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꿈결 클래식 5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민수 옮김, 남동훈 그림 / 꿈결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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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카프카의 모든 작품이 10대 청소년들에게 필독서로 꼽히는 건 아니지만, 이 <변신>만큼은 어느 권장 목록에서도 예외 없이 그 전체를 빛내는 필수 요소로 꼭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지난 시절 유수의 출판사들에서 찍어낸 세계 문학 전집에도, 이 "변신"뿐 아니라 <성채>, <선고> 등이 끼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내 몸이 벌레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가족들이 내게 베풀어 주던 따듯한 정과 사랑은, 하루아침에 냉대와 멸시, 적대감으로 돌변했다... 너무도 유명한 설정이라, 카프카를 설령 모르는 이라 해도 이 대목만은 반드시 어디애서 한 번은 들어 보았을 겁니다. 사실 카프카의 최초 창작 이후 실로 많은 작가, 예술가 들에 영향을 주어, 21세기를 사는 이라면 어느 다른 문예 영역에서 어떻게 "변신"한 형태로든 저 모티브를 접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책의 표지에는 카프카의 사진이 큼직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 모습 역시, 마치 앤디 워홀이 작품으로 빚어 놓은 그 표정의 마릴린 먼로 얼굴이 하나의 아이콘으로 대중 사이에 확고부동한 자리를 잡았듯, 우리들에게는 (개별 작품은 물론) 작가로서 카프카 본인의 명성보다 더 널리 퍼진, 실로 유례가 드물 정도로 유명한 이미지입니다. 이 책에 실린 <선고>에 나오는, 캐릭터 "아버지"의 한 대사처럼, "그래, 넌 본질적으로 순진한 아이지, 하지만 넌 동시에 악마와도 같은 녀석이었어!"(아니, 이 얼마나 기막힌 형용모순일까요)에서 구현하는 실상의 인물이 존재한다면, 바로 저 사진의 카프카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분명 선하고 티없는 성품을 드러내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뾰족 솟은 귀의 모양은, 정말 악마의 전형적 심상을 부분 대변하고도 있습니다. 볼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보면 볼수록 신기한 "작품적 표상"이 저 사진입니다.


카프카의 소설은 전혀 안 그런 듯하면서도(이야기 자체는 시원시원하고 해학적인 게 많죠) 난해합니다. 과거 일본어 중역 성인본을 읽었을 때에는, 워낙 작품의 형식도 파격적인 데다(이 책에서도 그 점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번역한 문장이 명료하지 못해서, 다가서기 더욱 어려웠습니다. 이 박민수 선생님의 옮김은, 마치 1920년대 한국문학 초기의 단편을 읽는 것처럼, 우리말로 읽어내기에 전혀 장벽이나 어색함이 없는, 자연스러운 문장이라 좋습니다. 한국에서 최고 권위자 중 한 분이시니만큼, 우리 독자는 전적인 신뢰와 함께, 그 번역에 속속들이 용해되고 침투해 있을 "해석"을 영접해도 될 것입니다.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책을 다 읽고 나서 마음이 매우 상쾌해졌다는 그 개인적 느낌에 두고 있습니다. 예전에 카프카를 두고는, 읽고 나면 저는 (감정이 아닌 생리적 반응의 일종으로서)머리가 아파 왔습니다. 카프카의 작품뿐 아니라, (당연히, 다른 사람이 쓴)그의 평전을 읽고서도 마찬가지였죠. 종래의 카프카는 제게 골칫덩이 그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문장의 의미가 명료하게 들어와서, 독자가 텍스트 자체에만 마음 놓고 빠져 들 수 있게 도와 주었습니다. 위대한 문학 작품은, 사실 어떤 언어로 옮겨져도 본연의 의미가(최소한 그 주제의식의 요체만은) 다이렉트로 독자의 의식에 전달이 되어야 정상이라고 봅니다. 게으른 독자가 흔히 즐기는 게 번역의 핑계지만, 번역도 독자를 도울 수 있는 범위까지는 최대한 돕는 게 그 본분일 것입니다.



