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역 사기열전 2 - 인물들의 흥망사 완역 사기 시리즈 (위즈덤하우스)
사마천 지음, 신동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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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김원중 교수님 판을 먼저 읽은 분들은 알겠지만, 열전 파트가 장승상열전을 기준, 1-2권으로 딱 나눠져 있습니다. 이 신동준 선생님의 번역본도 태도가 같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한 제국의 토대가 잡히기 전의 양상(그리고 그 속에서 활동한 인물들)과, 이후 소위 시스템이라는 게 제 꼴을 갖춘 후의 시대 양상이 서로 다르다는 "우연한 편의성"이 갖춰져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2권도 신동준 선생님만의 장기, 역량, 매혹성이 유감 없이 발휘되어 있습니다(자세한 건 제가 쓴 1권 리뷰를 참조해 주십시오). 1권보다 출현 빈도는 약간 낮아진 느낌이지만, 역시 (좀 과장하자면) 넘겨도 넘겨도 역주가 수시로 튀어나옵니다. 그 역주들은 첫째 난해한 제도사적 명칭에 대한 해설(독단적인 주장이 아니라, 여러 정상급 권위자들의 학설을 원용하고 계십니다. 물론 이제는 한국에서 이 신동준 선생님도 그 반열에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둘째 <사기 열전>을 넘어서 한문 고전으로 된 텍스트를 어떻게 읽어야 할 지 그 지침이 되는 여러 원칙. 크게 보아 이 둘이 역주를 통해 우리 독자들에게 사정 없이 제시됩니다. 사정이 이렇기에, 공부 욕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피해갈 방법이 당최 없습니다. 물론 그런 부수적 탐구가 아직 어려운 독자라고 해도, 신 선생님 특유의 정확하고 힘 있는 문장으로 구성된 본문만 읽어 내려가면 그만이죠.

역주의 힘이 여실히 느껴지는 이 멋진 역본. 그 구체적인 예를 지금부터 좀 들어 보겠습니다. <만석장숙열전>에 보면, 음중누설(陰重不泄)의 뜻을 놓고 제법 긴 설명이 이뤄집니다. 다른 역본은 아예 한문 원문이 실려 있지 않으므로, 역자의 판단 외에 다른 "가능성"을 우리 독자가 접하는 게 원천 차단되어 있죠. 신동준 선생은 일견 하찮아 보이는 이 대목을 두고도 이처럼 세심한 가르침을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이 구절을 놓고는 종래 삼가주 등에서 의견이 엇갈려 왔는데, 1) 말이 무겁고 누설하지 않는다. 2) 생식불능이다. 혹은 생식기에 큰 문제가 있다. 등입니다. 전혀 양립할 수가 없을 것 같은 이런 해석이 대립하는 이유는, 사마천처럼 비교적 직정을 토로하는 저술가의 문장이라 해도, 기본적으로 정사서란 에둘러 말하는 기조를 유지하곤 있기 때문입니다. 얼핏 보아 뜬금없는 풀이인 것만 같아도, 바로 이어지는 뒤의 문장을 보면 2)의 풀이가 훨씬 적실성 있게 와 닿는다는 취지인데, 독자로서 정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본디 고전을 해석함에 있어선 1) 문자 그대로의 풀이, 2) 도학적, 경학적 해석, 이 태도가 대립합니다. 근래 이르러(라기보다 이미 해방 후를 넘기고서는) 1)이 대세가 된 게 한국에서도 오랜 실정입니다. 신동준 선생님도 예외가 아닌데, 그의 <시경> 완역본에서도 이런 태도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존경할 만한 인물을 평하고 전(傳)하는 이런 기록에서, 가급적이면 대상자의 빼어난 미덕과 인품을 논하는 쪽으로 해석하고 싶지만, 현대에 중요한 건 사마천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그 진의를 탐구하는 게 일차 과제입니다. 참고로 김원중 교수님 판은 이 책과 달리 전자로만 새깁니다.

