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셰프 -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셰프의 24시간
마이클 기브니 지음, 이화란 옮김 / 처음북스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인간이란 "먹는 존재"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활 수 없습니다. 짐승과 만물의 영장을 가르는 근본적 차이점이 있다면, 의식이나 비가시적 지표 등 막연한 기준들을 일단 제외할 때, 먹을 것을 날것 그대로의 상태로 먹느냐, 아니면 정해진 조리 방식을 거친 후 섭취하느냐 하는 잣대로, 누구의 눈에도 객관적인 판정이 가능한 게 바로 "요리 문화"라는 점은 명백합니다. 프랑스인들이 그처럼 자문화 중심주의에 마음 놓고 빠져들 수 있는 것도,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정교하며 인간 보편의 미각을 효과적으로 공략, 마음을 사로잡게 하는 강력한 무기인, "프랑스식 요리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는 확고한 자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어느 미국인 요리장의 회고담을 이야기의 본 줄기로 삼고, 직업인으로서의 철학을 틈틈이 요약한 에세이집입니다. 요리사라는 직업이 아직 한국에서야 확고한 평판과 존경을 얻은 편은 아니지만, 자라나는 세대는 자신이 자라온 환경에 따라 요리장이란 직업이 얼마나 큰 성취감과 명예를 안겨 줄 수 있는지 충분히 유리한 조건을 가질 수 있기에, 일생을 두고  영위할 기능인으로서 셰프의 삶을 동경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그런 독자가 곁에 놓고 읽으면서, 소중한 꿈을 가꿀 수 있는 좋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비단 요리장이 꿈인 이들만 읽으라는 내용, 기획은 물론 아닙니다. 일류 요리사이자 이처럼 멋진 책 한 권을 써서 세상에 내 놓을 실력이 되는, 미국 유수의 레스토랑에서 굵직굵직한 경력을 두루 거친 저자 마이클 기브니는, 자신이 겪은 다양한 체험을 소재로 하여, "요리장으로서 한 사내가 세상과 소통, 교류, 사랑, 때로는 충돌하는 지점이 어디어디이며, 그가 직업인으로서 큰 성취감을 느끼고, 때로는 패퇴하여 상처를 입는 때가 언제인지", 본분이 이야기꾼 아닌가 싶게 재미있는 말투, 다채롭고 격조 있는 표현으로 독자에게 들려 주고 있습니다. 요리를 안 접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우리가 접하는(사람마다 빈도수에 차이는 있겠으나) 일류 요리가 어떤 과정, 어떤 절차를 통해 "창조"되는지가 궁금했던 이들에게 진진한 흥미를 안겨 줍니다.
꼭 명소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일류 요리가 아니라도 무방합니다. 솜씨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 사람이 그 존엄을 일상에서 가장 쉽게, 자주 확인할 수 있는 절차인 요리의 음미,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장인의 마음가짐이 어떤 모습인지를 엿보는 재미란, 이 가깝고도 먼 영역에 대한 호기심을 잔뜩 충족시킬 수 있게 해 주니 말이죠.

요리라는 인간 정신의 가장 미묘하고 섬세한 부분이 작동하여 빚는 문화행위, 이 비결과 내력, 애환이 모두 담긴 이 책을 읽고 제가 느낀 건, "요리장, 요리사란 직업이 예사 각오, 집념, 스태미너가 아니고선 누가 함부로 넘볼 수가 없는 영역이구나."하는 점이었습니다. 일단 고객으로 누가 찾아올지 모르는 사업 구조(설령 일류 레스토랑, 호텔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상, 비록 정해진 메뉴 안에서 주문을 받는다고는 하나, (일류일수록 당연히 메뉴의 제공 폭이 넓을 것이므로) 그때그때 손님의 요청에 기민히 응해 최상의 맛을 내게, 자신의 마인드세팅을 기민히 해 낸다는 것부터가 보통 일이 아닐 것입니다. 다음으로, 요리란 그 정신의 엄청난 집중과 고강도의 육체 노동이 수반되는 창조 행위란 점입니다. 셋째로, 요리는 그 과정에 대한 존중 감정의 밀도와는 거의 무관하게, 그 결과물에 대해선 잔혹할 정도로 까다로운 심미적 기준이 적용되는 기예의 영역이라는 점입니다. 일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은 소홀하면서, 그 일의 최종 성과를 놓고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이상형만 염두에 둔 "미학자"들이 몰려 와, 인정사정 없는 품평을 해 대는 그런 냉혹한 환경에 노출된 "예술가의 처량한 처지'라면 그건 오로지 이 셰프들뿐이라는 게 저자의 인식입니다.



