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메이드
아이린 크로닌 지음, 김성희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책 소개에 나와 있는 것처럼, 아일린 크로닌은 작품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는 50대 초반의 여성  현직 작가입니다. 그러나 전 미국에 그녀의 이름을 알린 건 바로 이 자전적 에세이, <머메이드>입니다. 한 다리가 불구인 채 태어났고, 다른 한 다리는 유아기 침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부러졌습니다. 손가락 역시 온전치 못한 합지증을 앓고 있었는데, 이는 의사의 조치로 간신히 바른 모양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는 임산부가 회임기간 중 "탈리도마이드"란 약품을 복용했을 때 공통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증상으로, 1960년대 초 기형아의 대거 출산으로 엄청난 사회 문제가 발생한 적도 있습니다. 다만 아일린의 어머니 조이 크로닌(조이 팽어)은 이 사실(자신이 해당 약품을 섭취)을 부정하는데, 책을 통해서는 분명하게 진위가 드러나진 않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인지부조화를 보이는 것일 수 있고, 조이 크로닌 여사는 여러 이유로 중년에 조울증 증상이 심해져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했으니 진술을 다 믿을 건 못 되는 형편이기도 합니다. 여튼 "태어나고 보니 내 몸은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달랐다"는 충격적 깨달음은, 어린 생명이 건강하고 행복한 성장을 이루는 데에 얼마나 큰 방해가 되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아일린 크로닌은 이 책에서 10대 초반~ 대학생 시절까지의 청춘기를 회상, 토로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 어느어느 시기에 무슨 사건이 있었다 정도는, 작가나 특별한 정신적 능력이 없더라도 대개는 기억하고 삽니다. 이 책의 특이한 점은, 그런 이벤트, 사건, 추억, 악몽 속에 깃든 자신의 "그 당시 느낌"을, 생생하고 창의적인 언어로 적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내가 중학생 때 학업 최우수상을 탔다, 친구와 대판 싸웠다, 선생님께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 같은 건, 언제나 느낌과 함께 기억이 되기 마련이죠.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 동생, 언니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반응이나 소통에 무슨 감정이 느껴졌다, 혹은 12살경 친구들과 동네에서 무슨 놀이를 했고 그때의 느낌이 어떠했다 같은 건, 당시 본인이 적은 "그림일기" 따위를 찾아보지 않고선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보통일 겁니다. 사건은 기억해도, 그에 접착된 "당시의 느낌"은 웬만해서는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이 책은 사전 정보 없이 읽어나갈 때, 다리가 불구이지만 "현재" 그 역경을 딛고 발랄하게, 다른 "정상인"처럼 살아가는 어린 아가씨의 재기 넘치는 미셀러니처럼 착각될 수 있습니다. 물론 엄마가 1960년대에 초에 자신을 낳았다든가, 신시내티 레즈의 조 넉스홀(책에는 "눅스홀"로 적혀 있더군요)이 활약했다든가 하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저자분이 지금은 나이를 꽤 드셨겠구나 하는 추측은 곧 할 수 있습니다.

 

내러티브는 정말 10대 소녀의 조잘거림처럼, 제법 두꺼운 책 분량 내내 경쾌하게 울려 퍼집니다.  이것은 화자가 생의 어느 순간에도, 삶에 대한 낙관과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확증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신체 장애를 생각하면 즐거운 기분도 한순간에 꺼질 수 있을 텐데(어린 소녀임을 감안하면 더욱), 아일린은 때론 자신의 곤경을 농담의 소재로도 삼고, 마치 어른들이 집 밖에 나왔다가 지갑을 잃은 것처럼 일시적인 난처함을 현실로 인정한 후 대책을 찾는 태연함과 침착함을 가지듯, 자신의 장애에 대해 대체로 "쿨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어린 여성이 이 정도 의연함을 보이는 건 실로 대단한 일입니다. 이런 사정은, "어려서부터 죽 익숙해 왔다"는 사정으로 정서적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변수가 결코 아니겠기 때문이죠.

