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무지개 - 언어학 고종석 선집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고종석 선생님의 언어학자로서의 면모를 잘 살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저자의 정책적 제안, 한때 논란 대상이 되었던 현안에 대한 견해, 지성인으로서 사회에 던지는 주장 등도 포함되어 있지만, 제목이 무색하지 않게 본격 언어학의 토픽과 논제에 대한 저자만의 명쾌한, 그리고 대단히 이지적인 분석이 잔뜩 담겨 있습니다. 훌륭한 글쓰기 선생님이 되기 위해 꼭 언어학을 천착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이 시대를 대표할 만한 문장가이자 비평가인 그의 빼어난 글, 저술, 기사들이 어떤 지적 배경에서 탄생을 할 수 있었는지 독자로서 잘 배울 수 있는 책인 점은 분명했습니다.

 

아름다운 문장이나, 울림이 깊은 경구를, 능숙히 짓고 구사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지만, 자신과 타인이 진술한 바를 메타적으로 분석하고 당부당을 논하거나, 최소한 자신의 뜻하는 바를 오해의 여지까지 최소화하면서 정확히 전달하는 문객들은 정말 보기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잘 쓰려면 이처럼이나 탄탄한 이론적(문장론, 소설 작법론 등을 떠나 언어학에까지 이르는) 베이스가 깔려 있어야 하고, 그 이전에, 평소에 일상을 대하고 개념을 접하는 태도가 이처럼이나 치열하고 면밀해야 하는가에 대해 깊은 각성, 최소한 자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꼭 전문 작가, 저술가라야 그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닙니다. 사무직 종사자라면 우리는 누구나 업무를 처리할 때 글, 글월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 행합니다. 아니, 사무직이 아니라도 무방합니다. 결국 글은 올바르고 정확한 생각의 반영이기에, 글 잘 쓰려면 먼저 그 생각이 건실하고 명징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 어떤 직분에 종사하든, 우리의 삶을 올바르고 건강히 살아 내려면, 생각이 맑고 분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글쓰기 공부는 곧 삶의 건강성과 성실성을 확보하는 과정과도 통합니다.

 

이 책은 최소한 해당 분야의 학부에서 익히 다룰 만한 언어학상의 여러 논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 평소 생각해 볼 만한 기회를 전혀 갖지 않았다면, 아마 이 책의 내용을 따라감에 있어 어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종석 선생의 글쓰기 이론서에 대해 큰 공명을 가질 수 있었던 독자도, 이 책에 이르러서는 그리 독해, 소화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헌데, 역시 평소에 약간만이라도 성실한 고민을 가져 본 이라면, 이 책이 얼마나 경이로운 성취를 달성하고 있는지 감탄하게 될 겁니다. 해당 학문(즉 언어학)을 학부 수준에서 다뤄 본 이라 해도, 그리고 제법 만족할 만한 성과를 체험한 이라 해도, 언어학 자체가 워낙 기술적으로 난해하기 때문에(노엄 촘스키가 괜히 천재라 불리는 게 아니죠), 초급 교과서가 다루는 내용의 완전한 터득도 그리 수월한 단계가 아닙니다. 결코요. 그런데 이 책은, 그 어려운 주제와 기술을 참으로 쉽게 풀어 주고 있습니다. 이해했던(혹은 주관적으로 그리 여겼던) 내용에 대해서도, "거기에 이런 의미까지 담겨 있었던가?" 하는 새로운 깨달음을, 거의 매 페이지마다 저자 고 선생님은 독자에게 안겨 주고 있었습니다.

 

교과서의 지식이 대부분의 학생, 독자들에게, 그저 죽은 텍스트로 머물고 마는 건 결국 내용 이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사 내용의 이해가 십분 이뤄졌다 한들, 자신이 부대끼고 살을 맞대는 현실과 유리되어 지식이 딴 공간에서 따로 놀고 있다면, 그런 지식은 그저 죽은 지식일 뿐 어떤 영혼, 정신에게도 감화를 주지 못할 것입니다. 고 선생님의 이 책은, 익히 알던 지식에 대해서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풍습, 유행, 습벽 등과 밀접히 연관지어 설명, 혹은 논설하는 특유의 치열한 방법론 덕에, 언어학이 언어학을 넘어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과 교감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까지 갖게 해 주었습니다. "~학"이라는 접미사를 다 떼어도 됩니다. 언어, 언어학의 문제가, 바로 참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문제라는 점을, 이 시원시원하고 빈틈 없는 저술은 독자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책은 서문도 깁니다. 우리가 아는 한국어의 정체성, 단일성은 언제 형성되었는가? 또 그 실체적 "단단함"은 과연 어디까지 인정해 줘야 하는가? 우리가 그토록 당연히 여겨 온 "한국어의 유니크함"에 대해, 저자는 그 근본에서부터 의문을 제기합니다. 보통 교과서에 잘 나오는 얘기로, "우리-여기선 영국인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혹은 그 이전의 문헌을 읽을 때, 따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보다 훨씬 이전에 쓰여진, 토스카나 방언으로 된 <신곡>을 읽을 때, 현대 이탈리아인들은 훨씬 적은 수고만을 들일 뿐이다."가 있습니다. 고 선생은 이 서문에서 그와 비슷한 얘길 하십니다. "우리는 신라의 향가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때에는 양주동 선생이 행한 공인된(?) 해석을 통해 공부했다. 허나 그 해석이 과연 유일한 해의인지, 아니면 큰 오류를 드러냈는지는 누구도 확언할 수 없다." 대략 이런 취지로 선생은 예시를 들면서, "저렇게 먼 고대까지 갈 것도 없이, 15세기 국어와 지금의 한국어는 공시적 방언의 관계"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방언도 아닌 별개 외국어의 관계인지도 모르나, "어족의 구획에도 정치적 고려가 끼어들듯, 널리 방언에 포함시켜야 할 범주도 정치적 고려에 따라 경계가 신축되기 마련이다"는 요지로 이야기하십니다.