 


그런가 하면 요리란 전쟁과도 같습니다. 영어에서 captain이란 단어는 이 프랑스어 chef와 조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유효하게 활동할 수 있는 중 가장 액티브한 단위를 이끄는 게 캡틴입니다(우리 한국 직장에서 흔히 팀장이라고 말하는). 순간의 정확한 판단으로, 한정된 시간 자원을 최대한 "영양가 있게" 사용하면서, 마침내 손님의 까다로운 미각을 "자발적으로 굴복하게 할 만한" 매혹, 압도를 이끌어내는 게 셰프라는, 주방의 대대장이 이뤄내야 할 책무입니다. 부(副)주방장을 프랑스어로 수셰프라고 하는데, 이 책에서는 이를 lieutenant라고 표현합니다. lieutenant가 본디 부관이라는 뜻이므로, 셰프와 수셰프의 관계가 captain과 lieutenant의 그것과 일대일대응을 이룸을 아주 잘 보여주는 멋진 명명이자 메타포어죠. 우리 한국어 번역본에는 이를 "중위"라고 옮겼는데, 그러면 일단 일차적 문맥 의미가 잘 안 통한다는 게 단점이겠습니다.

요리장들의 애환도 많습니다. 일류요리장(匠)으로서 익힐 기능을 다 익히고 나면, 제아무리 재주가 좋고 수완이 빼어나 고속 승진을 해도(경쟁이 아주 치열해서 일반 기업 못지 않게 라이벌을 멀리 떨구기 위한 무자비한 레이스가 펼쳐진다는군요. 초심자는 주방의 가장 힘든 직책부터 다 거쳐야 하는, 고된 사다리오르기가 기다리고 있음은 당연하고요. 허드렛일 하는 게 한이 맺혀서 반드시 셰프가 되고 말겠다고 결심한 이가 다 있으니 말 다했죠), 일단 정상에 오르면 그때부턴 내리막길 타는 게 다반사랍니다. 이유는, 고객의 입맛 트렌드가 워낙 빠르게 변해서이고, 나이가 들면 이 변화를 추겨격하는 자체가 너무도 힘들기 때문이죠. 밑에서는 더 기민하게 트렌드를 좇을 수 있는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이에 대해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 그 자체가 고역입니다.

게다가 요리장들의 개성은, 대개 독불장군 타입. 자기만의 개성을 타 취향, 가치와 타협하려 들지 않는 고독한 예술가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대세에 뒤처지지 말라는 위아래의 압력에 부대낀다는 자체가 힘든 노릇일 텝니다. 이 책에 나오는 브루클린 출신 셰프 브라이언의 경우, 키가 2m에 육박하는 거인에 다혈질입니다. 경력도 화려하고 아직 퇴물 취급 받을 나이도 아닙니다. 근데도 보수도 박한 외진 식당에서 고군분투하는 곡절이란, 바로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마음껏 펼치고 싶다는, 작은 보스로서의 포부, 주인되는 삶을 끝까지 유지하고 싶다는 그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닙니다.



 


위, 셰프! 영어로 말하면 yes, sir! 이란 힘찬 응답이 주는 그 느낌과 비슷합니다. 주방에서는 당신이, 군림하는 유일한 지도자이니 그저 분부만 내리십시오!. 혹은 과연 당신이 빚은 솜씨는 세상에 둘도 없는 것이군요! 하는 감탄과 비슷합니다. 요리장은 그 작은 주방이란 공간을, 독특한 질서가 지배하는 소(小) 우주로 탈바꿈시키는 창조주입니다. 이 책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요리장, 셰프의 긍지와 자부에 대해 일반인이 잘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는, 멋진 문학적 풍미까지 겸비한 책이었습니다. 책 말미에 수록된 용어 해설집은, 이 분야에 문외한인 독자가 다른 분야에도 지식을 적용할 수 있게 잘 편집된, 유용한 참고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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