<변신>. 저는 전에, 어제까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믿음직한 청년 가장에게, 그 쓸모가 완전히 제거되고 혐오감만을 부추기는 외모로 바뀌고 나서, 냉정히 등을 돌리는 가족들의 비정함, 몰인정, 이중인격 등을 비판하며, 인간 본성의 간사함과 잔인함(자기 귀책 전혀 없이 그런 흉측한 운명을 맞은 그레고르는 그들의 혈육입니다)을 풍자하는 소설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산뜻한 번역으로 맞은 <변신>은, 그런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더군요! 이 책을 읽고 제가 처음 받은 충격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일단 시점이, 젊은 외판사원 그레고르 잠자 중심이긴 합니다. 그러나 잠자의 오감을 통해 관측된 바가 독자에게 잘 전달되고 있어, 독자는 그레고르 외에 다른 인물의 심리에 대해서도 세부적 추측이 가능합니다. 결정적으로, 소설 후반부 그레고르가 죽고 난 후에도, 그 "남은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이 "중계가 끊이지 않은 방송 사고처럼" 독자에게 이어져 기록되고 있습니다. 소설의 어조가 그레고르 편향이나 동정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 작품에서, 독자는 그레고르에 지나친 감정 이입을 할 필요가 없고, 그걸 오히려 막는 게 작가의 의도에 가깝더군요. 물론 그레고르는 비난할 구석이 한 점도 없는 착한 인물입니다. 자신의 몸이 벌레로 변한 그날 아침에도, 그레고르는 출근 기차 발차 시각에 늦을 걱정, 출근 후 관계자들에게 뭐라고 해명(변명이 아니라 해명입니다)할지만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재변을 맞이했다면,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을 텐데 말이죠(내 몸이 괴물로 변했는데, 지금 회사나 가족이 문제인가요!). 그레고르는 일상과 생계 활동에 찌든 나머지, 개념 원형적으로 "돈 벌어 오는 기계"로 이미 오래 전부터 바뀌어 있었던 겁니다. 물론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이 집에서 아무도 경제 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그의 세 식구(양친, 누이)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며, 그 다음이 각박한 사회 풍조입니다만, 일단 이건 논외입니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바뀐 후에도 의식은 여전히 사람의 그것이기에, 직립 자세를 시도하니 하반신이 찌르는 듯 아파 왔다. 다리를 접으려 하니(두뇌의 명령) 오히려 펴졌고(신체의 반응), 다리를 바라보니 저렇게 가느다란 것으로 어떻게 몸을 지탱할지 걱정이 밀려 왔다 등, 정말 벌레로 바뀌어 본 사람이 진술하는 것처럼 실감이 뚝뚝 흐릅니다. 요즘 문학에서야 이런 기교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작품이 쓰여진 게 근 한 세기 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겠죠.

그런데, 그레고르에게도 큰 잘못이 있습니다. 세상에... 그게 뭐냐고요? 벌레로 바뀐 후, 그 벌레로서의 삶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는 인간으로서 존재규정이 이뤄졌던 과거에만 집착하고, 새로운 현실을 외면한 채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려 들었습니다. 그레고르의 운명이 급변한 최대의 실수가 뭘까요?(물론 그 실수를 하든 안 하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겠으나) 제 방에서 기어나와 여동생의 연주회(?)에 참석하려 든 겁니다. "나는 인간이다. 이런 음악을 즐기고 감상할 수 있는 자가 벌레일 수 있겠는가?" 진짜 인간이었다면(이미 부질없는 희망입니다만) 자신의 행동이 몰고 올 파장을 생각해서 자제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모습을 하숙인(한때나마 실적이 좋았던 시절의 잔재로, 그레고르의 집은 중류층의 거소치곤 큰 편입니다. 그래서 그레고르가 실직을 한 후, 식구들은 하숙을 치기로 결정했죠)들에게 드러내어 상황을 재앙으로 만들었으니.....