사마천이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았던 유파라고는 하나, 유림열전은 사가의 공정한 태도로서 자세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효문황후, 즉 세간에서 말하는 "두태후"는 워낙 실권자로 군림한 기간이 길었기에 여러 기록에서 등장하는데요. 이분이 원생(이 책과 김원중 교수님 책에는 원고생이라고 나옵니다)에게 황로학(쉽게 말해 도교 사상입니다. 도교로 자리를 잡는 건 위진남북조를 거친 후이지만)의 평가를 구하자, 원생은 대번에 "그건 무식한 노복들의 수작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두태후는 진노하여 원생을 돼지우리에 집어 넣고 성질 사나운 짐승에 의해 상처를 입거나 죽게 하는 벌을 내립니다...

이 대목에서 미묘하나마 번역이 여럿으로 갈리는데요. 제가 위에 적은 원생의 대답은 홍석보 교수님 판본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김 교수님과 신동준 선생님은 "노복"이 아니라 "노비"라고 옮기십니다. 두태후가 국가 인재 중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을 만큼 중한 벌을 내린 이유에 대해, 김 교수님과 신동준 선생님, 그리고 그 외 현대 학자 거의 대부분은 "두태후가 개인적으로 황로학을 선호했는데 이에 대해 거침 없이 폄하하는 발언을 한 탓"으로 새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홍석보 교수님 해석에 더 기울고 싶은데요. 그는 "두태후가 출신이 미천했으나 대(代)왕 시절의 문제(文帝)에게 잘보여 후궁 출신으로 황후에 오른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이라는 취지로 해설했는데요. 저는 이 학설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튼 요즘에 나오는 책엔 이 설을 거론하는 분이 안 보입니다. 참고로 이 대목에 나오는 고사성어가 그 유명한 "곡학아세"입니다.

p311에 보면 "백세후" 라는 표현을 두고 신동준 선생님이 여러 동의어를 제시한 대목이 나오는데, 역시 고전 공부에 관심 있는 분들에겐 너무도 큰 도움이 되는 설명입니다. 이 百世後는 <사기 본기> 고제 파트에도 또 등장하는데, 아마 여태후의 한 마디 중 인용되는 대목으로 귀에 익은 분들이 많을 겁니다. "폐하의 백세 후(곧 죽을 사람인데도)에 재상으로 누굴 기용하오리까?" "(병으로 다 죽어가면서) 아무개, 아무개, 아무개요." "황공하오나 그 다음은요?" "그 다음은 당신이 알 바 아니요." 나중에 본기 리뷰에서 언급하겠지만, 정말 숙연하면서도 한편으로 큰 웃음이 나오는 대목입니다.("이 여편네야 니가 그 다음까지 왜 묻니? 언제까지 해먹을 생각인데 지금?")

P777에 보면 역주에서 "약(若)이 급(及)으로 쓰인 거의 유일한 용례" 라고 풀고 계십니다. 제가 과연 그런지해서 자전을 두 권 살펴 봤는데, 역시 "급(及)"의 용법이 나와 있더군요. 여기서 及은 and의 뜻이죠. 이런 공부는 책을 통해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귀한 가르침입니다. 이 맛에 신동준 선생님 책을 읽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흉노의 공격이 갈수록 심해지자 여태후는 골머리를 앓습니다. 이게 근래 대두한 "거울 제국 이론"에 의해 설명이 됩니다. 농경 문화권이 분열된 상황에서는 개별적 습격이 유목 민족에게 유리하나, 일단 거대 통일 제국이 들어선 후에는 유목민들도 함께 큰 정치단위를 이뤄 대응한다는 취지죠. 여태후가 즉시 흉노를 토벌할 것을 논의하자, 제장(諸將)들이 만류했다는 기술이 <흉노열전>에 나오지만, 같은 책 <계포난포열전>에는 이와 서로 맞지 않는 대목이 있습니다. 논의의 대세가 토벌쪽으로 기울자 계포가 나서서 "저 번쾌는 참형에 처해야 합니다."라며, 선제(고제 유방)도 못 한 일을 항차 번쾌 따위가 어떻게 이루겠냐며 강력한 논거를 제시하고, 남편이라면 꼼짝도 못 한 여태후가 불문에 부치는 걸로 결론 납니다. 황제(혹은 그에 준하는 실권자)가 국정 논의가 위험 수위에 다다른 경우 쿨 오프를 시키는 게 최소한 두 번 나오는데, 앞에 언급한 <원생열전>에서 효문제가 "말의 간"의 예를 들며 중단하는 게 두번째 예입니다.

