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다비도프氏
최우근 지음 / 북극곰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제목에 쓰인 "다비도프"는 다 아시다시피 향수 브랜드이고, 이 소설에서도 그 의미로 쓰입니다. 물론 "향수"는, 소설의 맥락에서 더 깊은 함의를 지니고 있지만.



사람의 감각 중 우리가 가장 깊숙히 의존하는 건 뭘까요. 누구나 다 시각, 즉 눈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감각을, 사고의 기반 그 첫째로 평가할 것 같습니다. "눈에 뵈는 게 없나 보다" 같은 말도 있듯, 시각이 원활히 기능하지 못하면 대상에 대한 온당한 판단을 행하는 게, 주체로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내 시각에 문제가 없더라도, 대상이 시각적 상을 내 망막에 맺지 못한다면(혹은, "않는다면"), 그 대상은 우리가 그를 두고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됩니다. 미지의 상태는 곧 경계와 공포의 심리로 전환됩니다. 무엇인가가 "내가 잘 모르는 것"의 범주로 인식될 때,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그 "모르는 것"을 어떻게 인지적으로 정리하고 내 감정을 추스르냐 하는 문제입니다.

지루하고 비루했던 내 인생이, 한순간에 모두의 주목을 받는 스타로 거듭날 수 있었던 그 순간, 내 몸이 갑자기 투명인간으로 바뀌어 버렸다면? 우리의 주인공 "다비도프 씨"는 생애 첫 주연을 맡은 연극 무대에 등장하는 그 순간 겪은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느 날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는 바이런 경처럼 되고 싶었던 그는,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처럼, 친구, 여친, 심지어 부모님에게까지 버림 받는 비참한 존재, 아니 "전보다 더 비참해진 존재"로 전락해 버립니다. 모두의 주목을 받아야 할 순간, 이 시간이 지난 후면 이제 모두가 그를 주목하러 극장 앞에 장사진을 치러 오게 될 그 순간, 그는 "존재감 0"의, 종전보다 더 미미한 투명체가 되어 버린 겁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연극이 아니라 희한한 마술 쇼가 되어버린 이 공연이, 주연이었던 자신을 제외하고 관계자 모두가 해피해진 장기상연 아이템이 되었다고 하네요. 정작 히트 상품을 본의 아니게 만든 그만 소외된 채로 말입니다.



이 코믹한 판타지 소설 속에 전개되는 해프닝은 (당연히)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투명인간"이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어서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투명인간"이라는 게 있다면 현실에서 우리 다비도프 씨처럼 무기력하게 질질 끌려다니고, 소외되고, 공권력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되고, ... 이럴 이유가 전혀 없다는 이유에서죠. 현실에 투명인간이 (이 소설에서처럼 여러 명이 아니라- 중반 넘어가면 다들 나옵니다) 단 한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은 다비도피씨처럼 "적응을 못 해서 낑낑거리는" 한심한 인생을 결코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기막힌 능력이자 행운"을 이용해, 하고 싶은 것은 모두 다 이루고 살 것이며, 조금 더 영리하다면 "투명하지 못한 모든 열등자"들을 자기 지배 아래에 둘 것입니다. 거리에 유리 조각을 뿌려 두는 정도로는 결코 막지 못 할 (H G 웰즈의 소설에서처럼) 막강한 수완은, 투명인간의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권위와 능력의 원천일 테니.

