에는, 비록 앞에서 몇 번 나온 개념이라 해도(서왕모라면 얼마나 자주 나왔겠습니까) 혹시 잊었을 독자들을 위해 처음 보는 이름처럼 몇 번이고 각주를 통해 설명해 주는 친절함을 보입니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 趙盾이
언급되는데, <진 세가>에 자세히 나온 것처럼 진양공을 잘 모신 명신입니다. 이름의 저 글자는 "모순",
"순상지"에서처럼 "방패 순"이란 글자이지만, 자전을 찾아 보니 이름자로 쓸 때에는 "돈"으로 읽는다는군요. 김원중 교수님,
그리고 정범진 교수님 책에서는 "조순"이라고, 신동준 저자께서는 "조돈"으로 표기합니다. 그렇다면 앞의 두 책들보다는 이 책의
태도가 옳을 것 같습니다.
여기 보면
조돈은 나라가 어지러워질 걸 걱정하여 선군의 친동생을 즉위시킬 준비를 하는데, 후계자의 적모가 나타나 "적자가 살아있는데
선군(진양공이죠)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다른 이를 옹립하려 하십니까?"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대사가 신동준 선생님 책, 그리고
정범진 교수님 책에선 존대말로, 김 교수님 책에서는 반말로 나옵니다. 이 여성의 이름에 대해 다른 책에선 설명이 없는데, 유독
정범진 교수님 책에선 "穆嬴"이라고 각주를 통해 밝힙니다.
그런데 이 사항에 대해서는, 앞 <晉세가>로 다시 돌아가면, p300이하 본문에 태자의 모친 이름까지 "목영'이라고
나옵니다. 또 여기서는 목영의 대사가 반말 비슷하게 처리됩니다. 분위기를 보면 반말이 더 적합하게 느껴지네요. 조돈은 질책(김원중
교수님은 "견책'이라고 옮깁니다)을 받을까 두려워했다고 적혔는데, <晉세가>에서는 아무 설명이 없고 이곳
<조세가>에서만 그 주체가 "외척"이라고 밝힙니다. 이 역시 다른 책에선 설명이 없는데, 정범진 총장님 책에선 그
외척의 실체를 秦 왕실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설득력 있죠.
다만, 趙穿이라는 인물이 갑자기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 신동준 선생님은 아무 부대 설명이 없습니다. 김 교수님은 본문 중에서 "조순의 사촌"이라고 작은 포인트 활자로 덧붙입니다. 이런 건 김 교수님 책이 편했습니다.
<공자세가>
p645:8에 보면, "공자가 노나라 재상의 직무를 대행했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게 좀 재미있습니다. 학자마다 입장이 다를 뿐더러, 같은 신동준 선생님이 옮긴 다른 책에도 해석이 조금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공구가 노정공을 相禮했다."(<춘추좌전>3 - 한길그레이트북스 제76권 p406 중간)
여기서 공구는 물론 공자의 본명입니다. 춘추 좌전 원문에도 禮는 없는데, 역자께서 과감히 번역문에만 삽입하는 태도입니다.
김원중 교수님 책의 해당 부분에는 "공자가 노나라의 儐相이
되었다."라고 옮기는데, 설명에서 "빈상이란 재상이 아니라, 의례적 상국 자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김 교수님의 같은 책
p661, <공자세가> 중에서 "재상의 일을 임시로 보고 있었는데.."라고 번역하신 부분과 다소 모순됩니다.
"의례적"이라면 이름뿐이고 실무가 없는 자리라는 뜻이기 때문이죠. 영어로 sinecure에 해당하는데, 당시 공자의 위상이
모국에서 그런 대접을 받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儐을 賓(손님 빈)으로 잘못 보시고, 客卿과 같은 의미로 착각하신
건 아닐까요?(이건 그냥 제 생각입니다만)
儐相이란, 고려나 조선사에 보면 "재상이 아닌데도 나라를 대신하여 대국과의 외교 현안을 맡아 처리하는 중직"을 가리킬 때가 많습니다. "의례적"이기보다 오히려 정반대의 의미입니다(이름은 높지 않으나 맡은 일이 중대함). 공자 역시 임금을 수행하여 대국에 가 업무를 잘 처리했다는 기술이 이어지는 걸로 보아, 신동준 선생님의 이 책 중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고 여겨집니다.
喪家之狗라
는 말이 있죠. 이걸 1) "초상집의 개(상갓집 개)"로 옮길 것인지, 아니면 2) "떠돌이 개(집을 잃은 개)"로 옮길 것인지는
예전부터 논쟁거리였습니다. 더군다나 이게 대성현인 공자를 가리키는 표현이니 말입니다. 이 신동준 선생님 책, 김원중 교수님
번역, 정범진 총장님 책 등 세 권 모두, 1)의 뜻으로 새기고 다른 부가 설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기> 전문가로
이름 높은 김영수 선생님(도서출판 알마에서 이분 번역이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이나, 한학자는 아니지만 박경귀 교수님 같은 분은
2)가 옳다는 입장에 가깝습니다. 조국인 노나라를 떠나 전국을 유세했지만 정착하지 못했던 당시 공자의 처지를 볼 때 저는 2)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1)은 아마 조선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실제로 초상집만 돌아다니며 걸식하던 에피소드가 낳은 오해가 아닐까요.
