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망가
강상준 지음 / 로그프레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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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제목을 처음 접하고 어떤 느낌들 드시던가요? 아직도 "만화"라는 이름에는, 뭔가 그 자체에 하위 문화, 저급 문화라는 (근거 없는) 불편함, 찜찜함, 나아가 죄의식까지 풍기는 게 사실입니다(아닐까요?). "만화"라고 한국식 독음으로 읽으면 그나마 낫습니다. 이걸 일본 원어대로 "망가"라고 읽으면, 이에는 일어 특유의 단모음이 주는 희화성, 본원적 왜색(일어에 왜색이 묻어나는 건 당연할 뿐입니다)까지 겹쳐, 이젠 거의 숭고한 민족주의적 자의식에까지 상처가 입혀지는 듯한 착각마저 끼칩니다. 물론, 다 근거 없는 편견이며, 굴곡 많은 정치, 문화사가 안긴 집단 PTSD의 일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술은 그저 예술로 받아들이면 그만인 것을 말이죠.

 

여튼 "망가"란 명칭에는 뭔가 우스운 아우라를 기본으로 깔고 있는 면이 있습니다(그게 온당하든 아니든 무관하게). 아니, "漫畫"에서 "漫"이란 글자부터가 우습다는 뜻을 가진 한자입니다. 이런 단어 앞에, "위대한"이란 수식어가 붙었으니, 묘한 형용모순이라는 느낌마저 추가로 안깁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 책 띠지에는 "대단히 매혹적인 만화 가이드"라는 자체 규정(선전?) 문구까지 찍혀져 있습니다. 이런 겉인상만 놓고 보면, 꽤나 유쾌하면서도 가벼운 내용 아닐까 지레 독자는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그 유명한 대중 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베스트셀러 <위대한 영화>를 벤치마킹하여(혹은, 제 생각에 "오마쥬하여") 이 책을 구상하고 집필하여 마침내 멋진 한 권으로 출간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벌써 제목부터가 닮은 모습이고, 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예술은 그 태동기부터 대중과 사회의 열띤 호응을 받았고, 문필가나 화가, 사진작가, 그 외 어떤 "고상하고 심각한" 클래스로부터 진지한 접근으로 임해지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반면, 만화는, 오히려 그 원산지(와 인접 소비지)에서의 문화적 맥락을 모르는 저 먼 서양에서나 대접을 받을까, 동아시아 오타쿠(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들이 터잡고 사는 본향에선 합당한 respect를 접수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또 저 에버트의 책이 사실 그리 깊이 있는 내용, 시각을 담고 있지는 않은 대중서라는 점과 대조해서는 더욱, 이 책의 진지한 태도, 품격 있는 문장, 그리고 건전한 지향성이 빛을 발한다 하겠습니다.

 

이 책은 저자의 판단에 의하면 "불후의 명작"이라 여겨져 마땅한 일본 만화의 걸작에 대한 리스팅, 소개, 해제, 평가, 평론을 싣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에버트의 책보다도 오히려 훨씬 격조 놓고 인문적 비평틀을 튼실히 갖춘 글들로 가득합니다. 해서, 독자는 "아니 그 만화들이 그런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단 말?" 같은 각성에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옷매무새를 단정히하며 뭔가 숙연한 마음까지를 들게 만듭니다. 해당 작품을 익히 감상하고 즐긴 마니아들(왠지 "오타쿠"라고 하면 실례인 것 같습니다)에게는 구절구절마다 무릎을 치게 하는 절묘한 진단과 포섭이 있고, 만화 장르를 경시하고 홀대하던 이들에겐 "이 예술 영역에 이런 존엄이 깃들어 있었던가." 같은 겸허의 자세를 갖추게 돕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청출어람이 청어람이라고 에버트의 책보다 낫습니다. 알고 보면 별 미학적 우월성도 지니지 못한 영화가 장르 후광으로 적잖은 버프를 받는다는 점 감안할 때, 이 책은 가난에 찌든 집안을 혼자 힘으로 일으켜 보려는 소년 가장의 대견함까지 갖추었습니다.

 

작품들은 총 32편이 소개되어 있으며, 연재(발표) 시기(일본 현지 원작 기준)는 1980년대부터 21세기 초엽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입니다. 물론 명작 지면만화는 애니메이션 장르로 파생 창작, 변환이 이뤄지고, "망가" 못지 않게 애니 역시 거대한 독자 영역과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 책은 그 제재를 인쇄만화에 한정하여 집필되었다는 점 유의해야겠습니다(그러나 본문 평론 중, 영상물에 대한 언급도 많으며, 오히려 이런 타 장르의 본질, 속성에 대한 새로운 일깨움도 독자에게 많이 제공하는 편이라 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만화 예술이 타 장르가 구현 불가능한 미학적 성과와 위업을 얼마나 많이 이루고 있는지, 새삼 경의를 표하게 될 것입니다. 그를 넘어, 왜 이런 상상력과 통찰은, 아이디어 단계에서나마(즉 아직 작화 단계로 이행 않은 단계에서도), 타 예술, 이를테면 산문 문학에서는 비슷한 발상이라도 찾아 보기가 힘들고, 오로지 망가에서만 이렇게 전위적으로, 또 폭발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끊임 없이 일어났습니다. 복잡한 해답을 구태여 찾을 필요 있을까요? "그건 단지 세상에서 망가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 한 마디로 족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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