그레고르가 가장 사랑했던 혈육은 누이동생이었습니다. 그리 넉넉지 않은 형편(최근 외판원으로서의 실적 감소, 기본적으로 지고 있는 빚) 때문에 부모님이 반대할 게 거의 분명하지만, 그는 자신의 평소 성격과는 정반대로, 따로 날을 잡아 동생을 음악 학교에 진학시키겠다는 확정적 결의를 발표할 작정이었습니다. 이 점을 동생도 알기에, 오빠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고, 적어도 벌레로 변한 초기까지는 그러했습니다. 우리 독자는 이 누이동생이 그레고르에 대해 가지는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잘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기(轉機)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누이동생 자신이 취업을 하고나서부터입니다(당장 생계가 곤란하니 달리 방법이 없죠).

특히 이 누이동생은, 자기 일자리를 잡고나서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오빠의 방을 청소하되, 벌레가 서식하는 장소에 어울릴 만큼만 청소하고, 사람이었을 시절 쓰던 가구를 방에서 다 들어내자고 합니다(그래야 벌레답게 마구 돌아다닐 수 있으니). 엄마가 대청소를 하러 오빠 방에 들어가면, 막 울면서 말리기까지 하는데, 이게 오빠 모습을 보고 놀란 엄마가 충격으로 돌아가실까봐 걱정이 되어서만은 아닙니다. 사회 생활을 해 보니, 어느 존재든 그 생존(이 생존을 두고, 후에 사르트르는 "실존"으로 의미의 격상을 이룬 겁니다)에 어울리는 의식이 따로 존재한다는 거죠. 사람은 사람으로서, 벌레는 벌레로서. 우리도 저 벌레("변신"은 불가역입니다)에게 가져야 할 태도가 어느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이 딸은 어머니에게 가르쳐 주려 했던 것입니다.



하숙인들 앞에서 사고를 친 후, 누이동생은 어머니에게 절규합니다. "저건 이제 나의 오빠, 그리고 엄마 아들이 아니에요. 저건 그냥 벌레라구요! 인간이라면 배려하는 마음에서라도 이렇게 우리를 곤경에 몰아넣을 수 있겠어요?" 그레고르는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었고, 그의 식구들은 그 점 때문에 그를 벌레로 단죄합니다. 묘한 모순이나, 이 행동의 책임은 그레고르가 다 지게 됩니다. "존재, 본질보다 실존이 우선한다"는 명제는 여기서 확인됩니다. 그레고르의 죄는? 엄연한 실존을 부인하고 자신이 인간이라는(이었다는) 허위의식을 앞세운 죄입니다.

누이동생은 계속 비탄에 젖어 오빠를 봉양하고, "내가 음악가가 될 수도 있었는데..."라며 현실을 한 치도 직시하지 않으려는 고집을 부리며 퇴행에 머물 수도 있었을 겁니다(아주 고집이 센 성격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현실을 긍인하고, 사환 비슷한 자리나마 직장을 잡아 사회에서 단 몇 푼이라도 돈을 버는 쪽을 택합니다(엄청 하숙인들이 지루해했다는 걸로 봐서 설사 진학을 했더라도 이미 나이가 늦었을 뿐 아니라 재능 부족 탓에 연주인으로서 큰 성공을 못했을 가능성이 크죠).

아버지의 모습도 눈여겨 봐야 합니다. 그레고르는 그 운명의 저녁 밖으로 나와서 자신에게 사과를 던지려는(유명한 장면이죠) 아버지를 보고, "우리 아버지가 저처럼이나 꼿꼿한 자세로 늠름해진 적이 있었나?"는 놀라움에 빠집니다. 그의 부친은 생의 전성기에도 언제나 루저처럼 움츠려든 모습이었는데, 아들의 실직 후 좋은 자리 하나를 잡더니 눈빛이고 태도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그새 되어 있었던 겁니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활력을 무엇으로부턴가 얻은 후 참된 행복과 원기에 가득찬 거죠. 그레고르는 이에 그만 체념하고,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또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아버지가 대단히 영악한 인간이란 점입니다. 그는 어느 사업가에게 큰 돈을 빌리고 변제하지 못해, 채무 이행 대신으로 아들을 그 사업가의 직장에 취업시킨 건데, 급료를 받고 생활비를 쓴 나머지를 모두 빛 청산에 쓰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자기 가족들도 모름) 비상금 조로 저축을 해 놓았던 거죠. 그레고르는 따라서 이 식구들에게 두 가지 점에서 혜택을 준 셈이고, 보통 독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대목이죠.

