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마개 - 최신 원전 완역본 아르센 뤼팽 전집 5
모리스 르블랑 지음, 바른번역 옮김, 장경현.나혁진 감수 / 코너스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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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의 정체가 작품 처음부터 뚜렷이 제시됩니다. 독자가 신경 써야 할 건 그래서 이 악당이 자신의 힘 그 원천으로 삼는, 우연히 제 손에 넣었댜 할 그 "문서"를 어디에 숨겨 놓았나 하는 점, 그리고 이 무서운 악당과 뤼팽의 승부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후자에 대해선, "어차피 뤼팽이 이길 텐데 그게 뭐가 궁금한가"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텐데, 르블랑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듯 결과만 제외하고 본다면(응?) 그게 그리 또 뻔하게 돌아가지만은 않습니다.

 

악당과의 본 승부 외에, 파생적으로 뤼팽은 자기 부하 둘을 사형 집행으로부터 구해 내는 미션까지 떠안았습니다. 이 점이 평범한(common) 갱단 두목과 뤼팽이 차별화되는 점인데요. 일단 뤼팽은 1) 둘 다 모두 자기 부하라서(이 시리즈는 유독 "수하"라는 표현을 자주 쓰더군요), 이들을 구해 내어야 대외적으로 자기 위신이 살고(이기적인 동기이긴 하나, 본디 폭력조직 두목이 이런 데까지 신경 쓸 정신적 사치를 못 부리죠), 2) 둘 중의 하나는 "죄가 없음"을 알기에 정의의 실현 차원에서 살려 내어야만 하며, 3) 특히 그 하나는 지금 뤼팽이 각별히 끌리는 여성의 아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더 구해내어야 할 이유가 강해지고, 4) 얘들까지 완전히(정 안 되면 둘 중 하나만이라도) 도로 수중에 넣어야 악당과의 승부에서 완승을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진짜 동기는 위의 1)~4) 뭐 다 필요 없고, 5) 오로지 독자 앞에서 잘난 척을 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런 걸 보면 미국에서 조금 뒤의 시기에 출현한 하드보일드 장르가 얼마나 반(反) 낭만주의 기조를 띠고 있는지, 이런 뤼팽 류에 대한 철저한 안티테제로서 출범하지나 않았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이 악당은 작품 안에서 형상화되는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뤼팽과 전지적 화자가 내리는 끊임 없는 평가를 통해 "역대 최고의 악당"으로 명시적 위상을 차지합니다. <813>에 나온 알텐하임이 1) 출신 성분 더 좋고, 2) 납치 등 큰 위험에도 안 빠지는 등뭔가 수완이 더 좋아보이고(조직도 거느림), 3) 외모 더 괜찮고 4) 나이 젊고 5) 머리 뿐 아니라 완력도 제법 쓸 줄 안다는 점 등에서 이 <수정마개>의 악당 도브레크보다 더 나아 보이는데.... 뤼팽의 말에 의하면 알텐하임은 "멍청하고, 두는 수가 뻔하고, 뭔 짓을 해도 자신에게 상대가 안 되는" 하수에 불과합니다. 대신 1) 밑바닥 출신이고, 2) 자칫하다 고문당해 죽을 뻔했고, 원맨 조직으로만 움직이는데다 동료들에게 왕따 신세이며 3) 얼굴에 개X XX으며(스포일러) 4) 대놓고 늙었고 5) 늙어서 힘 못 쓴다는 점에서 영...... 제가 어려서 읽은 책에는 삽화에다 이 사람을 외알 안경, 멋진 외투를 걸친 모습으로 그려 놔서 그 이미지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는데, 본문의 (더 정통성 있는)묘사에 의하면 "머리 숱이 거의 없고, 유인원 같은 야만적 모습"이라고 하는군요.

 

