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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가진 소녀 ㅣ BIS 비블리오 배틀부 1
야마모토 히로시 지음, 이승형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삶에 있어 우리 인간은 다양한 문제와 난관을 맞닥뜨릴 뿐 아니라, 때로는 반대로 감당 못 할 듯한 희열과 행운을 맞기도 합니다. 지나친 기쁨과 몰입 역시 안정적 삶을 지켜나가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는데요. 이런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책읽기는 여전히 우리의 지침과 등불로 기능할 수 있을까요? 혹 책읽기 자체가 과도한 집착의 대상이 된다면, 이는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여전한 혹은 더 큰 재앙의 시작이 되지는 않을까요?
좁은 땅에서 한정된 사회적, 경제적 가치를 놓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경쟁을 벌이다 보니, 일본이나 우리 나라나 어린 나이때부터 "배틀"이라는 개념, 혹은 엄연한 현실에 너무 익숙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은, 동료인 타인들과 협력, 동맹, 박애, 연대 같은 관계에 더 자주 노출되는 게 정상인 데도 말입니다. 헌데 이 살벌한 경쟁 풍토 속에서도, 그 "배틀"이란 게 독서를 놓고 그간 쌓은 내공과 관심사의 깊이를 겨루는, 소위 "비블리오 배틀"이라면, 이건 흥미로울 뿐 아니라 뭔가 상황이 귀여워지기까지 합니다. 쌓은 지식의 깊이가 형성되어 있건 그렇지 못하건 간에, 그 수단이 살벌한 독기와 무자비한 폭력 따위가 아닌 "지식"의 그윽한 경지를 서로 겨루는 설정이라면, 사실 이야말로 인간다운 다툼일 뿐 아니라 (그 비현실성 때문에라도)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귀여움"이 풍겨지는 게 보통일 겁니다.
저는 이런 설정과 소재가, 소설의 영역에서 쓰일 수 있다는 자체가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우리 나라라면 소설가나 독자나 (둘 다 책에 대한 사랑으로는 서로 지지 않으려 드는 집단일 텐데도) 이런 발상에 대해선 지레 재미 없다거나 억지스럽다거나 하며 서로 미루거나 배척하지 않을까요? "왜, 이런 재미있는 소설, 그것도 장편이 만들어질 수 있잖아?" 책에 대한 흥미와 몰입, 탐구, 때로는 투쟁을 다루는 메타적 문예는 이 작품 말고도 그간 여럿이 있어 왔습니다. 우리가 흥미를 보이는 건, 그런 기발한 발상이 발상으로 그치지 않고, 이처럼 결과물 하나가 버젓이 빚어지고 난 후의 "안전한" 선택을 내릴 수 있을 때입니다. 이미 다른 나라의 많은 독자들이 책을 읽고 호응을 보내고 상업적 성공을 거둔 후라 검증이 끝났다면, 우리들은 사전의 모험이나 리스크가 면제됩니다. 이후에 보이는 흥미의 "낌새"는, 그걸 놓고 순수하다거나 정직하다고 평가하기 쉽지 않죠.
솔직히 이런 소설을 어떤 작위적 계획이 아니라, 쓰는 이 본인이 흥에 겨워 자연스러운 창작의 대상으로 삼자면, (보기에는 쉬워도) 많은 준비와 체계적인 노력, 처음부터 독서를 즐기고 외경할 수 있었던 지성, 그리고 초심을 잃지 않는 순수함이 고루 갖춰져야 할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답이 없어 보이는 오타쿠, 균형 감각이 결여된 미스핏들인 것만 같지만, 아무리 제한된 분야라도 이렇게 한 방향으로나마 집요한 탐구와 애정을 지속하려면 여간한 진정성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더군요. 하물며, 이 모든 캐릭터의 실감을 다 창조해 낸 이는 작가 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런 기묘한 사연을 인상 잔뜩 쓰고 무게 잡으며 들려 주는 게 아니라, 일본 서브컬쳐의 익숙하고 정해진 공식에 맞춰, 친근하게 풀어 주는 그 태도도 놀라웠는데, 저 같으면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그런 "장르"를 택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어렵게 번 돈을 유쾌하게 고층 빌딩 위에서 확 뿌려주는 화통함, 또 그 많은 돈을 애초에 벌어 수중에 간직했던 "능력"이 다 입증되는 이벤트였다고나 할지.
플롯 속에선 "배틀"이 벌어지지만, 작가의 입장에선 그 한심하거나 진지하거나 한 캐릭터들을 한 마당에 모아 놓은 축제를 빚는 셈입니다. 세상 사는 게 아무리 투쟁의 연속이라 해도, 그 다툼의 방식이 지혜와 양식의 깊이와 폭을 놓고 벌이는 모습이라면 이미 원초적인 갈등은 모두 지양되거나 해소된 후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아무리 (짐짓 가장된) 오타쿠들의 덜 떨어져 보이는 난리통을 머리에 이고 있어도, 앞서 말했듯 황당하면서도 흐뭇하고 귀엽습니다. 우리 나라 작가들도(다 만만찮은 고뇌와 난관을 헤치고 그 자리에 선 이들일 텐데) 이런 참신하고도 따뜻한 세계를 좀 만들어 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