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미 그린 달빛 2 - 달무리
윤이수 지음, 김희경 그림 / 열림원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질 나쁜 우두머리 내관 성씨가, 라온을 제대로 골탕먹일 의도로, 궁중에서 찬밥 신세인 박 숙의를 모시는 직분을 맡깁니다. 박 숙의는 임금의 후궁인데(임금은 물론 순조이겠고, 박 숙의 역시 일단은 실존 인물입니다). 정궁 순원왕후의 등쌀 때문에 철저히 소외되고 핍박 받는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이런 분을 모시는 내관이라면 그 역시 피곤하고 위태로운 처지로 덩달아 떨어지기 쉬운데(내명부를 대놓고 모욕할 수는 없으니 그 나인이나 내시가 대신 고생을 하는 건 흔히 보는 일), 라온은 "순진해서인지 성실해서인지" 제 몸 힘든 건 아랑곳않고 박 숙의를 받들고 모셔서 그녀로부터 큰 신임을 얻게 됩니다. 박 숙의 본인이 실권이 없는 처지이니 별 도움이 되진 못합니다만.... 이 과정에서 라온은 특유의 지혜를 발휘해 주위를 놀라게 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직접 읽어 보시면 됩니다.

 

명온공주가 상당히 단순한 사람이라는 건, 1) 연서를 주고받다 자신이 버림 받았다는 마음의 상처, 2) 오빠 이영이 라온에 흑심을 품고 곁에 두려 한다는 질투심으로 혼자 끙끙 앓다가, 이를 눈치챈 이영의 간단한 제스처 하나에 마음이 확 풀어지는 태도만 봐도 우리 독자가 알 수 있습니다. 사람 마음을 그렇게 잘 이해하고 시원시원한 처방을 내려주면서 정작 자신에 얽힌 연사(戀事)를 두고는 해결은커녕 얽힌 실타래를 더욱 꼬이게만 만드는 라온의 행동은 사실 노골적으로 독자를 향해 부리는 애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쯤이야 로설 팬들, 아니 로설 팬 아닌 사람들도 다 아는 상식이죠.

 

이 2권에서는 중반 이전에 청나라 사신과 그 수행자들이 대거 입경하는 이벤트가 마련되어, 그 접대와 외교, 정치적 요구를 둘러싸고 상당히 미묘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효과가 생깁니다. 이 과정에서 성내관, 마내관(마종자) 등은 은근 중국 쪽에 다른 줄을 대려는 낌새까지 보이며 독자에게 이중의 배신감과 분노를 부르는데(反라온, 反민족), 그때마다 그들의 추악한 의도는 세자 이영과 그의 "벗" 김병연의 출현에 의해 번번히 좌절됩니다. 세자 이영은 과연 이 나라의 미래를 한 어깨에 짊어진 재목답게, 유씨 성을 가진 중국 상인 하나가 이번 방문단의 대열에 갑자기 낀 걸 두고 어떤 음모가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지 헤아리는, 나이에 전혀 걸맞지 않은 사려 깊은 면을 드러냅니다.

 

세자에게는 외할아버지가 되는 세도가 김조순과 대면하여, 이영은 경전의 그 유명한 구절 "임금이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를 인용하며 노-소, 보-혁의 미묘한 신경전을 펼치는  모습도 보입니다. 부원군의 세력이 사실상 왕실의 그것을 능가하는 형편임을 강조하면서, 2권 처음에 나온 대로 박숙의에 대한 처우에서 임금(순조)이 그처럼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사정이 다 설명되고도 있습니다. 2권 마지막에서 왕이 주최하는 연회에 청 사신, 조선 대신들이 거의 불참한 채 썰렁한 자리가 연출되는 장면은, 세도 정치 하에서 제 위신을 세울 수 없었던 왕가의 딱한 사정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2권의 최대 재미는, 라온-이영-병연을 축으로 전개되는 삼각 애정관계의 발전이 갈수록 흥미진진해져 간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김병연의 손자이자 이영과는 외사촌 관계가 되는 이조참의 김윤성이 따로 등장하여, 성별도 애매하고 신분도 천한 라온 한 명을 둘러싸고 애정사는 더욱 복잡하게 꼬입니다. 김윤성은 원칙적으로 사대부 출신일 뿐이지만, 지금 이 나라에서 사실상 최고 권력을 독점한 외척 가문의 종손이라는 점에서 "준 왕세자 신분"이라 불러 줘도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묘하게도, 체제의 모순을 혁파하려는 진보 성향은 세자 이영이 대변하고, 김윤성은 그 반대 입장에 선다는 게 독자에게는 볼거리입니다.

 

딱한 건 남장 차림의 라온이 사실 여성임을,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첫눈에 알아챈 이가 김윤성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대단히 섬세하고 자상하며 이지적 인물임에는 분명하다는 거죠. 라온은 1권에서 "여자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 헤아려 주는 남자에게 반할 뿐"이란 말을 하는데, 이런 관점에서라면 이영과 김병연은 여인의 심정을 이해하기는커녕 상대의 성별도 모르는 맹인이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사랑을 얻을 자격이 없습니다. 반면 김윤성은 그녀에게 처음으로 여인의 복식을 해 입히고, 타고난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을 시켜 준 "기사, 챔피언적 존재"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2권에선 무서운 복선이 하나 깔리는데, 여성 앞에서는 가장 젠틀하고 선량한 사람인 척 굴다, 그녀의 시선이 닿지 않는 무대에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본성이 나온다는 겁니다. 이 점을 앞으로 지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2권의 관전 포인트는.... 청에서 사신단에 끼어 온 소양 공주가 조선의 세자 이영에게 반해서 들이대는 장면이라든가, 명온공주하고 신경전을 벌이며 누가 더 예쁜지 판정을 받아 보자는 식의, 원형 신화나 로설 아니면 도저히 구경할 수 없는 오글거리는 에피소드 등이겠습니다. 여기에 코믹한 캐릭터도 많이 등장하여 감초 구실을 해 주는데, 1권에서 "손끝 야무진 내관"으로 아주 별명이 붙어 버린 장내관이 이 2권에서도 터무니없는 착각과 실수로 독자를 많이 웃게 해 줍니다. 세자 이영이 여기에 작정하고 호응하는 모습은 더 큰 폭소를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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