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증언
오정은 지음 / 디아망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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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도 "특검"이란 용어는 아주 드물지만은 않게 세인들의 귓전을 울립니다. 통상적인 수사로 진상이 명쾌히 밝혀지지 못하거나 그럴 전망이 농후할 때, 어떤 사회적 압력이나 잇속에도 구애받지 않으리라 기대되는, 법률적 소양을 갖춘 이를 뽑아 그런 "특검"의 직분을 맡깁니다. 성격은 아주 다르지만, 조선 시대에도 그런 경우가 왕왕 있었나 봅니다. 소설에서의 "특검"은,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는 의미의 "이능자"가 그 대상이라는 점,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는 달리 "묘령의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긴 하지만 말입니다. 행동이 민첩하고 무예가 빼어나며, 웬만한 위협적, 파국적 사태가 벌어져도 전혀 심적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이들은 남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선 가장 밑바닥을 건드리는 방향으로 결국 운명의 장난이 몸을 비틀 때, 이들도 어쩔 수 없는 여인이라서인지 왈칵 눈물을 쏟는다든가 하는 모습을 보이긴 합니다. 이런 장면에서, 우리 (현대의 독자들)은 기분 사납게 하는 괴물딱지들로 그녀들을 보지 않고, 특별한 능력을 지녔으되 우리가 얼마든지 공감을 보낼 수 있는, 인간적이고 매혹적인 영혼으로 다루며 마음 한 구석을 열어 줄 수 있습니다.



이능자란 미모가 빼어나다든가, 위에 적은 대로 범죄 수사에 탁월한 면모를 지녔다든가 하는 정도를 넘어, 어느 정도 초자연적인 능력의 보유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판타지의 경계 쪽으로 많이 넘어드는 면을 보입니다. 이런 젊고 아리따운 여성 이능자 뿐 아니라, 평범한 이들이 혀끝으로 빚는 묘사만 듣고서 정확한 용모파기를 붓끝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놀라운 그림 솜씨를 지닌 "신체적으로 눈먼(이게 중요하죠)", 나이 지긋한 남성 화공도 한 사람 나옵니다. 본디 뛰어난 화가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솜씨가 아니라(사실 이것도 보통 재주가 아닌데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면의 진실을 정확히, 자유자재로 표현하여,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소경이나 마찬가지인 우리들에게 선명하고 생생한 선, 면, 색으로 보여 주는 능력이 더 본질적입니다. 미켈란젤로나 루벤스가 그저 기막힌 모사 능력으로 불후의 명성을 얻은 건 아닙니다. 이 역사사의 거장들처럼, 소설 속의 화공도 신화의 테이레시아스처럼 진정한 심안(心眼)을 갖추고 있었기에, 장삼이사가 지껄이는 어설프기 짝이 없을 몇 마디 말로도 사태의 진상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었던 거죠. 이능자란 캐릭터들의 등장에선 차라리 뭐 그러려니 정도의 심드렁한 반응도 나올 수 있습니다만, 이처럼 깊이 있는 성격과 운명의 설정을 접하는 독자로선, 소설 자체의 넉넉한 주제의식, 치열한 고민을, 앞으로 읽어 나가며 기대할 수 있어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그런 기대는 여러 면에서 배반당하지 않고 풍족히 갈증을 채우게 됩니다.

소설 제목에 나오는 "경계"의 의미는, 망자가 이승의 삶을 잃고 나서 죄를 씻는 공간인 연옥, 아니면 림보와도 살짝 비슷하지만, 죄벌의 개념이 없고, 육(肉)과 영(靈)의 중간 지대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죽은 이의 영혼이 완전한 영적 세계에 진입해 버렸다면, 이능자들로서도 그(들)에게 대화를 시도할 수 없습니다. 영화 <엑소시스트 3>에서 킨더만 형사가 범죄 피해자들의 망령을 수수께끼의 기차역(어디로부턴가에서 어딘가에로 떠나는 공간이기에 분명 일종의 "경계"였습니다)에서 만나는 장면과 비슷하고, 그보다 더 대중적으로는 "전설의 고향" 류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원귀, 혼백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되겠습니다. 이능자 특검관들은 여타의 정상인처럼 혼비백산 안절부절 못하는 태도를 노출하지 않고, 태연하게 일상 대화를 그들과 나누며 자기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 필요한 정보를 능숙히 취득한다는 점에서 다만 크게 다를 뿐입니다.



이능 특검관의 존재는 범죄를 전제로 하고, 그 범죄가 소소한 낙오자, 반사회분자, 부적응자 따위에 의해 저질러진대서야 대중들의 이목을 끌기엔 부족합니다. 사회 질서와 안녕을 해치고, 떳떳지 못하게 그 더러운 야욕을 추구하려는 덩치 큰 거물이 전면 혹은 배후에 자리해야 "이거 예삿일이 아니겠구나" 하는 긴장과 전율을 유발할 수 있죠. 배경이 조선시대다 보니, 거물급 악당은 신분적으로 화려한 배경까지를 지녀야 이런 자격을 논할 수 있습니다. 그윽한 풍취를 나긋하게 발산하는 품격 넘치는 봉호와는 달리, 이 소설에서 야망의 크기나 사회적 지위로나 큼직한 비중을 차지하는 악당은 "나이도 많고 자질도 범상치 않으나" 적통인 이복 동생에게 보위 승계에서 밀려야만 했던 서장자 하월군입니다. 방계 왕손도 아니고, 선왕의 직계 혈족이며 한창 왕성한 혈기를 보일 나이이니, 어린 임금과 (생모로 보이는) 대비에게 이처럼 위협적인 존재가 없습니다. 질서와 사회 안정, 누대를 이어온 왕실 법통까지를 수호해야 하는 사법관으로서, 서은우는 그의 음모를 저지해야만 합니다. 헌데, 그녀 역시 여인의 몸인지라, 풍채 좋고 남성적 포부로 가득한 왕자를 보며, 이성으로서 두근거리는 심사를 마냥 억누를 수가 없으니 이게 문제입니다.

이승의 애환과 사연이란, 끝도 없이 펼쳐지는 억겁의 연과 기에 비하면 티끌처럼 가볍고 하루살이의 날갯짓처럼 덧없습니다. 서은우는 경계에서 헤매는 무수한 넋들과 대화를 나눠 보았기에, 인간사 영욕과 오욕칠정의 동요가 얼마나 부질없는지 제 나이에 비해 훨씬 성숙한 인식에 도달해 있습니다. 소설은 "비밀스런 조직과 불온한 사상 간의 운명적 조우, 충돌"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주인공 서은우의 이런 갈등과 마음씀의 미묘한 동선 역시, 독자들의 동조와 안타까움, 그리고 보다 먼 곳으로의 그윽한 눈길줌을 잘 끌어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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