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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런 가족
전아리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8월
평점 :
인간 사는 세상에 신분, 등급의 차별은 언제나 있어 왔습니다. 지귀 설화를 처음 아동용 만화로 접했을 때, 저는 상당히 짜증이 나더군요. 아니,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그저 "분수를 알아야지!"라는 한 마디 말로 억누르라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이성을 좋아하는 건, 자신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실행에 옮기기에는 너무도 큰 (타인들의 부수적인) 희생이 따르고, 결국 자신도 상처 받을 게 뻔하면서 부득부득 티를 내는 그 추한 모습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상대방인 여왕 입장은 생각도 안 한 셈이니 그게 어디 사랑이겠습니까, 더러운 정욕이지.
서민들은 보통 있는 사람 높은 사람 욕하는 재미로, 고달픈 생의 스트레스를 달랜다고도 합니다. 비록 돈은 없지만 오순도순 사는 맛이 있어, 체면 따지고 뭐 따지고 돌보고 살필 게 많은 상류층 부러울 게 없다고도 하죠. 이 소설은 어쩌면 그런 평범한 독자들에게, 저들을 당신네들의 기준과 범주 안으로 끌여들여 주겠다며, 조금은 끔찍하고 대체로는 통쾌하면서도 훈훈한 이야기로 어깨를 토닥여 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그게 사실이고 아니고를 일단 떠나). 많은 TV 드라마들도 아마 이런 기능을 수행하겠지요.
줄거리는 책 소개 같은 데 잘 나와 있을 테고, 제가 느낀 점 중심으로 간단하게 소설의 매력을 짚어 볼게요. 우선 진욱, 이 사람은 소설의 "도덕적" 주인공 같습니다. 처음에 서회장(용훈)이 이 자의 뒤를 캘 때, 너무도 평범한(악당치곤) 배경만 줄줄이 나와 독자들이 의아해할 만했죠. 결국 눈치빠른 독자들이 예상했던 대로 진상이 드러나고요. 물론, 혜윤(첫째딸)이 "그런 본능"을 타고났다는 것까지 거짓말이라거나 "계획"은 아니고, 실제로 여러 남자를 만나고 다닌 건 사실이더군요. 이제 이렇게 사랑하는 진욱이를 만났으니 그런 더러운 일탈은 꿈도 안 꾸길 바랍니다. 숨막힐 듯한 집안 분위기에 억압된 자아가 과잉보상심리 때문에 억지로 사고를 치고 다녔다는 설명(후천적 요인)이었으면, 보통은 이야기가 심각한 방향을 틀 뿐 아니라 길이도 엄청 길어졌겠죠? 그러나 이 소설은 아주 훈훈하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마무리일 뿐입니다.
제가 위에 지귀 설화를 뜬금없이 꺼낸 것도, "불"이라는 소재에서 연관고리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ㅎㅎ 제 생각에 지귀의 불이 엄청 추했다면, 이 진욱의 "불"은 (좀 얼척없는 비약이긴 하나) 뭐랄까, 일본식 은혜- 수치의 폭발적 언표 같은 느낌? 아무리 별 장점 없고 어리석다시피한 성실함으로 세상을 살아 온 인생이라고 하나, 일관된 도덕성 하나로 난마처럼 얽힌 그 복잡한 말썽을 한 큐에 정리하는, "근본에서 올바른 것"의 엄청난 위력을 상징하는 캐릭터 같았습니다. 뭐 이렇게 말도 안되는 초인적 선량함을 갖췄으니 혜윤이가 끌렸는지도 모르지만, 독자 입장에선 공감이 안 되었네요. 여기 나오는 사람들 중에 가장 그림이 안 그려졌습니다.
혜란은 어떤가. 이름난 신경외과의였다는 부친과 달리 외향적이고 사람들사이에서 짜릿한 게임을 즐기며 사업적 성공을 거두는 쪽에 타고난 적성인 용훈(혜윤, 혜란의 부친), 그런 기질을 잘 물려받았다는 설명인데, 중반쯤 그런 탁월한(냉혹하고 이기적이어도 탁월했다는 점만큼은 부인 못하죠) 계획을 짜 내었으니, 만약 이 안대로 일이 이뤄졌다면 아버지 사업은 그녀가 물려받아 마땅했을 겁니다. "아 왜 이럴 때만 가족들은 내 말을 들었던 거야?" 그녀의 잘못은 제가 보기에 없는 듯하고, 무슨 하늘의 섭리 같은 게 개입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해 보이는 진행이었어요. 이래서 어른들이 착한 사람됨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 아닌가. 확률로만 따지면 혜란의 계획은 (이 훌륭한 가문의) 골칫덩이 두 개를 일거에 쓸어버리기에 충분히 치밀했는데도요. 그래서 honesty is the best policy 라고도 하는 거겠습니다만.
저는 서회장(용훈)이 그 두 "해결사"를 다루는 방식이 아주 서툴렀다고 봅니다. 출판사 사장님이 고전을 안 읽으셨나 봅니다. 위나라 사람 오기는 장병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졸개의 고름을 빨기도 했는데, 이렇게나 일을 잘하는 아랫사람들에겐 더 과감한 제스처를 취했어야죠. 유미옥 여사도 옆에서 어설프게 거드는 품으로 보아 "진짜 계산"을 잘 못하는 분 같습니다. 결국 세상에 막장성만 폭로하고 서민(누구?)의 품에 안겨 훈훈한 감동을 선사하는 데 그친 결과만 봐도, 이분들은 진짜 상류층의 기질이 좀 부족했던 것 아닌가... (ㅎㅎ 농담입니다)
제가 가장 끌렸던 캐릭터는 진환이었는데요. 혜란이가 입으로야 "이게 안 되면 플랜B로 가자"며 큰소리를 쳤지만, 사실 그런 게 있기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이기적이고 말은 많고 못됐지만, 어딘가 어설프고 예쁘지도 않고(본인도 털어놓았듯 화장빨) 혜란이를, 그 단점까지 사랑한 진환이야말로 둘이 잘 어울리는(출신 성분도 서로 비슷하고) 천생연분인 것 같네요. 혜란이도 잔머리 잘 굴리고, 진환이야말로 제 몸으로 플랜B를 집행한 거나 마찬가지인데다, 이게 계산의 결과라기보다(본인이 머리도 좋지만) 다 진심이 뒷받침되어서 가능했던 거니까요.
저는 결말이 해피엔딩이라서 좋았던 게 아니라, 경수 있죠. 그 경수란 캐릭터가 의외로 촘촘히 사연이 짜여진 채 끝나서 좋았습니다. 머리가 안 좋은데 어찌어찌해서 집안에서 뭐 하나 만들어 보려고 서포트해서 인재로 포장하는 예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막상 일선에 나서 보면 세상이 어디 누구 맘 편하게 롤 플레잉하도록 베이스 깔아주는 만만한 곳이 아니거든요. 어차피 낙하산이다 뭐다 이런 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한계가 다 드러납니다. 흙수저니 뭐니 불평만 할게 아니라 정말 본인이 목숨 걸고 있는 포텐 다 끌어올려서 일하면, 저런 경수 같은 애들은 경쟁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 필요가 있죠. 그렇다 쳐도, 이것저것 두루 갖춘 진환이 같은 애들 때문에 세상은 불공평한 게 드러나나요? 뭐, 그럴 수도, 아닐 수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