 

아일린 크로닌은 범상치 않은 가문에서 나고 자란 여성입니다. "나의 출생, 나의 존재는 한때 우리 집안에서 입에 올리는 게 금기였다"는 문장에서 다소는 짐작할 수 있듯, 그녀의 가정은 제법 부(富)와 명성을 지역에서 누리는 편이었습니다. 그녀의 조부가 자수성가로 큰 재산을 일군 인사이고, 아버지 역시 괜찮은 수완을 발휘하여 명사로서 행세하는 쪽입니다. 한편 어머니 조이 팽어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집 출신이며, 친부(즉 아일린의 외할아버지)가 알콜 중독과 도박 등의 습벽으로 가출(조이 팽어의 회고에 따르면 "축출")한, 결손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녀(조이 팽어)의 성격이 정상이 아닌 건 유전적 요소보다 이같은 후천적 환경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책에는 아일린 크로닌의 부모가 "독일계, 아일랜드계"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크로닌(아일랜드계)+팽어(독일계)"라는 건지, 아니면 양친 모두 "저먼 아이리쉬"라는 건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책 전체 맥락으로 봐서는 후자인 것 같은데요.

 

조이 팽어 여사가 딸 아일린 앞에서 "너의 외할머니는 교황이 인정한 성자(성녀)란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저 주관적으로 그렇게 평가한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아이다 부르헬 팽어라는 이름은 가톨릭 성인 명단에서 제가 못 찾았기 때문에, 이는 그저 본인의 주장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대단히 아름답기는 하나(솜털 하나도 내가 본받아야 할 혈통의 증거였다, 라는 말까지 딸 입에서 나옵니다), 성격이 정상이 안 되었던 어머니 때문에, 이 대가족은 많은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물론 조울증을 빼면 조이는 착하고 다정하며 순진한 편에 속하는 여성이었습니다. 참고로 아일린의 양친은 아일린 외에도 슬하에 열 명이 넘는 자녀를 둘 정도로 금슬이 좋은 사이로 나옵니다. 1960년대라고는 하나 미국에서 이는 대단히 드문 풍경입니다.

 

아일린과 언니들은 나이 차가 제법 나서, 그녀가 고등학생일 때 이미 언니 브리짓은 결혼도 했습니다. 보통 같은 민족끼리 맺어지는 게 당시의 관습이었을 텐데, 브리짓은 무려(아일린의 표현입니다), 무려, 이탈리아인 남성과 결혼합니다. 책에는 "언니는 점점 다이앤 키튼을 닮아가고 있었다"라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해당 배우가 영화 <대부>에서 앵글로색슨 혈통으로 마피아 가문의 며느리가 된 케이 역을 맡은 걸 두고 꺼낸 비유입니다. 왜 하필 다이앤 키튼인지는 이런 배경 지식이 있어야 그녀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아일린 자신도 첫사랑을 무려 쿠바계 백인인 제임스 카브레라와 어설프게나마 시도합니다. 장애인의 육체적 욕망이 어떻게 외적으로 나타나는지는 이 책 13장의 그 소동 묘사가 잘 보여줍니다. 이런 대목이 이 책의 가장 뚜렷한 매력인 "가감없는 솔직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녀의 정신적 첫사랑은 프랭크 오빠라고 볼 수 있는데, 작품 후반에 나오듯 그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고 말죠. 그녀를 "인어(머메이드)"라고 처음 언급하는 장면에서, 아일린은 "아, 그 탐 행크스가 나오는 영화에서처럼?"이라고 대꾸하는데, 한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대릴 해너 주연의 그 영화입니다. 1960년대 초반 생이니 그녀가 대학생 때 개봉한 영화가 거론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좀 더 나가면 바버라 부시도 이름이 나오는데, 사적인 성장 스토리만 말하는 것 같지만 이처럼 세심하게 그 시대의 특징적 코드를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또래들과 구체적인 시대를 호흡하며 열심히 살아왔다는 걸 은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출판사 책이 대부분 그렇듯 장정이 예쁘고 읽기가 참 편합니다. 역주가 많아서 아일린 크로닌 본인의 개성과 어조가 그대로 살아나는(의역이 최소화한) 체제가 돋보입니다. 의욕이 안 생기고 정신적 슬럼프다 싶을 때 읽어 보면 좋은 자극이 되겠습니다. 한 번에 읽는 것보다 하루에 한 챕터씩 마치면서, 작가가 사실 이 장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생각해 보는 것도 효과적인 독서가 될 것 같습니다. 문장 스타일은 현재 트렌드를 대표할 만큼 감각적이고 쿨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