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이야기 - 천 가지 역사를 품은 살아 있는 도시
미셸 리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처럼 제목이 <런던 이야기>라고 붙었을 때, 독자는 정말 런던에 대해서만 장대하고 두툼한 서사가 펼쳐질 것을 기대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그런 책이란, 1) 시간적으로는 이 도시가 터를 닦은 먼 고유의 태초부터 지금까지를 커버하며, 2) 특히 공간적으로는 주제에서 일탈함 없이 엄격히 런던과 그 위성구역들이 이루는 벨트만을 공전하며, 이심률을 최소화한 채 서술의 기조가 유지되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겁니다.

그런데 그런 책이 쓰여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1)지난 역사를 신나게 설명하다 보면 서술의 관성에 의해 현재로 급선회하기 어려워, 결국 과거의 회고에 머물게 되고 2)그러다보면 주제는 결국 "런던의 역사"란 탈을 쓴 "(흔한)영국의 역사"가 되어 지금까지 나온 숱한 유서(類書)의 틀을 답습하기 십상입니다. 그렇다 한들, 독자는 어떤 책이 달고 있는 제목만 보고, 부모에게 장난감을 조르는 어린이처럼 자신이 기대한 모든 바가 해당 도서 안에서 그 해결을 보리라는 식의 무리한 희망을 가져선 곤란합니다.  대개 그런 경우, 아닌 줄 뻔히 알면서 의도적으로 기대치를 높이 잡아, "내 기준에는 못 미침" 같은 블랙 컨슈머 형의 불순한 트집을 잡거나, 중국집에서 파스타를 주문하는 식의 비뚤어진 속물 심리가 작용하는 까닭이 크죠.



그런데 이 책은, 설령 그런 기대를 품고 접근한 독자라고 해도, 책이 달성한 성취 앞에 압도되어 정직한 만족을 표시하며 물러날 수밖에 없는, 재미있으면서도 속이 꽉 찬 그런 책이었습니다. 어떤 책이 재미가 있다 보면, 대개는 깊이가 부족하거나 부정확하고 빈약한 서술이 이어지기가 쉽습니다. 제대로 정석에 맞춰 역사를 쓰면 이번에는 아주 따분한 litany로 떨어지고 말거나, 인내를 시험하는 까다로운 형식 논증으로 돌변하는 게 또 골칩니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게 그만큼 어렵고, 책 쓰기라고 해서 예외가 아닐 터입니다. 헌데 이 책은, 정말로 두 마리 토끼를 (다소 이상한 신명의 장단에 맞춰) 잡아내고 있더군요! 이 분야 책을 적잖게 읽어온 독자로서 이는 드물고도 신기한 체험이었습니다.


사실 비전문가, 비전공자, 게다가 한국인 저자의 솜씨라고 해서, 처음에는 오랜 체류의 경험에 바탕을 둔 "애정과 열정으로 전문성과 진지함을 대체한 책"으로 지레짐작했습니다. 그런 책도 저자의 열정이 바른 방향만 지키고 있으면 읽어 줄 만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게 아니라, 웬만한 전공자가 쓴 역사서보다 훨씬 가독성 높고, 속속들이 디테일을 이해한 깊이가 있으며, 무엇보다 저자가 "강렬한 집필 충동"에 끌려 시원시원 천의무봉으로 써내려간 게 확 눈에 띄는 책이었습니다.



다시 처음의 논점으로 돌아가서, 이 책 제목은 <런던 이야기>입니다. 1) 런던의 과거를 바탕으로, 현재의 실상에 유기적으로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가? - 그렇습니다. 2) 과연 "공간적으로" 런던에 초점을 넉넉히 두고, 할 말 없을 때 적당히 영국사 일반으로 우회, 퇴각하는 꼼수를 쓰진 않는가? -이 역시 '그렇습니다. '란 답이 바로 나옵니다. 솔직히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이 모두 부정적이라도, 3) 읽는 재미만 있으면 용서가 됩니다. 어차피 대중서 아닙니까. 그런데 이 책은 1), 2), 3) 모든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을 주었습니다. 독자로서 저는 그 점이 참 신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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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잉글랜드가 서로 구별되는 단위, 개념이듯, 잉글랜드의 심장이 언제나 런던이었을지언정 두 영역의 정체성이 언제나 한 방향, 같은 본질을 지니진 않았습니다. 예컨대 이 책에서, "거절 컴플렉스"를 설명하는 대목을 보십시오. 색슨 족이 대거 침략해 들어왔을 때, 로마의 호노리우스 황제는 "너희 살 길은 스스로 찾으라."며 런던 체류 제국 속민들의 안위를 보장하길 거부, 아니 포기했습니다. 여기서 이어지는 설명이 "이때 버림을 받았다는 그 트라우마가 면면히 이어져, 근세에 이르기까지 反로마, 反 대륙의 정서가 이곳 주민을 지배하는 근원이 되었다는 설명. 물론 이게 저자 고유의 학설은 아니고, 역사심리학적으로 꽤 인기도 있고 연혁도 긴 입장입니다. 재밌는 건 침략자 색슨 족에 대해 품어야 할 원한이 엉뚱하게 종래의 종주권자 쪽으로 전환되었다는 건데, 여튼 유독 반 가톨릭, 반 라틴 성향이 정치적 보수주의와 함께 (민족주의 자체보다 더) 깊은 뿌리를 내린 데 대한 재미있는 설명은 됩니다. 난립하는 학설들 중 용케도 이런 "매력적인 가설"을 뽑아내어 유효적절히 제 자리에 삽입한 저자의 센스가 돋보이며, (앞서 말했듯) 런던의 과거와 현재가 이처럼 매 장에서 긴밀히 대화를 나누게 하는 솜씨, 배려, 긴장도 마음에 듭니다.



