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 생각은 반드시 답을 찾는다 인플루엔셜 대가의 지혜 시리즈
조훈현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날 조훈현 국수는 단지 바둑이라는 스포츠, 기예(技藝)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고 빛낸 그랜드마스터일 뿐 아니라, 일종의 문화 아이콘의 위치까지 겸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일본에서야 당연 프로 바둑기사분들에 대한 존중과 경의, 인기가 상당하지만, 한국도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바둑의 저변 확대라면, 비록 내기 바둑 싸움 바둑이란 평을 들을망정, 동네꼬마(어려서부터 할아버지들한테 바둑과 한자를 같이 배운 세대[世代]가 제법 두텁습니다. 요즘은 아니지만)에서 노인들까지, 집에 바둑판 하나 쯤 비치하고 소일하지 않는 세대[世帶]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바둑의 인기가 높았던 나라에서, 4천만 중 최고수인 분이라면, 그 사람은 국민적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죠. "정치 9단" 같은 유행어에서도 알 수 있듯, 바둑 용어는 시사나 일상에까지 퍼져 나가, "꽃놀이패"니 "신산"이니 "반 집 승부"니 하는 말이 누구 입에도 자연스럽게 오르내렸습니다.

 

이 책 말미에서도 저자 조 국수께서 지적하고 계시지만, 현재 한국의 바둑 인기는 아마 조선 시대 이래 최저라 할 만큼, 저변도 얕아지고 전문인 양성의 질적 수준도 저하되는(학원 등에서 뻔하고 모범적인 수만 가르침) 등, 뜻있는 이들 사이에서 우려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유는 잘 알 수 없으나, 책에서 조 국수께서도 날카롭게 짚으신 것처럼, 마치 일본이 바둑세가 크게 주춤하며 하락일로를 걸을 때 국가경제도 침체에 빠져 들고 국운(國運)도 쇠락한 것처럼, 우리 한국이 전반적으로 활기를 잃은 나라가 되어 가는 분위기와도 무언가 관계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물론 바둑만 집중 진흥시킨다고 해서 나라 경제가 살아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세계를 향해 웅비할 때, 한국을 대표하는 기사들도 국제 대회에서 놀라운 성적을 거두던 기억을 떠올리면, 현재의 상황에 대해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어떤 스포츠 종목에서 패업을 달성한 명인이라 해서, 그 달인의 인격이나 인품까지 뻬어나다든가, 인생의 사표로서 누구나 우러를 만한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능으로 승승장구한 탓에 타인을 대함에 있어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인다든가, 남과 소통하는 법을 익히지 못해 결국 개인사의 불운에 빠진다든가,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고개를 설레설레 젓게 하는 평판을 얻고 만다든가 하는 경우가 훨씬 흔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둑은, 그 세상을 잘 모르는 우리 일반인이 보아도, 점잖고 품격 있으며 인생사에 대해서도 깊은 도를 깨친 분들이 주도하는 분야가 아닐까 하는, 어떤 막연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 책에서도, 조 국수께서는 "바둑기사 고수들치고 오만한 사람이 없다"며 자신 있게 프로기사들의 인간적으로 성숙한 면모를 내세웁니다. 왜 그런가? 어려서부터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고수들에게 숱하게 깨지고 패배한 체험이, 사람의 정신과 인격을 전보다 한층 키워 주는 자양분 구실을 하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말씀입니다.

 

실제로 조 국수께서는, 책 속에서 이런 가상의 질문을 던진 후, 스스로 답하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절정의 젊음을 누리던 그때의 역량으로, 바둑의 신과 대국하면 이길 수 있을까?" 아마 이 질문은 누군가가 그에게 실제로 던진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대답은 "그럴 자신은 없다."입니다. 만약 무예의 고수가 해당 기능의 신(그런 게 있다고 일단 친 후)과 대적한다면, 제아무리 기량이 빼어나도 몸에 상처가 나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힘을 못 쓰는 게 당연한데, 어찌 불멸불사의 신(神)과 승부를 겨룰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종목이 바둑이라면, 그것은 기책과 지혜, 노련미, 정신력만의 승부(사실 체력도 받쳐 줘야 합니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이창호 9단과 승부를 겨룰 때, 조 국수는 너무도 힘이 들어 누워서 대국을 이어간 일화가 있습니다)이므로, 상대가 신이라고 해도 해 볼 만한 것 아닌가 하는 게 아마 질문자의 의도였을 겁니다.

