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지엔은 남자를 위해 미니스커트를 입지 않는다 - 프랑스 여자들의 사랑, 패션, 그리고 나쁜 습관까지
캐롤린 드 메그레 외 지음, 허봉금 옮김 / 민음인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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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시크는 자신을 당당하게 여기는 애티튜드에서 시작된다." ㅎㅎ 벌써 이 문장부터가 보그체의 위화감을 풍기고 시작합니다만, 해당 문체의 효용이 여러 차원에서 대체 불가능함을 우리가 잘 알듯, 이 문장으로 상징되는 책의 스타일, 이미지 환기, 상념의 구체화 효과 등도 사실 다른 수단으로 달성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어떤 분위기는, 어떤 만족과 쾌감은, 특정 매개를 통해 맛 보는 게 유일한 옵션입니다.

타자나 오브제 아닌 주체로서의 여성이 어떤 선택을 통해 자아를 표현하거나("표현"이라는 단어 속에 벌써 타자화에의 웅크림에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요) 자각하려 할 때, 그 주요 미디엄이 패션이라고 단언함은 성차별적 뉘앙스를 품음인가. 혹은 이 역시 의식의 과잉과 담론의 폭주인가. 이 심각한 질문에 대해 이 책은 가장 소박하고, 알기 쉽고, 일상적이고, 직관적인 해답을 내 놓고 있습니다. 이 책을 패션 레퍼런스로 받아들일 건지, 인문 에세이로 읽을 건지, (정말 드물겠지만) 철학의 미세한 귀퉁이 한 자락을 포착한 게시록으로 읽을 건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입니다. 두 가지 이상의 스탠스를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독자는 축복을 받은 거고요.

우선 어떤 패션의 코드를 잡기 위해, 일일이 귀납적으로 구체의 끝을 잡는 체험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저자들의 기본 전제입니다. 그녀들의 마인드가 어떤 꼴로 세팅되었는지만 감을 잡았다면, 나머지는 본인의 창의에 의해 펼쳐 나갈 수 있고, 알고 보면 이런 자세야말로 파리지엔의 패션 본체의 연기, 아니 발현이라고 평가해야 마땅하죠. 모방하는 파리지엔이란 형용의 모순입니다. 파리는 남자를 위해 미니스커트(혹은 무엇이라도)를 입는 계집애보다, "짭"을 더 경멸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페미니즘"이란 말도 이미 낡았습니다. 물은 도도히 초 단위의 분할적 관측을 허용하지 않고 흐를 뿐인데, 어느 낡은 개념이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영혼의 날갯짓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게 자기 검열입니다. 내가 이런 옷을 입고 다니면 싸게 보이지 않을까? 이런 옷 속에서 나의 끈끈한 욕구가 엿보이지 않을까? 내가 이렇게 입고 다닌다고 해서 누가 나의 해방된 영혼을 인식해 줄까?(=차라리 관습에 편안히 굴복) 이 모두가 피곤하고 소모적이기 짝이 없는 굴레입니다. "파리지엔의 패션"은 이 모두에 내리는 고르디우스의 칼날입니다. "이 옷을 입고 니가 온전히 만족할 때 비로소 정직한, 자연스럽게 뻐길 수 있는 파리지엔이 된다." 전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철학적으로건 역사적으로건 현실에서의 선택 기준 마련이건 왜 끝까지 "프랑스적인 것"이 확고한 참고로 기능하는지 비로소 실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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