유럽의 역사는 그 어느 나라의 사정이라도, 로마나 파리와 연계를 짓지 않고는 온전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탈리아나, (왕권이 속속 미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린) 프랑스 같은 게 아닌 , 로마와 파리(그리고 좀 지나서 빈) 같은 도시 단위가 그들 역사를 파악하는 데에 핵심 축을 이룹니다. 잉글랜드 아닌 (그 중심지) 런던은 이들(로마, 파리 등)과 같은 도시 자격으로 균형을 이루고, 그들과는 또다른 기류와 성향의 정치적 거점이었기에, 확실히 유럽사(영국사라고 해도)의 설명에 있어 든든한 발판 구실을 합니다. 이 책은, 앙주 제국 성립 이래 내내 서유럽 국제 정치의 유력한 중심지였던 이 도시에 대해,  확실하고 탄탄하게 그 족보의 재구성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완독한 후 "영국의 역사"로 넘어감은 물론, 서유럽사 개관을 도모하는 데 든든한 밑천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황이 영국에서 노예로 잡혀 온 소년들을 두고 그 아랫사람과 Angle, angel 로 말장난(pun)을 하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죠. 근데 이 시대에 영어가 유럽의 통용어(lingua franca)도 아니었고, 교황이 영어를 알지도 못했을 듯한데 신빙성이 클까? 이런 의문이 드는 독자도 있을 겁니다. 이 일화의 진위 판정은 별론으로 하고, 저 단어 둘 다 라틴어, 혹은 이탈리아 모처의 방언상으로도 발음이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언어학적으로 모순이나 문제점을 드러내는 바는 없으며, 정황상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1999년작 미국 영화 <굿바이 마이 프렌드>에 이 소재를 활용한 장면이 있습니다.

가이 포크스란 인물의 평가는 언제나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할 위험을 안은 화제이기 때문에, 이를 거론할 땐 누구나 조심스러워져야 합니다. 제가 이 대목을 읽을 때도 신기하게 생각된 게, BBC 조사를 인용하며 이 인물이 30위권에 들었다는 이유로, 그 복권 혹은 재평가를 아주 자연스럽게(혹은 당연하다는 듯) 다루고 있으신데, 사실 상황에 따라선 분위기를 아주 싸하게 만들 수도 있고, 런던 외 지역에선 아직도 보수적 기풍이 강합니다. 하지만! 이 책 제목은 <런던 이야기>, 런던의 현 거주자들이 어떤 생각을 갖는지에 더 초점을 두어야죠. 한때 비열한 반역자의 표상처럼 여겨진 가이 포크스가, 그래픽 노블 혹은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서 화려하게 재조명된 것처럼, 이 책 역시 그에 대해 긍정적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도 역시, 이 책의 장기로 (런던의) 과거와 현재가 밀접한 소통을 유지하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영국 영화를 보다 보면 2차 대전 당시 이 나라 국민이 고강도의 내핍 생활을 견뎌야 했던 사정이 자주 나옵니다. 한국도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의 전시 경제 체제가 민생을 휘몰아치는 바람에 큰 고초를 겪었지만, 나치 독일의 공군이 시도때도 없이 도심, 부심을 폭격하던 런던 역시 사정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독일의 전격전을 가리켜 반 고유명사로 "블리츠크릭(독일어입니다)"이라 부르는데, 이 당시 독일의 매서운 공격을 견뎌낸 런던 시민들의 저항 의지를 "블리츠 스피릿(영어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 심각한 정치적 어조를 띠거나 사회학 담론 설교를 않으면서, 저자는 당시 생포된 독일군 군인에게 런던 시민들이 린치를 가하거나 하지 않은, 성숙한 정신의 발현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설명하며 넘어가시는 이 모양새가 참 자연스러운 맥락을 형성해서 속으로 "이야기꾼이다" 싶었습니다. 어느 도시건 지하철 시설이 전시엔 일종의 방공 대피소 구실을 하게 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BBC 영드 <셜록>이 다음 시즌에서 이 장소를 잘 활용해 줄 걸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이 책은, (본디 재밌는 구석이 많긴 한) 영국사(런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를 두고, 단 한 대목도 심드렁하게 넘어가질 않고 활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국사는 본디 정복과 피침으로 인한 격변이 빈번했고, 역사의 주체라 할 nation이 노르만 왕조의 도래 후에야 그 틀이 잡히는 등, 우리에게 익숙한 "민족혼 중심" 같은 개념이 없습니다. 자연히 11세기 이전 역사는 초심자에게 전달하기 대단히 까다로운데, 이 책은 마술처럼 호흡이 매끄럽더군요. 그 이후 과정도 복잡한 정정 혼란기는 대표 인물 하나를 잡아내서 중심을 잡고, 안정기나 발전기는 반대로 시점에 변화를 줘 가며 공정성을 확보하고, 전공자도 아닌 분이 노련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감탄스러웠습니다.

책 말미에는 책 기획과  집필의 초심을 잊지 않으려는 듯, 런던 관광 명소 8곳을 따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국인 토종의 피가 흐르는 저자 그 영혼을 오롯이 뺏고 장악한 그 매혹의 도시, 세계의 한 수도 런던은, 아마 이 두툼한 한 권의 책으로 웬만큼 미련 없이 독자의 마음과 머리에 담아 두고 넘기며 애무하고 음미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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