 

이 이야기를 왜 하시는 걸까요? 물론 이유는 딱히 없습니다. 순수 학문에서 연구 대상이 되는 모든 논제는, 그 자체가 목적이지 다른 무엇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이 아니죠. 그런데, 다른 분도 아닌 고종석 선생이기 때문에, 이런 인트로는 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책 초중반에 나오는, 그리고 대략 10여년 전 큰 반향과 소란(?)을 불렀던, "영어 공용화론"에 대한 논의가 그 현실적합성의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절대적 수호 대상, 지향 가치로서의 "한국어"가 허상에 불과하다면, 현실을 보다 편하고 원활히 살아내기 위한 도구로서의 "영어"를, 법적 공용어로 포함시키고 본격 공교육, 활용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에 훨씬, 심리적 저항이 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논의는 그 자체로도 매우 재미있습니다. "어디까지가 한국어, 한국 문학이고, 어디서부터가 외래성을 띤 순화 대상인가?"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구성원들 간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소득의 획득 경쟁에 있어, 신분 혹은 능력상의 중추적 준별 표지로 작용하는 게 영어 구사 능력입니다. 즉, 공용어로 쓰든 그렇지 않든 이미 영어의 지배력은 한국 사회에 엄연한 현실로 끼어 들어 제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고종석 선생의 이 "언어학 수상록"은, 그 자체로 학문적 흥미를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지금 지성계, 혹은 정책 결정 당국자들 사이에 바로 핫 이슈로 떠오를 민감한 문제에 도화선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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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가 무분별하게(이 역시 막연한 표현입니다. 어디까지가 분별이고 무분별인지, 어떤 통일적 기준이 마련될 수 있겠습니까?) 유입, 유통(통용)되고 있으니, 순화를 해야 한다며 국어원에서도 거의 매일같이 무슨 지침 같은 것을 내어 놓습니다. 다 좋은 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을 수백 년 독일에서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언어학자들, 혹은 운동가들이 내놓고 전개한 바 있습니다. 초기에는 라틴어, 그리스어 흔적의 제거를 부르짖었고, 20세기 초까지 명맥을 이어서는 영어 흔적을 몰아내려는 쪽으로 노력했습니다(이 문장까지, 책에 그대로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 시도 중 어떤 것은 성공했지만, 많은 것은 실패했습니다. 사실 경과야 더 지켜 봐야 할 일이었는데, 20세기가 그 절반을 채 지나기 전 히틀러가 광기의 삽질을 저지르는 바람에, 국제 사회에서 독일이라는 (매우 우수한 저력과 성취를 자기 것으로 했던) 나라는 위신을 거의 상실했고, 국가의 국제정치적 영향력이 땅에 떨어지자 그 언어의 위신도 같은 운명을 맞았습니다. 독일인들 역시 배타적 성향을 버리고, 미국 문화, 제도의 압도적 트렌드 생성력을 거부하지 않은 채, 일상에조차 태연히 영어를 섞어 쓰기에 이르릅니다. 고 선생은 책에서(정확히 말하면 이 책 출간 시점 이전에 타 매체에 기고한 논설에서),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이들이, 독일, 프랑스 신문을 보면, 이 나라 기자들이 영어 섞어 쓰기를 얼마나 즐기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는 신문뿐에서만의 사정이 아닙니다(고 선생이 언론인 출신이므로 맨 먼저 신문에 눈이 가시겠습니다만). 전방위 전영역에서의 현실입니다. "섞어 쓴다"는 의식도 없습니다.

