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언제나 남쪽이었다
이종화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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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스럽게 날마다 철마다 방향을 바꾸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그를 맞는 사람의 마음이 변덕스러운 것일 뿐, 바람은 일관되이 남으로 불고 있었다..... 시인의 깊은 시심을 정확히 알 요량은 없으나, 이 시집을 다 읽고 난 독자의 소회는 그런 쪽으로 정리되는 느낌입니다. 시집은 총 4부로 짜여져 있는데, 시상이 아닌 시적 화자의 어조에서 제가 주관적으로 받은 인상만으로, 좀 억지스럽게 끼워 맞추자면 춘-하-추-동 의 구성처럼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각 부의 초반에는, 반드시 "겨울"을 언급하는 시 한 편이 꼭 낍니다. 이울어가는 인생의 열기 그 자취를 석양의 낙조를 받아 조용히 바라보며, 지난 봄, 지난 여름, 그리고 멀지 않은 기억의 막 지난 가을을 돌이키며, 생의 고비에서 불었던 바람은 과연 어떤 지향을 품고 있었는지, 시인은 차분히 반추하고 환기합니다.

제목의 연원이 된 시는 책 맨처음에 실린 <남풍>입니다. "귀뚜라미 소리(가 나는 곳)도, (무상히 바뀌는 얼굴,) 얼굴이 (결국은) 향하던 곳도 남쪽이었다." 북반구에 사는 우리들은 언제나, 북풍의 사나운 손매가 우리 살결을 엘 재간이 없는 훈훈한 낙원을 "남쪽"과 동일시합니다. 임금의 지위를 "남면하는 자리"라고 대유하는 관습에서도 그러나 알 수 있듯, 일상의 팍팍함에 치어 살아가는 우리네들은, 한가로이, 사치스럽게, 남쪽만 해바라기하는 자세를 그나마 금기시하며, 남방을 희구하는 마음가짐에서 은연 죄의식마저 느낍니다(혹은 그렇게 사회화됩니다). 알고 보면 인생의 정직한 눈뜸이 사물의 본질을 직시하는 순간, 물리학의 이치가 그러하듯 내가 서 있는 이 지점이 우주의 중심이요, 적어도 나 아닌 누구에게는 내 지금 선 자리가 곧 남쪽입니다. 어디가 남쪽인지를 애써 찾으려 할 게 아니라, 그저 바람이 절로 가르쳐 주는 방향이 곧 진실의 근원임을, 얼마나 더 헛된 세월을 보내야 우리는 깨닫게 되는 걸까요.

호떡은 본디 우리 겨레가 즐기던 간식이 아니라, 삭풍이 계절에 따라 매섭게 몰아치는 북중국에서, 고칼로리를 제공받으며 간단한 레시피와 구하기 쉬운 재료로 즐길수 있게 태어난 먹거리입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한국 골목 노점의 명물 중 하나가 되었고, 이국적 음식이라며 맛나게 먹어 보는 벽안의 이방인들도 특정 거리에 가면 어렵지 않게 구경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 조용하고 정적인 풍경에서, 민첩히 움직이며 시각적 정적(靜寂)을 깨는, "귀화한 지 오래된" 고양이 한 마리를 주목합니다(<북촌>). 호떡이나 보이차나 고양이나, 너무도 익숙해서 우리 것인 줄로만 착각해도, 사실 좁은 반도에 오래 전 흘러들어온 "귀화자 출신"들이죠. "저문 역사의 홍등가에 일렁이는 무통의 경련"은, 나와 나 아닌 것의 가름을 애써 고집하는 일체의 몸부림도, 공연한 허공에의 손짓이 주는 무해의 피로와 인식의 혼란만을 야기할 뿐이라는 시적 화자의 고백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내가 본 자도 없고, 나를 본 자도 없다." 제법무아의 경지를 법열 속에 노래하는 듯한  이 말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칼 가는 이"의 입에서 나오고 있습니다(<칼 가는 자의 노래>). 그는 그저 칼을 가는 게 아니라, 삶을 가는[摩] 사람이며, 삶을 가는 방식은 "꿈에서 별빛을 잘라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꿈도 탁한 바탕이 고갱이를 휩싸고 있을 수 있고, 꿈이 꿈 그대로의 원재료로는 쓸모가 없을 터입니다. 광석에서 펄펄 끓는 물로 핵심만 추려 제련을 하듯, 원석에서 용케 별빛만 솎아 아름답게 벼리고 강철같이 다듬는 작업이야말로, 어지러운 세상을 보다 많은 이들이 살만한 곳으로 가꾸는보람된 장인의 이바지이겠습니다.

아기새가 첫 비행을 하는 날은 그저 설렘으로만 가득한 소풍이 아닙니다. 아직 서투르고 못미더운 날갯짓 말고는 세상에 보여 줄 게 없는 그는, "뼛속까지 비워야만(<아기 새>)" 처 푸른 하늘을 날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띄우는 그는 무엇을 위해서 그토록 위험한 여정을 감행하는 걸까요? 답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내 삶을 인증받기 위해서" 누구로부터요? 어디서나 피할 방법 없이 나를 가로막고 갈구며 과업을 독촉하는 상사(<상사 죽이기>)? 반 백제 반 신라 사투리를 요란히 섞어가며 제 나름의 진실을 설파하는 술자리의 노가다 십장(<노가다 십장 1, 2, 3>)? 아니면 오늘 저녁도 들녘에서 흐트러진 마음을 주워 담는 아가씨들(<사마르칸드 가는 길>)?. 그 모든 것이, 태몽처럼 길하고 설레게 다가왔다가, 겨울이면 딸내미 용돈 달라는 소리처럼 범상하게 울리며 언젠가는 멀어질 것들에 불과합니다. 유치한 겸손, 미화된 침묵을 멀리하고, 오늘만큼 부질없을 내일에도 남쪽을 바라며 바람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아득한 의식의 근원만이, 그 질문에 답을 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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