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중문화 표류기
김봉석 지음 / 북극곰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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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많은 상품들을 만들어 내는데, 상품은 팔려야만 자기 직분을 다하는 것이죠. 안 팔리는 상품도 팔리게 하는 게 개인을 체제가 평가하는 능력이며, 이 과정에서  시장에는 온갖 불량품이 다 쏟아져 나옵니다. 그 중에는 아이들이 소비하라고 만들어서 파는 것도 있고, 이들 중 어떤 것은 범주적으로 "불량품"이라며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그러면 그런 낙인을 찍는 권위 있는 당국에서 아예 제조, 판매를 금지하면 될 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학교에서의 열렬한 계도에 그치고 맙니다. 학교만 나오면 그런 불량품들의 유혹은 이곳저곳에서 아이들을 유혹하는데, 상품이 갖는 자체의 매력에다, 아이들을 꼬시는 장사치들의 호객은 "여엿한 어른 대접"을 포함하기에, 아이들은 쾌락의 충족+존중감의 취득이라는 두 효과를 누리러 이런 불량품을 열심히, 충성스럽게 소비합니다.



요즘 아이들의 세계는 어떤지 모르지만, 저희 때, 그리고 한두 세대 앞에 속하신 김봉석 선생님 때는 분명히 저랬습니다. 학교 안에서 강요하는 의제된 정의와 도덕, 학교 밖에서 요지경처럼 펼쳐지는 명백한 불의와 타락상 사이에서, 가장 민감한 시절 10대를 보내는 아이들은 갈등과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죠. 이때 이 취약한 소비자를 집중적으로 노리고 들어오는 게 (당시로선 저급하다고 제도권에서 위선적으로 규정했던) 대중문화 상품이었습니다. 대본소 만화, 불법 비디오 대여점, 동시상영관,.. 이런 데 지나치게 빠져 살면서 시간을 낭비한 아이에겐 진학 좌절, 취업 불이익을 거쳐 삼류 인생 진입이라는 빠져 나올 수 없는 어두운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테고, 그렇지 않고 야무지게 학업에 전념하여 좋은 학교 간판을 따면 적절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윤택을 누릴 수 있는 성인으로서의 대접이 보상으로 주어졌겠죠.

이 자전적 에세이를 읽고 알 수 있었던 건, 김봉석 선생님은 "기묘한 주변인"의 스탠스로, 대한민국 그 또래들이 제법 힘들여 넘겨야만 했던 고비나 험로를 지나 온 분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다부진 의욕을 갖고 자신을 부정해 가며 공부를 해야 갈 수 있는 대학(세칭 명문대이며, 책 뒤에 소개된 약력으로는 무려 "고려대"입니다)에 재수라는 시련 한 번 없이 입학하셨고, 그 이후에도 그 또래분들이 평균적으로 거치던 달갑잖은 코스와는 달리, (책 전체를 통해 강조하시듯) 8학기만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기까지 하셨으니, 10대와 20대 내내 설렁설렁, 대충대충, 삐딱삐딱으로 남들에게 보일 태도와 방법으로 사신 분치고는 너무 많은 걸 손쉽게 이뤄내신 셈입니다.



중학교 때 연합고사 커트라인 통과- 고교 진학이 걱정되는 수준의 학업 성취였으나, "그저 고등학교라도 졸업하자"는 생각으로 파고 든 공부 끝에 시험을 치고 보니 너무 높은 점수가 나와서 놀랐고, 고1,. 고2 시절을 다방에서 비디오만 보며 "킬링 타임"에 전념(?)하다, 고3때 바짝 집중한 것만으로 명문대에 입학한 소년. "세상을 이기는 법은 알 것 같은데, 그거 이겨서 뭐하겠느냐"는 회의 때문에 영혼의 방황을 겪던 그는, 그 황금 같은 시간을 저급한 대중 문화의 소비에 모두 투자해 버립니다. 거짓으로 꾸며진 의미와 질서의 독소에 질려 버린 소년은, 아예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자신 내면의 텅빈 공간을 반(反)의미로 채우고 신나게 모독해버리겠다는 결의(?)를 다집니다.

그의 인생은 그가 보고 느끼고 소비하고 소화하고 저장한 컨텐츠의 리스트로 요약가능한 차림표였습니다. 그를 키운 건 십 할, 십일 할이 대중문화였습니다. 이때 무차별로 투입한 자본이, 이후 그를 문화평론가로 먹고 살게 해 준 평생의 자양이 되지 않았을지. 그는 적극적인 반항아도 아니었고, 오히려 이유 없는 루저의식, 언젠가 병들거나 쇠약해져 남들보다 빨리 세상을 등질 것 같다는 공포감에 시달리던 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이 통하는 선배, 친구, 후배 등과의 소통은 언제나 가느다란 끈이라도 유지하는 편이었는데(보통은 그 이상), 그의 말에 따르면 "그 시절에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이유 뿐"이라곤 하나, 역시 그의 "성공"은 이런 인맥의 타산적이지 않은 보존 노력에 힘입은 바 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람 없이는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는 여기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취하는 소재와 정치성향에 그토록 공감하면서도, 표현보다는 "설명(저는 설교라고 말하고 싶던데요)"에 치중하는 스타일은 도무지 감당불가라며 X표시를 치켜 드는 입장에, 독자인 저도 많이 공감이 되었습니다. 섹스 중독, (젊은 시절) 마약 중독을 별 부끄러움 없이 입에 올리는 올리버 스톤은 팬들에게 양가적 감정을 유발하는 작가입니다. 다만 <도어즈>가 그토록 공감을 주었던 건, 약물상용자가 아니면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몇몇 장면이 뿜어대는 진한 감성 때문이었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네요.

김봉석 선생님이 그토록 높이 평가하시는 이장호의 <바보선언>도, 사실 저는 후반의 몇몇 씬은 뭔가 약물 흡입으로만 체험가능한 몽환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였데, 당국과 영화사의 제작 압박으로 일정에 쫓겨 급히 만들어낸 중에 천재 특유의 임프로바이즈가 행해졌음을 보고 그리 감탄을 하셨다니, 시간 있을 때 다시 보고 저도 생각해 보고 싶더군요. 읽으면서 시대상이 느껴지는 대목이 많았는데, "베타 방식(VHS와 기술 표준을 한때 다툰 방식)의 비디오재생"이 무슨 역사책 속이 아니라, 소니의 상품으로 현물 체험이 가능했던 시기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교복자율화"가 이뤄졌다(교복 부활도 아닌 교복 자율화!)는 대목에서 어느 시절 분이신지 새삼 느낌이 오더군요. 물론 광주"사태(당시 명칭)", 박정희의 죽음 등 직접 서술이라 할 대목도 많았습니다만.

자전 에세이라는 느낌이 잘 안 들 만큼, 책은 자신이 어느 시절 소화한 문화 아이템들이 무엇무엇이었고, 그것들의 당시 느낌, 영향, 그리고 지금 수정해서 갖는 인상 등을 상세하면서도 "어려운 말 전혀 없이" 옆집 아저씨가 구수하게 읊어주듯 들려 주고 계십니다. 상처를 입은 조개가 진주를 품듯, 만약 "국민학교" 4학년 때 빈촌(책에 동네 이름이 나오지만 여기 적지 않겠습니다)으로 이사가야만 했던 그런 아픔이 없었으면, 우리는 대중문화평론가 한 사람을 잃고 그저 대기업 어딘가에 유능한 임원 한 사람을 추가시키고 말았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작은 책 한 권 안에 작은 우주가 들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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