어려서 읽은 책 중, 그저 도둑놈, 강도, 이런 밑바닥 직종(?) 아닌, 버젓한 고위직인 국회의원 신분으로 악역을 맡은 게 이 도브레크가 최초 캐릭터였습니다. 그때부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그저 바람직하고 정의로운 원칙에 의해 돌아가지만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죠. 저는 가니마르 등이 등장하는 단편보다 이 장편을 먼저 읽었는데, 따라서 개인적으로 제가 읽은 최초의 뤼팽 등장작이 바로 이 소설입니다. 작품 후반, 공개처형장 멀리서 날아오는 뤼팽의 탄환에, "감사해요 두목(이 코너스톤 판에는 "대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두대에서 목을 안 날리고 대장 손에 죽게 해 줘서요."라는 대사가, 어린 마음에는 너무도 진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patron이라는 말이, 보슈레이와 질베르에게서 나올 땐 "대장"으로 옮겨졌고, 아실이 말할 때는 "주인님"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보슈레이와 질베르 역시 여태 못 보던, 구체적인 얼굴과 성격을 띤 최초의 부하 캐릭터인데요. 저는 마치 예수의 십자가 양 옆에 묶여 죽어가던 두 도둑, 사형수들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도둑이라는 직업도 같고(?), 둘 다 사형수고, 한 명은 구원을 받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운명도 같으며,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뤼팽이 상당한 능욕을 당한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이렇게 뤼팽을 시종일관 곤경에 몰아넣고, 뤼팽이 두는 수 거의 모두를 사전에 읽어 내어 손을 쓴다는 점에서 도브레크가 여태 없던 놀라운 적수이긴 합니다. 그러나 1) 처음부터 유리한 패를 쥐고 있었고, 2) 구체적으로 큰 그림을 그려가면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행보를 훼방하는 잔머리에만 능하다는 점에서 그리 스케일 있는 악당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이에 비하면 <813>의 알텐하임은 국가 규모의 사기극을 (따로따로)구상한 3인 중 하나라는 점에서 상상력도 풍부하죠. 상상력에서 뤼팽과 맞먹기가 어디 쉽습니까. 상성이 잘 맞는다, 서로 유독 상극인 관계가 따로 있듯, 도브레크는 뤼팽에 특화하여 솜씨를 잘 발휘하는 예외적 케이스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가장 신경 썼어야 할 변수는 뤼팽이라기보다 자신이 협박대상으로 삼은 그 거물들 중 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어떤 행보에 나서는 경우였습니다. 알뷔펙스 후작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그래서 이 작품에 상당한 리얼리티로 기여합니다. 이 <수정마개>는 그래서, 종래의 판타지에서 벗어나 현실감 있는 활극성이 부각된, 전환점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주 어려서 읽은 판본에선, 이 도브레크가 지닌 "명단"이, "연판장"이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프랑스어 원문을 찾아 보니 그저 liste더군요. 이게 왜냐하면 일어판 대부분이 이 "명단"을 "연판장(連版狀)"으로, 의역보다는 일종의 "각색"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판장은 일어이기만 한 건 아니고,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말입니다(물론 강점기 이후에 이식된 어휘일 가능성이 크지만). 여기서 版이라는 형태소는, 우리말이나 중국어에서나 "인쇄"의 뜻으로 쓰이지, 개인 도장을 찍는 경우에 저 말을 사용하지 않죠. 그런 건 오직 일본어에서의 쓰임새 뿐입니다. 개인들이 도장을 이어서(連) 찍었으니(版), 의사와 행동을 통일시키겠다는 대단한 맹세의 증거서류가 이 연판장입니다. 이 정도 서류가 남아 있으면, 꼼짝없이 유죄 증거로 기능하며, 정치생명이 끝장나는 건 물론 한 개인으로서도 재기가 불가능할 만한 신세로 떨어질 것입니다, 과거 김영삼이 청년 국회의원 시절, 자유당 소속 동료들과 함께 사사오입 개헌에 찬의를 표시할 때 이 연판장 형식을 써서, 한때 정치 생명에 문제가 온 적도 있었죠. 이 건은 물론 범죄의 정도에까지 이르진 않습니다만. .

 

그런데... 소설에서 과연 그 문서가 "연판장" 수준에까지 가는 증거인가요? 그저 그 문제의 회사(실제 19세기말에 있었던 파나마 스캔들을 소재로 했다고 누구나 다 지적합니다)의 "사주"가, 회사 공인 용지에다 이름을 죽 적고 자기 서명을 했다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사주 개인의 (죽기 전) 진술일 뿐, 아무 결정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르블랑도 이 점이 마음에 걸렸는지, 뤼팽의 입을 빌려 "그 문서가 그리 큰 중요성을 가지나요?"라고 의문을 표시하게 합니다. 여기에 대해 클라리스의 말은, "그것 말고도 다른 정황 증거-편지라든가-들이 있어서, 다 합치면 도무지 발뺌 못하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저 명단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말을 설명이랍시고 늘어놓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뗀, 어차피 존재가 구린 도브레크가 무슨 폭로를 하든 내버려 두고, 그 문서의 진정성을 다투든지 해서 법률 공방으로 가는 게 훨씬 수월한 대응이었다고 판단됩니다. 일단 명단을 까고 나면, 도브레크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구린 인물이니만치 캐면 뭐가 나와도 나올 것입니다. 그때 가서 협상을 다시 하든지, 아니면 물타기나 맞불을 놓든지 하는 게 훨씬 낫죠.

 

만약에 일어판의 "각색"처럼 그게 연판장이라면, 그러나 이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말 그대로 문서 한 장으로 27인을 "보낼" 수 있는 거죠. 설사 이런 경우라 해도 서명이 위조되었다 문서 자체가 가짜다 등등 별의별 디펜스가 다 나올 수 있는데, 고작 문서 하나 때문에 국가 전체가 존립의 위기에 놓였다는 건 큰 믿음이 안 갑니다. 이런 설정만큼이나 도브레크라는 악당의 위험성 또한 과장된 바 없지 않습니다. 여튼 이 모든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뤼팽이기 때문에 재미있는 멋진 엎치락뒤치락 활극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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