이 소설에서 다비도프씨의 투명성은, "차별과 소외의 주홍 글씨"일 뿐입니다. 안나 씨로 대표되는 이웃(연대 의식 결여, 파편화된 개인주의의 쁘띠 부르조아지 상징)은 사사건건 그의 행동을 백안시하며 "이지 빅팀"으로 삼고, 최 형사로 대변되는 공권력은, 소위 말하는 "유주얼 서스펙트"의 명단 최상위에 그를 올려 놓고 건수만 터지면 그를 소환하여 괴롭힙니다. 박 사장으로 체화한 "자본"은, 어떻게 하든 그를 싼 값에 고용, 그의 노동력을 착취하려 듭니다.  우리 시대의 최말단 호구가 된 "88만원 세대"를 포괄 은유하는 "투명인간"은, 마치 우리가 일상에서 업무 무능자, 현실 도피자를 두고 "저 사람은 투명인간 취급해야 돼"라고 할 때, 그 오명으로서의 "투명인간"이지, 영화 <X-MEN>에서처럼 맥락에 따라 자랑스러워질 수 있는 초능력자 같은 게 결코 아닙니다. 초능력자가 될 수 있으면서도 끝까지 찌질하게 기 죽어 사는 투명인간들이라서, 우리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는 내내 웃음을 참을 수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철저히 "메타포어로서의 투명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정말 재미있게 이어지는 내러티브로 가득가득 줄기가 둘러지며 꼭꼭 대궁이 채워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처럼 느닷 "투명화의 비극"을 겪으려면, 1) 두 번 정도 여친에게 차이거나, 2) 실직해서 거리를 떠돌거나, 3) 버스만 탔다 하면 맨 뒷 좌석 왼쪽 끄트머리만 골라 앉고, 혹시 거기 누가 앉아 있으면 다른 빈 좌석 놔 두고 내내 서서 가는 사람들이 그 1순위라고 하는군요. 앞으로 버스 탈 일이 있으면, 그 자리를 주시하며 혹시 뜻하지 않게 곤경에 처하는 이웃이 없는지 주시할 일입니다. 만약 이 소설이 외국어로 번역되거나 하면, 해당 나라의 국어로 읽는 독자들이 과연 이 비유가 얼마나 빵터지는 유머인지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다비도 프 씨가 최형사에 처음 검거당할 때, 그는 사타구니를 최형사의 "야구글러브 같이 큰 손"에 쥐어 잡힙니다. 최형사 말이, "어, 생각보다 키가 컸군?"입니다. 그 다음  제대로 가늠한 손이 위로 더듬어 올바로 나꿔챈 건, 평소의 버릇처럼 "피의자"의 혁대 버클입니다. 이런 장면은 작가의 예사 위트가 아니고선 지어낼 수 없는 장면이겠습니다. 다비도프 씨는 투명화 직후, 친구들과 모여 앉아 노는 자리에서(친구들은 그저 불행한 교통사고 당한 것처럼 그를 대할 뿐입니다. 어디 가서 뭐 좀 훔쳐 달라느니, 여탕에 가서 몰카 찍어오라는 부탁은 짠 듯이 전혀 안 합니다), "어디서 라디오 틀었냐?""말만 하지 말고 노래도 좀 나오게 해 보지?" 같은 대사도, 진짜 투명인간 친구를 곁에 두어 본 사람이 들려주는 말처럼 "실감"이 나는데, 이게 바로 작가만의 상상력이겠습니다.

투명인간으로서 겪는 해프닝만 나오는 게 아니라, 어떤 점에선 살면서 시트콤을 찍고 있는 21세기 서울 시민들의 황당한 풍속도가 더 비중이 큽니다. 투명한 몸으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흥신소 사무 보조인데(여튼 이 소설에선 그렇답니다), 남편의 불륜을 캐 달라는 어느 주부의 청탁을 받고 일주일을 미행한 결과, 그 남편과 다비도프 씨가 함께 발견한 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아이러니였습니다. 투명인간보다, 그 투명인간을 둘러싼 비투명인(정상인)들의 이야기가 더 재미있을 만큼, 이 소설은 현실의 적나라한 풍자입니다.

향수는 투명인간을 식별하는 신분증과 같습니다(소설에 나오는 표현 그대로입니다). 다른 투명인간들의 눈에도 투명인간이 안 보이니(심지어 자기 몸도 안 보입니다), 개개인 고유의 향수를 배정하여 신원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남의 신원을 사칭, 조작하여 불법한 이익을 취하는 자가 많듯, 향수가 고작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는 유일한 수단이라니 악용의 소지가 얼마나 많겠습니까만, 이 역시 어느 단계까지는 잘 지켜지는 모습도 큰 웃음을 자아냅니다. 우리의 눈을 믿을 수 없는 그 순간, 영혼의 개성을 숨김 없이 드러내는 고유의 "냄새"로 정직한 소통을 이루자는 은근한 메시지는, 마치 쥐스킨트의 <향수>에서 천민 그루누이가 "모두의 냄새 중 가장 좋은 것만 골라 뽑은 냄새"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자못 웅대한 주제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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