<전경중완세가>
제
나라는 본디 강태공의 봉지여서 姜姓 呂氏의 땅이었지만 대략 전국 시대 초기에 이 전씨가 사실상의 왕위 찬탈을 행합니다. 따라서 이
파트는 <晉세가>의 후편입니다. 원래 田씨는 陳나라의 陳씨였는데, 이 제나라에 망명한 후 성이 바뀐 경위가 나와
있습니다. 앞부분 <陳杞世家>와 유기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p595 각주에 보면 陳 여공의 이름은 "他"가 아니라 "약"임을 앞에서 언급했다고 하시는데, 그 앞이 구체적으로 어디냐면 p174의 각주입니다.
개인적으로 세가에서 가장 관심 깊게 본 파트가 <유후세가>였
습니다. 장량은 반 신화적인 인물로 후대인의 뇌리에 남아서이기도 한데요. 이 책을 보면 신선이 아닌, 피와 살을 가진 현실적
관료, 책략가로서의 면모가 잘 나와 있습니다. 그는 알고 보면 초한 전쟁기에 활약한 누구 못지 않은 명문 거족의 후손이며, 용모
또한 빼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그가 흔쾌히 유방 같은 근본 없는 건달의 막하로 들어간 건 역시 장량 자신이 사람 보는 안목이
빼어났음을 말합니다. 그의 신출귀몰한 행적은 제갈량을 방불케 하는데요, 마지막 후계자 책봉 문제로 고제가 고민할 때, 장량이 선뜻
나서서 四皓(네 명의 은자)를 불러들여 대세를 굳힌 대목이 볼만합니다. <열전>의 관련 대목과 함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 고제 유방이 천하통일을 이룸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이로 소하를
꼽았고, "사냥개가 공이 큰 게 아니라 그 개를 묶은 줄을 올바른 방향으로 던질 줄 아는 자가 공이 크다"며, 논공행상을 두고
의론이 분분할 때 단호하게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의 전략적 비전을 엿볼 수 있는 발언이기도 한데요. 다만 저는 소하가 동향인 패현
출신으로서 그의 먼 일가 친척이나 진배없었던, 핏줄만큼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던 이유가 컸다고 생각합니다.
소하는 오늘날로 치면 "보급의 달인"이
었습니다. 전쟁에서 병사들에게 군량과 무기를 대는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루말할 수 없죠. 소하는 특히 병력이 전멸해도 끊임
없이 보충병을 모집하여 전선으로 보냈는데, 행정 수완이나 임기 응변이 탁월해야 가능한 업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는 제국의 승상
자리에 올라서도 행정의 기준과 만능의 매뉴얼이라 부를 만한 것을 확립했죠. 이후의 조참이 "나는 소하가 닦아 놓은 길만 조심히
걸으면 된다"고 했을 만큼입니다.
이런 소하도, 한 고제가 지방 반란을 평정하러 서울을 비웠을 때 의심을 샀는데, 일부러 폭정을 펼쳐 "저자가 눈앞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을 뿐 나라를 가로챌 야망은 없나 보다."하고 유방이 안심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꼭 그렇게 속였다기보다, 정치 고수들끼리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제스처라고 보면 되겠죠.
조참
파트를 보면, 고제에 의해 마차 밖으로 내던져져 어린 나이에 죽을 뻔한 그 혜제가 승상 조참의 아들에게 "내가 물었다고 하지
말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정사를 돌보지 않으며 저러는지 그 속을 좀 알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조참은 나중에야 황제의 근심을
알고 "폐하께서도 고제만 못하시며, 저 역시 소하만 못합니다. 괜히 일을 벌이는 것보다 그저 전철만 밟는 게 오히려 현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이걸 보면 혜제 역시 현명한 군주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때문에 일찍
죽었다는 게 안타깝죠.
<진승상세가>
p847
에서 "용모만 관옥과 같을 뿐 속은 텅 빈 자입니다."라고 해석합니다. 이에 대해 정범진 선생의 책은, 각주를 통해 "관옥"의
뜻이 뭔지 설명합니다. 한편 김원중 교수님은, "관에 달린 옥과 같을 뿐으로 그 속에 꼭 재주가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군요.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平 雖 美丈夫 如冠玉耳 其中未必有也
역자 신동준 선생님이 "2인자들"이라 칭한 건, 자신의 기량만으로 지방의 통치권을 결국 보장 받은 여러 "예비 覇者", 그리고 고제 유방을 받들어 지존의 자리에 올리고 자신들도 부귀 영화를 누린 "끝까지 팽 당하지 않고 성공을 이어간 2인자"들
에 주목한 평가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회음후 한신이나 팽월 같은 이는 하늘이 점지했다 할 뛰어난 자질을 갖고 태어난
일세의 효웅이었지만, 세속적으로 부러움을 받을 만한 성공 사례는 못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포나 번쾌 역시 영웅들이었고 끝도
대체로 좋은 편이었지만, 인신의 경지로 극에 달한 영화를 누리진 못 하였기에 역시 <세가>에 실리지 못 하고
<열전>에서나 행적을 볼 수 있는 인물들입니다. 우리가 <세가>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성공"을 추구하는 이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위인들의 생생한 기록이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