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부터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 43일간의 묵언으로 얻은 단순한 삶
편석환 지음 / 가디언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전직 광고업 종사자이자, 현직 대학교수의 직분을 지닌 분이라면, 아마 본연의 직무를 원활히 수행하시기 위해서라도 말을 안 하고 지내시기가 힘들 듯합니다. 그런데 저자인 편석환 선생님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이면서도 말을 안 하고 지내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결심에 어떤 배경이 있을지요.

예전 연산군은 "입[口]은 만 가지 화의 근원"이라면서 신하들에게 이를 잊지 않게 글귀를 새긴 패를 차고 다니게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남더러 침묵을 강요하면서 자신은 오히려 발언을 독점하겠다는 전횡의 표방이므로, 우리에게 참고될 바가 전혀 없는 망언입니다. 효과적인 소통의 미덕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이 평가되고 있는 요즘, 소통의 전문가께서 본인 스스로 "묵언(默言)의 수행(修行)을 공언하심은, 말을 안 하고 살 수 없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묵직한 경종을 울리고 자신을 돌아 보게 함에 충분합니다.

이 책은 제목과 책의 실질이 서로 잘 부합합니다. 제목부터가 "나는...."이란 주어로 시작하고, 다른 사람이 아닌 "나(저자)"의 결행과 의지를 내세우고 있는데, 책 내용도 그렇습니다. 말을 아끼시겠다면서 책 내용은 (아무리 좋은 취지라고는 하나) 텍스트로 가득 메워져 있다면, 그것도 어딘가 모순이 낀 구성일 텝니다. 그런데 이 책은, 1) 일단 개인의 결심, 실천을 체크할 수 있게 스케줄러 형식을 띠고 2) 일단 저자 자신이 장장 42일에 걸쳐 결국 한 쾌를 마무리지은 묵언 수행의 개인 log이며, 3) (제목에 잘 어울리게도) 텍스트에 비해 여백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구성, 레이아웃입니다.

임석규 전 한겨레 논설위원님은 "(저자) 편 교수는 여백이 많은 사람"이라 평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여백이란, 진득한 질감에다 사후(事後) 실행을 담보할 수 있는 말만을 입에 담은 후, 정신의 여력은 신중함과 진지한 고민의 자리에 배정하겠다는 의지를, 과언(寡言)으로 외부에 표방하는 태도를 일컬음 아닐까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 "그 사람 거, 말은 아끼지만 믿음직한 사람."과 동의어죠.

p24에서 잠시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봤다.
헐, 휴지가 없다.

여기까지만 보면 누구나 일상에서 한 번은 체험해 봤을 경험입니다. 차를 몰고 가다 갑자기 배에 급한 신호가 올 때, 요즘은 가까운 전철역으로 서두르면 큰 걱정은 없습니다. 화장실이 근처 상가 건물에 하나 열려 있기만 해도 사실 안심입니다. 휴지 걱정은 그 다음이죠. 그런데 편 교수님의 그 다음 말씀이...

묵언 중이니 누구를 (소리 내어) 부를 수도 없다.
막막하다.

입니다. 화장실에서 볼 일 보고 휴지가 없음을 뒤늦게 발견함도 (남 일이라면) 우스운데, 지금 본인만의 특수한 다짐, 계획이란 조건 때문에 더 난감한 상황(약속을 지키기 위해 말을 못 함)에 빠진다면, 이야말로 (죄송하지만) 보는 입장에서 배꼽을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편 저자님의 마무리는,

(그러나) 나는 묵언 중이다.

로 이뤄집니다. (괄호 안의 말은 서평자인 저의 해석을 반영하기 위해 임의로 넣었습니다) 여튼, 현실의 난감함이 두 번 세 번 편의를 가로막고 (누가 보기라도 할 때)희극적인 장면이 펼쳐져도, 나는 나의 묵언계를 지키고 말겠다는, 그 진지함과 절박함을, 극히 짧은 몇 마디 안에 표현하는 서술입니다. 정신 내부의 치열한 갈등과 충돌을 묵묵히 치러 내고 그 잔해를 소화할망정, 바깥 세상을 향해서는 차분하고 동요 없는 자세를 유지하겠다는, 묵언 수행자의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왜 묵언인가? p140에 나오는 30일째의 기록을 보십시오. "이렇게 오래 할 줄 모몰랐다." "내가 말할 기회만 상대와의 대화에서 노리고 있으면, 그 사람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 상대에게도 내 말 중 (그가) 진짜 듣고 싶은 건 많지 않다." 결국 우리 삶에서 이뤄지는 많은 사회적 "소통" 중, 상당수는 공해이자 민폐, 더 지독한 표현을 쓰자면 "쓰레기"란 겁니다. 말이 말을 낳고, 연쇄 순환 고리를 이어가면 갈수록 본의는 곡해되고 충돌은 격화되니, 아예 입을 닫고 상대의 진의, 혹은 나의 참 모습을 캐고 들어가는 게 더 나은 합의 아닌가, 책을 여기까지 읽고 저는 이런 생각도 해 봤습니다.

물론 이런 거창한 각성에서만, 장장 42일 간의 묵언 실천이 이어졌다면 오히려 범속한 우리 독자들의 기를 죽이기나 할 뿐입니다. 교수님으로서는 그보다는, 병원을 방문하여 받은 검진 결과가 "성대 종양 발견"이라는, 심각하긴 하나 개인 신상, 건강에 더 밀접 연관된 동기가 작용했을 뿐이었습니다. 일단은 말이죠. "어쨌든 말로 먹고 살아야 할 처지에" 걱정이 덜컥 앞섰다는 고백은 솔직해서 독자의 동조를 쉬이 부릅니다.

수미쌍관의 형식미를 추구함인지, 에필로그 역시 소박하고 털털한 고백이십니다. "묵언을 계속하고 싶은데" "먹고는 살아야 해서" 개강과 더불어 긴 장정을 일단은 멈추었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을 말을 건네고 싶었다"는 첨언이 다음 페이지에 이어지고요. 몸에 군살과 독소가 가득할 때, 단식과 디톡스 요법으로, 일단의 몸의 잉여 요소를 털어 내듯, 말을 일절 멈춘다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 말이 자신을 속이고 타인을 모해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나라는 정거에서부터 끊어 내겠다는 결심, 그리고 그 작은 결실이 가져 온 뿌듯함이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소극적이라고 비판, 적극적으로 행동하면 이번에는 나댄다고 험담" 과연 세상은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난맥상입니다. 42일 간의 수행 동안(그 동기가 자의였건 타의였건 무관하게), 저자는 많은 상념과 각성, 그리고 영혼의 정화를 체험했습니다. 짧지만 길고, 비어 있으나 속이 꽉찬 그 기록을 통해, 나의 말은 어떤 실속과 보람을 품었는지 반성할 일입니다. 아울러, 여백이 비교적 많은 이 책의 페이지에다, 언젠가 적당한 시간을 끌어서, 나 자신의 묵언 수행 여정을 겹쳐 써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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