 

그러나 조 국수의 답은 부정적입니다. 이유는 간단한데요. "설사 9단 고수인 다른 기사들과 붙어도, 승부의 향방이 어디로 튈지는 장담할 수 없다. 내가 수(手)가 높아도 자칫 실수를 하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 아닌 신이 대결 상대라면 말할 필요가...." 역시 그다운, 명쾌하면서도 겸허한 논리입니다. 조 국수는 1999년 고바야시 사토루 9단(이전 세대인 고바야시 고이치 9단과는 당연히 다른 사람입니다)과 승부를 겨룰 때, 포석과 중반까지의 승부에서 패색이 짙었다고 합니다. 모양새와 패턴, 특유의 미학을 중시하는 일본 바둑에서는 "이쯤이면 진 것"으로 보아 돌을 던지는(불계패) 게 보통인데, 조 국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정사정 없이 거친 수를두며 상대를 몰아붙였다고 합니다. 결국 기가 질린 고바야시 9단은 패착을 두었고, 조 국수는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승리를 거두죠. 이때 주위에서(아마도 특히 일본 쪽에서) 품위 없다면서 비난을 많이 했는데, 이에 대해 조 국수가 책에서 적고 있는 바는 단호합니다. "승부는 과정 뿐 아니라, 결과도 중요하다!"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통은 저 말을 뒤집어서 사용하곤 하죠. 그러나, 영원한 승부사 조 국수께서는 생각이 다릅니다. "암만 멋진 승부라고 해도, 결과에서 져 버리면 아무 소용 없다."

 

이 일화를 조 국수는 책에서 제법 앞부분에, 그것도 제법 긴 분량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의외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조 국수라고 하면 그 인생에 있어 숱한 영예와 기쁨, 환희의 이벤트로 시간을 가득 채운 축복받은 스타입니다. 책에서 만약 자랑을 하고 싶으시면,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눈대중으로 보니, 응창기(잉창치)배 제1회 대회에서 녜웨이핑을 꺾은 이야기와, 이 고전 끝에 피로스의 승리를 거둔 1999년의 대국 이야기가, 서로 분량면에서 차이도 별로 안 납니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감지해 보면, 이 고바야시와의 결전을 더 신나게 회고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객관적으로 이무렵의 기량으로는, 사실 고바야시 9단이 더 우위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조 국수는, 애써 화제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꺼냅니다. 우리가 고수의 행적이나 생각에서 무엇을 배울 게 있다면, 바로 이런 진솔한 영혼이 들려 주는, 인생의 척박하고 초라한 순간조차 꺼릴 것 없이 털어놓는 바로 그 태도와 달관의 격조도 빼 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승부의 세계가 얼마나 무상한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더불어 배울 수 있습니다. 과연 이기고 지는 건 병가의 상사(常事)입니다.

 

조 국수는 우리가 타 분야에까지 널리 응용할 수 있는 많은 교훈을 이 책에서 들려 주고 있습니다. 전설의 오청원(우칭위안) 문하에서 배우고, 한때 소속 없이 여러 군대를 떠돌다 한국에 정착한 루이 여성기사가, 이른바 "고바야시 정석" 중 어느 하나에 의문을 가지고 조 국수에게 질문을 했답니다. 조 국수는 비행가 안에서 차민수씨와 상의하다 좋은 묘수를 떠올렸는데, 이를 옆에서 들은 이창호 9단이 며칠 동안 생각한 끝에 그 수를 깰 다른 수를 생각해 냈고, 조 국수는 이를 듣고 그를 격파할 다른 방안을 고안해 냈다는 군요. 이 회고를 마무리하며 조 국수가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창호는 다시 그 수를 깰 궁리를 열심히 짜내고 있을 것이다."

 

조 국수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합니다. 아무리 정제되고 완성된 법칙이라 해도, 그 방법론 하나로 계속 지탱할 수 없으며(만병통치약이라는 게 존재하지 못하는 것처럼), 전략 전술은 지속적으로 개선 개량하지 않으면 고인 물처럼 썩게 마련이라는 거죠. 조 국수는 일본 바둑의 침체를 책 중반에 거론하면서 그 이유를 분석하고 있는데,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잃어버린 10년"의 이치도 결국 같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책 후반부에서 직접 그 지적(일본 경제의 몰락)도 하시더군요. 창의력, 어떤 권위나 틀에도 얽매이길 거부하는 도전 정신은 그래서 중요한 거겠죠.

 

위에 언급한 일화에서 조 국수는 "저 과정에서 창호가 다른 정석 하나를 개발해 내기도 했다"고 하시는데,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수학과 바둑이 참 비슷한 데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수학 역시, 난제 하나를 해결하려고 내로라 하는 천재, 학자들이 다려들어 갖은 수를 다 쓰는데, 설사 본 문제는 못 풀어도 그 과정에서 파생적으로 발견된 법칙, 공식이 매우 많습니다. 조 국수는 책 중에서 "수학에도 수학의 정석이 있듯...."이라며 비유를 쓰는데, 무심결에 나온 비교이겠으나 이 책을 읽고 정말로 수학과 바둑이 닮음꼴임을 독자로서 절실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정해진 방법만 답습하다가 창의력이 퇴화하고 수학에 대한 흥미를 잃는 것도 정말 비슷하죠.