결론적으로, 그레고르가 변신하기 전에는 가족들이 그레고르 한 사람에만 의존하는 기생충들, 벌레였고, 그레고르의 변신 후 가족들은 "내 앞가림은 내가 건사해야 한다"는 각성으로 비로소 인간이 된 겁니다(대신 그레고르는 벌레로 남음). 한 사람이 희생하고 세 사람이 거듭나게 된 결과랄까요. 보통 이 작품의 줄거리를 두고 그레고르가 골방에서 죽은 후 가족들이 크게 안도하는 걸로 이해되는데, 그 전 이미 일자리를 잡고부터 이 가족들은 "기생 생활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큰 축복을 받은 겁니다. 다만 그레고르의 존재 때문에 그 행복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죠. 그레고르가 죽고 난 후, 이 가족들은 비로소 "왜 자신들이 구원받았는지" 알아차린 겁니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건 마지막으로 고용되어 들어온 파출부입니다. 그녀는 체격이 좋고 배짱 가득하면서도 눈치가 매우 빠른 타입인데, 밑바닥에서 오래 부대끼며 무엇이 생존 비결인지 훤히 터득한 소치입니다. 카프카는 아마, 잠자 씨네  세 식구가 지금처럼 열심히 계속 살면, 언젠가는 이 파출부의 상태에 수렴할 것으로 암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파출부는 벌레 그레고르를 보고도 놀라지 않고,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훤히 파악한 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처합니다. 그레고르의 죽음을 알린 후 고용인 잠자 씨 식구들에게 "제가 그 죽은 찌꺼기를 치웠어요. 잘했죠?"라고 물었을 때, 이 파출부는 실로 놀라운, 몇 수 앞을 내다보는 통찰과 기민성을 발휘한 겁니다. 그러나 하필, 잠자 씨네 세 식구는 그때 하필, 그 의식이 인간으로 잠시 돌아와 있었던 거였거든요. "우리의 해방이 그레고르의 변신 덕"이라는 깨달음만큼,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건 없습니다. 이 순간 그레고르-벌레에 대해선, 언급 자체를 금기시해야 마땅했습니다. 파출부가 마땅히 받아야 할 칭찬을 못 받은 건 이 때문이고요. 이 작품에서 실존의 모범생 파출부는 따라서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카프카는 여기서, 인간이란 벌레나 마찬가지로, 그 의식이나 정신에 아무 존엄도 없이, 날마다 열심히 생체 작용의 명령에 따라 살아갈 뿐인 신세임을 말하는 겁니다. 몸은 비록 벌레이나 인간다운(?) 두려움, 망설임, 죄의식, 당황함 등으로 가득한 그레고르는 벌레 취급을 당하고, 이와는 대조적으로 연민이나 동정 따윈 싹 잊은 채 일상에 충실한 모든 이들은 부지런한 인간으로 존중받습니다. 박 교수님이 후반부 해제에서 억압자/피치자 이대별 구조로 분석하시는 부분은, 상기의 이유로 제 개인적으로는 그에 대해 반대하는 편입니다. 

나머지 단편들은 아주 분량이 짧거나, 너무도 기발한 서사 구조를 갖고 있어서 독자를 놀라게 합니다. <선고>에 대해서는 이 번역본의 명료한 문장 덕에, 한 순간에 어떤 느낌이 오는 바 있었으나(카프카는 법학 박사답게 아주 치밀하고 논리적인 두뇌의 소유자였다는 사실 다시 확인했습니다. 힌트는 곳곳에 숨겨 두고 있더군요. 공정하게도요), 서평이 너무 길어져서 그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이 아이디어는 제가 박사 코스 밟을 때 논문에 쓰려고요). 현대적이면서 작품의 분위기를 잘 전달하는 남동훈님의 컬러 일러스트, 그리고 박 교수님이 직접 그리신 "잠자씨네 저택 평면도"도 다른 번역본에서 볼 수 없는 멋진 소품들이었습니다. 제가 접한 중 "가장 예쁘고 명쾌한 카프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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