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인생의 문장들
오다시마 유시 지음, 송태욱 옮김 / 푸른숲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인생의 문장"이라고 하면 한 사람의 인생 내내를 통해 두고두고 곁에서 참고하거나 나 자신을 돌아볼 거울로 삼을 수 있는 그런 문장을 가리켜 일컬을 수 있겠습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문장은 사실 그렇게 불릴 자격이 충분하지만, 그렇게 수 없이 많은 문장 중 무엇을 가리고 추려 하나의 엄선된 앤설러지를 이루는 작업은 그 편집자의 일관된 세계관과 철학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 내 셰익스피어 연구에서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오다시마 유시 노교수가 일반 대중을 위해 이렇게 예쁘게 묶어낸 한 권의 책은, 셰익스피어라는 거장 말고도 우리 시대 깊은 교양과 높은 인격을 지닌 한 사람의 석학을 우리 독자가 따로 만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뜻깊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노교수님의 관점이, 현대 수정주의 트렌드와 그리 타협하지 않는 경향이라는 점에서 마음 편하게 읽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문적 경향성이 이 책 안에 짙게 반영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젊어서 한 명의 열혈 초보 연극배우로서 갖은 정열을 다해 해석하고 포옹했던 텍스트, 그리고 나이 들어서는 한 문호의 진지한 탐로서 연구에 일생을 바친 원작자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더 먼저 읽힙니다. 다음으로,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은 젊어서는 청춘 특유의 불꽃 같은 열정, 나이 들어서는 모든 풍파와 애로의 기억을 한 구석으로 치워두고는, 그저 잔잔한 관조의 마음으로 지난 역정을 돌이켜 보는 달관의 심성이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이 정화, 이 화체의 절절한 문장, 절실한 구절들에, 이제 인생의 황혼에 서서 자신과 세계를 찬찬히 통찰하는 한 노교수의 담담한 독백을 들어 본다는 의의가 크게 스며 있습니다. 그러니 독자가 젊으면 젊은 대로, 활화산 같이 타오르는(타올랐던) 청춘의 표백에 귀 기울일 일이고, 나이 드신 층이면 역시 그에 걸맞는 묵직한 반추와 성찰의 아포리즘에 깊이 빠져 들 수 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선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사랑의 기쁨과 슬픔의 챕터에 고루 인용됩니다. 맨 처음에 인용되는 대사가 줄리엣이 그의 첫사랑이 어떤 피를 물려 받은 신분인 줄을 알고 "왜 그대의 이름은 로미오인가요?"를 절규하는 바로 그 대목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고유의 매력과 생동감을 잃지 않고 끊임 없이 재해석이 가능한 고전을 보면, 인물들의 성격이 판에 박힌 평면성을 탈피하고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예측 불가에다 반항적인 면이 있습니다. 줄리엣 역시 연인에 맹종하거나 인습과 현실적 제약에 굴하지 않고 맹렬한 거부를 시도하는데, 그 당돌하고도 엉뚱하게 내뱉는 첫마디가 저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로미오 역시 "철학 따위는 집어 치우라"고 하며, 줄리엣을 만들어 줄 수도 없는 철학이 무슨 소용이냐며 통분한 절규를 내뱉습니다. 이 명대사를 저자는 제8장 <영혼의 외침>에 배치하여, 청춘의 미숙한 좌충우돌 외에도 인생 어느 시기에나 공통된 깊은 고뇌의 외침을 생생히 대변하게 역할을 맡깁니다.

"말을 다오, 말을! (그)말 대신 내 왕국을 주겠다." 역사나 설화, 문학에서 가장 어리석은 행태로 즐겨 꼽히는 게, 순간의 괴로움을 참지 못해 조상 대대로 물려 받은 소중한 권리와 유품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자손의 선택입니다. 이 순간 말 한 필이 없어 생사의 기로에 놓인 군주, 그에게 있어 누대로 물려받은 왕국, 그 통치권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믿어 온 왕국의 종사를 타인에 넘겨도 무방하다고 외치는 목소리. 제아무리 존엄한 혈통을 물려 받은 처지라도 목전에 임박한 누란의 정세 앞에 일체의 자산과 자존을 포기하려 드는 모습, 인간이란 이처럼이나 취약하고 영속적이지 못한 영혼을 지녔을 뿐임을 처연한 세팅 속에 잘 드러내고 압축하는 문장입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사실 학문 연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이치고는 좀 뜻밖이다 싶은 통찰이 들어 있습니다(물론 이런 까닭에 그를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도 많고요). "학문은 우리 인간을 모시는 시종에 불과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 책 저자가,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그를 학문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학자로서의 두 입장이 어떻게 갈등, 충돌하고, 이를 발전적으로 승화시키는지 그 태도의 흥미로운 입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고전이 결국 세월의 도전과 침식에 맞서 승리하는 까닭은, 인간, 인간의 지향과 가치를 그 모든 것의 앞자리에 두는 숭고한 결단과 확고한 의지 덕분입니다. 학문은 인간을 모시는 시종의 지위를 자처함으로써, 이번에는 역으로 일세에 그치지 않고 영속적으로 인간의 운명을 선도하는 지침의 역할과 자격을 보유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책은 그래서 한 작가의 대표적인 흔적, 표방을 통해, 인류가 먼 여정의 어느 지점까지 도착했으며 여전히 만만찮은 과제를 앞에 두고 있는 현대에 무슨 가르침을 제공할 수 있는지, 산뜻한 요약과 깊이 있는 전망을 동시에 펼쳐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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