 

그래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정해진 방법론만 이식하려 들지 말고, 아이 스스로 기상천외한 방법을 스스로 떠올리게, 자유와 재량을 주라는 게 조 국수의 제안입니다. 어디 아이를 가르칠 때뿐이겠습니까. 스스로 자기 계발을 도모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좋아서 천변만화하는 요령과 묘수를 깨치는 자의 실력을 누가 감히 이길 수있겠습니까. 세고에 겐사쿠 9단도 조 국수를 내제자로 받아들여 가르칠 때 이런 식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소위 내제자 시스템이 과연 어떻게 이뤄지는 건지 정말 궁금했는데, 야구로 치면 철저한 "자율야구"에 가까운 것이더군요. 세고에 겐사쿠 선생은, 1) 복기를 게을리하지 말라 2) 연구 중인 제자에게 "여기 여기를 잘 생각해 보라"고 툭 던지듯 하곤 자리를 뜨는 게 거의 다였다고 합니다. 일생을 통틀어 단 세 명의 내제자만 받은 바둑의 신(진정 신이라 불릴 만하죠) 세고에 겐사쿠 선생의 지도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방법만으로, 내제자 세 명을 모두 세계 최고수로 키운 건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세고에 겐사쿠 선생의 유명한 일화가 이 책에도 여럿 나옵니다. 내각총리대신(즉 일본 수상)에게 오청원 소년을 일본으로 들여올 것을 부탁하자, 총리는 "그 아이가 일본 명인위를 빼앗아가면 어쩔 생각이오?"라고 물었다 합니다. 세고에의 대답은 "그게 바로 오청원이 이곳 일본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였다 하는군요. 책 뒤에서 저자는 일본 후지쓰배 등 국제 대회가 다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며, 본인방이나 명인전 등을 외국인에도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이 고립에 안주하며 갈라파고스화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의 발로지요. 인생의 스승인 세고에의 본국이자, 자신이 10대 시절을 다 보내다시피한 나라 아니겠습니까.

 

나쁜 환경, 불운에도 좌절을 할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전기로 삼아아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입니다. 일본 수상도 깍듯이 높이고 존숭하는 세고에 9단의 제자, 그것도 내제자라면,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며 한 수 가르침을 청하는 게 상례입니다. 헌데 한국에 들어와 보니, "조군아 일루 와서 짜장면 내기 바둑 한 판!"을 아무렇지도 않게 외치고, 한국말 못 한다며 소외시키고, 난관이 한둘이 아니더랍니다. 그러나 조 국수는 "오히려 계급장 다 떼고 두는 싸움 바둑이라 실전 감각을 기를 수 있어서 좋았다"며 이를 태연히 즐겼습니다. 조 국수는 이 책의 다른 대목에서 모 바둑대회를 거론하며, "아마고 프로고 할 것 없이 참여하여 승부에 이기기만 하면 상금을 가져 가는" 철저히 오픈된 방식을 극구 칭찬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고수 달인은 이처럼 아무 격식도 권위도 따지지 않는가 봅니다.

 

이제 이 책의 제목이자, 최종의 결론을 짚어 봐야겠습니다. 조 국수의 바둑관은 1) 어떤 난제라도 생각을 거듭하면 반드시 답이 나온다 2) 반드시 나의 한 수가 부를 상대의 다른 한 수, 또 그 다음 수를 모두 고려해야만 하는, 입체적 사고라야 한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조 국수는 책에서 말하길, "바둑과 달리 인생사는 궁리를 거듭해도 답이 안 나오곤 한다." 시지만, 이처럼 인생을 다면적으로 고찰하고, 매사에 임하길 열심과 근성으로 승부를 내고자 하는 결의를 다지며, 마음을 비우고 생사에 초탈한 담벡한 기분을 잊지 않고, 창의적이며 자유로운 시야로 문제를 대하면, 인생에 있어서도 최상의 해답에 가까운 바를 생각해 내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 같네요. 영원한 국수 조훈현 선생의 육성으로 듣는 교훈이라 더 실감나게 와 닿았으며, 세고에 선생의 죽음 등 바둑사에 얽힌 여러 비화까지 접할 수 있어 더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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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5-06-18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기하다..
복기하고 있는 사람은.. 순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