<급정열전>을 보면 효무제가 "급암은 날이 갈수록 편협함이 심해진다. 사람은 역시 배운 게 있어야 한다"고 평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무제가 아무리 한 제실이 안정기에 접어든 시절에 다스린 군주라고 하나, 경연, 서연 등의 제도가 채 자리를 못 잡은 고대에 일국의 재상을 두고 저런 말을 할 만큼 교양을 갖춘 자질이었을까요(본인은 얼마나 배운 사람이기에)? 어렸을 적 홍석보 선생님 판을 읽을 때는 이 대목이 도무지 수긍이 가지 않았는데, 완역본이 하나 둘 나오면서부터 "급암은 황로학에 경도된 인물이고, 무제가 말하는 '배운 것'이란 유학의 가르침을 의미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신동준 선생님은 이 대목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해제를 통해 짚습니다. 황로학 vs 유학의 코드는 이 책 전체를 가로지르는 맥락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한문 원문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한자 원문에 느낌표 같은 게 있을 리 없고, 따라서 번역문 어디에 이런 문장 부호가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를 살피는 건 흥미롭습니다. 신동준 선생님은 대체로 느낌표를 여러 군데에 삽입하시는 편입니다.

<오왕 비 열전>을 보면 고제 유방이 조카뻘 비의 관상을 보고 때늦은 후회를 하며("괜히 봉지를 내려줬군"). "네 얼굴에는 반역의 상이 있구나. 천하는 이미 우리 유씨 가문으로 통일되었으니 너는 행여 모반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며 당부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대목에서 느낌표를 넣는 건 이 책뿐입니다. 다른 책들에는 마치 조용히 타이르기라도 하듯 평서체로 끝납니다. 한자 원문에는 감정을 표시하는 어조사 哉 같은 게 없는데, 이런 건 어느 하나가 오류이고 다른 게 옳다는 게 아니라, 번역자마다 원문을 받아들이는 미묘한 느낌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何以可哉! 더 이상 무엇을 더할 수 있겠는가! (난포열전)
이 대목에서는 거의 모든 역본들이 느낌표를 붙이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에서야 황제의 자리가 존귀함을 알게 되었다!(유경 숙손통열전)
여기서는 신동준 선생님만 느낌표를 쓰는데, 원문은 어조사 也로만 되어 있습니다.

~해당한다! (1권의 p292)
이 역시 어조사 哉가 있어서 모든 번역본에 공통입니다.

面欺! 이는 태후를 면전에서 기만하는 것입니다. (경포열전)
여기서도 원문에는 어조사가 안 붙습니다. 신동준 선생님만 느낌표를 붙이고 있습니다.

<혹리열전>에는 이런 일을 어찌 다 거론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는데, 원문을 보면 何足數哉라는 구절이 두 번 반복됩니다. 김 교수님 번역에는 번역에서도 반복시켜 놓고 있으며, 신동준 선생님은 이게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신 듯 한 번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원앙열전>에는 備之!라는 원문을 두고 "준비하라!"라며 역시 느낌표를 붙이시는 태도네요.

이렇게 재미있는 분석이 독자 입장에서 가능한 것도, 이 책이 한문 원문을 그대로 싣고 있는 덕분입니다.

이 사기열전 2권은 특히 우리 민족의 기사를 다룬 <조선열전>, 신동준 선생께서 대단히 "진보적인 경제관"이 드러난다고 평한 <화식열전>, 그리고 사기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태사공 자서>가 모두 실려 있습니다. 신동준 선생님만의 현실참여적 세계관이 그대로 드러난 품격 있는 문장으로 일독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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