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동양과 서양이 편지를 쓰다 - 혁명의 딜레마, 고객이 된 시민, 지식인의 브랜드화
자오팅양.레지 드브레 지음, 송인재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문명의 동과 서를 가르기 이전, 지식인이라면 문화권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을 한탄하기 전에 보편이라는 이름의 배로 무해통항을 향유할 방법은 없는지 먼저 고민할 만합니다. 인류의 공영과 해방, 자유, 평등, 깨끗한 환경의 혜택 등은 누구나 공감을 보낼 수 있는 가치입니다. 혹여 좌파 지식인으로서 젊은 시절 커리어 대부분을 보낸 분들이라면, "혁명", "자유", "민주주의" 등의 화두(말 그대로 화두더군요)로 보다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도 있겠습니다.

레지 드브레는 벌써 인생의 황혼기를 한창 넘긴 분이고, 겸손되게 "고령으로 인한 무능"을 스스로 언급할 만큼 지긋한 나이지만, 편지들을 구성하는 문장에서 우러나는 지적 활력은 여느 젊은이 못지 않은 듯합니다. 자오팅양(한국식 독음이라면 조정양)은 중국 철학계를 대표할 만한 리쩌허우 박사의 수제자로서, 학자로서 원숙기에 접어들었다 할 세대입니다(그래서 나이로는 저 드브레의 아들뻘이죠) "트러블 메이커"라는 달갑지 않은 비판도 들어가면서 학계와 독자의 인식 지평을 여러 신선한 시도를 통해 넓힌 공헌이 있는 분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분의 "천하 체계"를 다룬 개념서가 번역되어 나왔고, 이 책에 실린 편지들 중에서 그 개요가 여러 번 언급됩니다.

두 분 다 자신의 속한 체제, 민족, 국가 안에서 이단아처럼 인식되는 면이 있는 지식인들입니다. 드브레는 대학생 시절 체 게바라 등의 혁명 활동에 직접 가담하다 징역형까지 선고받은 이력이 있습니다. 자오팅양은 좀 놀랍게도 "유물론적 변증법"에 과하게 집착할 필요 없으며, 관념론의 출발점에 서서 세계의 인식은 같은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폅니다. 이런 생각이 현 중국 공산당 수뇌부에 마냥 마뜩하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습니다. 정통파 사관에 의하면 어차피 중국사 3대 혁명 중 앞의 두 개는 최종의 단계에 의해 지양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유물입니다. 허나 자오 박사는 첫째 혁명의 산물인 주 무왕의 체제에서 큰 의의를 찾고, 이것이 현대 국제 정치 체제 확립에도 큰 시사를 준다는 쪽입니다.

한편 드브레 역시, 아들뻘 학자에게 보내는 서신치고는 정말 겸손하고 정중한 어조로(사실 좌파 지식인치고도 대단히 우아한 말투를 구사합니다) 대담하고 속 깊은 소통을 시도합니다. "진-한의 혁명은 그저 궁정 쿠데타에 가깝지 않은가? 그것이 왜 혁명인가?" 아마도 드브레는 자오 박사의 대표작을 진지하게 읽은 후 머리 속에 떠오른 의문을 이처럼 제기한 듯합니다. 하지만 이 질의는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기본 사실을 착오한 면이 없지 않은 것 같네요. 시황제의 진 건국이든, 한 고제의 군국제 확립이든, 혹은 무제의 본격 군현제 실시이든 간에, 이 "혁명"은 기존 봉건제의 근본적 한계를 뛰어넘은, 동아시아 세계 체제의 근본적 요소에 초석을 놓은 말 그대로 혁명적 시도였습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위, 진, 수, 당, 송 등의 등장은 궁정 쿠데타로 볼 여지가 있지만 말이죠.

"혁명"이 아래로부터 민중의 참여를 그 필수 요소로 삼는지 여부를 놓고도 두 지식인은 적잖은 견해 차이를 보입니다. 드브레는 처음부터 68 혁명 세대의 일부이므로, 특히 그의 후견인 격이었던 사르트르가 고안한 "연대와 박애 정신에 기반한 폭력"에 대해 매우 우호적입니다. 한편 그는 우둔하고 투박한 하층민이 아무 개념 없이 미신적 국부 신앙 비슷하게 마오를 숭배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합니다. 교육과 인식이 미비한 하층민은, 스스로 좌파 정치 이념을 뿌듯한 각성의 지표인 양 과시적으로 언표하면서도, 그 아득한 조상뻘 원류가 될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자신이 그에 대해 무지하다는 이유만으로" 적대시합니다.

이런 드브레에 대해, 자오 박사는 "지금은 cogito가 아닌 facio의 시대"라며 자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합니다. 물론 "코기토"는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논변에서 나온 용어지만, 사실 20세기 들어 바로 드브레의 스승이자 후견자인 사르트르 자신이 <존재와 무>에서 상당 분량을 할애하여 그 실존적 재해석을 시도한 바 있죠. 자오 박사가 이 점을 의식하고(따라서 다분히 도발적 의도에서) 이 토픽을 꺼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 다 불꽃 튀는 논쟁의 향연을 벌이기보다는, 너무 정중하고 우아한 담론을 꾸려 가는 모습이라서요.

드브레는 설혹 자유롭고 깨인 지성을 가진 개인이라 해도, 그 소속 민족의 집단적 인식 한계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가령 한(漢)족은 얼마나 좡 족(광서 장족)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지 같은 다소 정치적으로 민감한 질문까지도 포함합니다. 이에 대해 자오 박사는 "12세기에 동양으로 유입된 유대인들조차 아무 충돌 없이 동화시킨 게 중화의 체질"이라며, 고정된 틀이나 제약 없이 모든 문화 요소를 수용할 수 있었던 지난 역사를 환기시키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비교적 이론의 여지 없이 합의를 이루는 대목은 "탐욕스러운 자본에 공동 대응하는 지성인의 자세"입니다. 민중은 처음에 신민(臣民)의 지위에서 시민의 위상을, 혁명이라는 과정을 통해 쟁취 획득하였으나, 이제 자본에 의해 강제로 "고객"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는 데 두 분은 거의 충돌이 없습니다. 여기서 자오 박사는 모호하고 위험하며 내용이 거의 박탈되기까지 한 democracy 대신, 자신이 입안한 publicracy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드브레 역시, 중세에 가톨릭의 라틴어, 20세기에 마르크스주의의 혁명 신앙(이 말 안에 어느 정도 회의주의가 내포된 거죠. 저는 소위 레지스탕스 신화에 대해 "아름다운 거짓말"로 규정하는 드브레의 이 책에서의 태도를 보고 놀랐습니다)을 대신할 만한 그 어떤 "보편"에 대한 간절한 희구를 표현합니다. 서신 왕래를 통한 지식인들의 의견 교환 역시, 인류가 "더 많은 빛, 광채"를 갈구하는 오랜 전통 속에 유지해 온 아름다운 소통의 장입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