 

독일어는 외국어의 영향을 맹렬히 거부했고, 영어는 그렇지 않아 프랑스어, 스페인어, 그리고 먼 혈족 관계에 놓인 독일어와 같은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을 모두 차별하지 않고 품었습니다. 사용 주체의 정치적 의도가 개입하는 언어는,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실패하여, 결국 자체 생명도 단축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 논의가 왜 민감한 부분이냐면, 영어 배척론(?), 혹은 극성스러운 공용화 반대 입장과, 그와 대립하는 진영의 다툼이, 최소한 10년 전에는 진보 좌파와 자유주의(보수 진영) 간의 대립으로 고스란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잘못 꺼냈다 하면 또 정치 싸움이 되고 마는 겁니다. 새삼 강조할 것도 없이, 고 선생은 진보 진영에서도 대표 주자로 나설 만한 논객입니다. 그가 이 주장을 이렇게 불편하게, 혹은 공을 들여 전개하는 건, 무엇보다 자기 진영(?) 사람들의 몰이해상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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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참 재미있는 논점도 짚고 있습니다. 과거 유럽에서 지식인, 귀족들간의 공용어 노릇을 했던 라틴어는, 마치 동아시아의 한자가 수행한 기능처럼, 신분 간의 장벽을 치고 특권의 표식으로 기능한 "원초적 한계를 지닌 보편어"였습니다. 허나 영어는 어떻습니까? 물론 영어도 여러 층위가 있고, 수평적 관계의 방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어는 풍성한 구어 표현, 권위를 가장하지 않는 일상의 자연스런 모습들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영어 잘하는 사람은 문자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적절한 표현을 척척 끄집어 내어 말로 옮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조선조에서 한문 잘하는 사람이란. 남들이 잘 쓰지 않는 까다로운 말과 어휘를 잘 구사하는 사람이라야 했습니다. 권위와 원칙적으로 유리되었다는 점에서(독일어만 해도 전혀 이렇지 않습니다. 하이데거의 책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영어는 오히려 경계를 허무는 진보의 통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서평 쓰는 제가 제 나름대로 정리하는 거라 저자가 쓰신 본문의 표현과는 차이를 보일 수 있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하지만 큰 뜻에서는 서로 무리 없이 통할 것입니다). 어찌 좌파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못할망정 이를 막고 나설 일이겠습니까? 이건 저도 공부하면서 개인적으로 정말 절감한 부분입니다. 한문은 남들 안 쓰는 말, 알쏭달쏭하거나 심오한 말을 써야 그게 유식한 겁니다. 하지만 영어는, 그저 기발하고 적실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게 영어가, 그 고답적인 한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진화한 흔적입니다.

 

선생은 "영어가 이처럼 독보적 지위로 군림하게 된 건, 영어 vs 프랑스어 라는 단일 전선만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시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책에서도 예를 들듯(저 위에 적었습니다), 독일에서 일어난 소위 "순화 운동"도, 종국에는 영어vs독일어의 뚜렷이 형성된 전선의 예증입니다. 또한 "정치적, 인종적, 민족적 배타성이 정치적으로 개입, 그 영향을 받은 언어는 결국 바른 성장을 하지 못하고 주저앉는다"고 하시나, 그 예로 스페인어를 드심은 비록 자세한 논의 과정은 생략되어 있으나, "단일 국가 내부의 까딸루냐, 바스크 등에서조차 수용되지 못함 → 결국 세계어로서의 기초 발판은커녕 국경 안에서의 공용어 지위도 취약 → 그러나 영어는 포용성 덕에 웨일즈, 스코틀랜드, 식민지에서도 널리 수용됨 → 한 나라를 넘어 세계적으로 수용된 언어" 라는 전제를 깐 결론으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극심한 대립상을 보인 아일랜드(에이레)에서 왜 영어가 확실한 공용어(내지는 모국어)로 자리잡았으며, 정치적 패퇴와 지리멸렬상과는 무관하게 라틴아메리카의 수 억 인구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현실과는 이 설명이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입니다. 선생님의 이 명제는, 오로지 히틀러가 제대로 진로를 망쳐 놓은 "독일어"에만 적용될 것 같습니다.

 

영어 공용화론에 대한 논의만 있는 건 아닙니다. 책 후반부에는 한국어 고유의 특질과 최근의 흥미로운 변화 추이에 대해 자세한 논급이 있습니다. 이중모음 ㅚ 와 ㅙ(심지어는 ㅞ까지)가 이미 변식력을 상실했다는 말씀(그래서 외적과 왜적은 이미 구별이 안 되는 웃지 못할 현실), 서울 방언의 특성은 그 높낮이 없이 밋밋한 어조에 있다는 지적(오히려 독특한 억양을 발전시키는 게 다른 나라 대도회에서의 경향인데도 불구), 부엌은 현실에서 이미 부억이 되어 버렸다는 진단 등은, 언어학에 대해 아무 지식이나 관심이 없는 독자에게도 흥미를 당기게 할 수 있습니다. 책은 여러 시점, 장기간에 걸쳐 발표한 논문, 기고를 모은 것이므로, 완전한 구조적 통일성과 논의의 일관성을 갖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선생의 비판 정신과 학문적 논조가 일관성을 지니고 있기에, 이 책은 한 번에 저술된 기획처럼, 기술적 지식 외에 수미일관한 논리의 힘으로 독자를 매료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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