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나익주 감수 / 와이즈베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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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싸움을 할 때 "말린다, 말려서 졌다"라는 표현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때의 "말리다"는 그저 동사 "말다"의 수동형이 아니라, "남의 수작에 말려들다"를 속되게 일컫는 정도의 의미입니다. 근거와 정당성이 객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쪽이, 반대로 기세 좋고 치밀하게 덫을 놓고 상대를 몰아붙이다 보니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 수동적으로 이리저리 방어만 하다, 초기의 승세를 놓치고 싸움에서 패배했을 때 이런 말을 씁니다. 이런 식으로 싸움에서 이기는 쪽은 정말 기술이 노련하다고 봐야 하는데, 미국에선 조지 W 부시를 두 번이나 당선시킨 선거전문가 칼 로브에게 이런 명성이 자자하다고 하죠.

 

저는 조지 레이코프의 저술을 읽을 때마다, 반 세기 전 혜성처럼 등장해서 세상을 보는 새 시야 하나를 마련해 준 경제학자 케인즈가 떠오르곤 합니다. 정치적 성향은, 흔히 오해되는 것과는 달리 케인즈가 대단히 귀족적 리버럴이었다는 점에서 레이코프와 큰 차이를 보이지만, 세상에서 힘깨나 쓰는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절대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보지 마!"라고 지시하는 데에 정면으로, 최초로, 그리고 가장 명징한 언어를 통해 반박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지적 의미에서의 프로메테우스들"이라고 불려져도 무방합니다.

 

오늘날 체제는 더 이상 억압의 기제를 통해 사고를 통제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달콤하거나 휩쓸리기 편안한 "프레임"하나를 던져 주고, 그 색칠된 렌즈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게 유도합니다. 영어 동사 frame에는, "사람, 대상에게 누명을 씌우거나 왜곡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히틀러가 대중들에게 "반유태주의. 인종주의"를 그저 강요나 폭력에 의해 퍼뜨린 게 아닙니다. 그는 세계사상 최초로 "프레임"을 활용할 줄 알았던 독재자였습니다. 대중은 이 노련한 정치인에 의해, 자발적으로 자기 이해와 복리, 그리고 양심을 포기하며 불의에 봉사하려 들었죠.

 

우리는 보통 눈에 의해 외부 세계를 이해하고, 빛이 망막에 조영하는 대로 세상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매우 다릅니다. 유명한 사이먼스-채브리스 실험에서 잘 입증된 것처럼, 사람은 눈 앞에 고릴라가 지나가도 딴데 정신이 팔려 있으면, 세상에서 그보다 더 두드러질 수 없을 만큼 뚜렷한 존재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시각 기능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사고와 정신이 고릴라를 "당분간 미미한 변수"로 미리 설정해 놓았기에, 오관은 이 대뇌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어 뜬눈으로 거대 객체 포착을 포기하고 만 겁니다. "방금 뭐였지?"도 아니라, "아예 없었음"이 되고 만다는 게 마치 마법 같습니다.

 

칼 로브가 그리 승산 없어 보이던(지적으로나 외견상으로나 앨 고어가 더 매력적이었죠) 선거를 이긴 건 그의 탁월한 프레임 설정 능력 덕이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이번 선거는 사상 최초로 성 (性) 간 선호가 극명히 갈리는 승부다"란 프레임까지 만들어 내어 언론에 흘렸습니다. 아무래도 여성들에게 고어 후보가 더 어필하는 외모(이는 부시 측에게 불리한 요소죠)인 점을 감안해, 남성 레드넥의 질투심을 자극한 겁니다. 나아가 "고어는 여자들이나 찍는 후보!"란 인식을 퍼뜨려, 머릿수에서 앞서는 남성 유권자의 표 결집을 유도했는데, 지금 보면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이런 전법이 2000년 선거 당시에는 먹혔다는 게 정말 신기합니다. 고릴라가 눈에 안 보이게 하는 마법에 다름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프레임"의 위력인데, 그게 프레임인지 뭔지 대중들은 레이코프가 인터넷에서(나중에는 이 책 초판을 비롯한 그의 저술에서) 부지런히 설파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게 아닙니다. "머리"로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머리에 어떤 고정된 틀이 여유공간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머리는 그 프레임이 보고 싶은 대로 사물을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다 복잡한 사회, 정치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프레임 없이는 제대로 정리조차 할 수 없습니다. 노련한 정치인은 바로 이 틈을 파고듭니다. "뭔지 혼란스럽지? 이렇게 봐야 하는 거야!" 이때 미리 설정된 프레임에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교활하게 짜여진 프레임은 결국 원래 뜻한 대로 판국을 몰고 가는 데에 성공합니다. 성공적인 프레임은 설사 논쟁에서 패배해도 설정자를 사이비 순교자로 만들기 때문에, 선동된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에는 결과에서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이기면 이기는 거고, 져도 이기는 겁니다. 이게 프레임의 마력이죠.

 

저는 케인즈나 레이코프 같은 이가 제시한 이런 획기적인 비전을, 저런 사악한 프레임에 대비되는 "고마운 프레임"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어차피 우리 뇌와 감정은 모든 광학 작용을 남김 없이 쓸어담는 방대한 필름 같은 게 아닙니다. 가이드 없이는 어떤 인지도 불가능합니다. 나의 생존, 나의 의지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내가 내 노력으로 타인 아닌 나의 복리에 이바지하게 도와 주는 프레임은, 선하고 고마운 프레임입니다. "깨어 있는 삶"이라고 할 때 그 각성을 도와 주는 삼각대 하나를 마련해 준 이 기념비적 저작에 대한 경탄으로 독서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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