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일이 크다고 할 수도 있고, 뤼팽 특유의, 아니 르블랑 고질의 과대망상 쇼비니즘이 병폐로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지금 폄하하는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저는 취학 전 아동 시절부터 뤼팽의 빠도리였고, 지금도 그 단심(丹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대상을 진정 사랑한다면, 그 단점(短點)에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내가 그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그를 적대자들로부터 요령 있게 효과적으로, 사전에 실드를 쳐 줄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했기에 헤어지"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살갗이 해어지도록 물어뜯는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유치원 다니기도 전에 이 <기암성>을 읽었는데요(어린이판이 아니라 성인용 텍스트로 읽었습니다). 활극도 활극이지만 이 소설의 큰 재미는 그 암호문 풀이에 있다는 점 다 동의하실 겁니다. 그런데 유아 입장에서 설사 스토리의 트위스팅에 기막힌 묘미가 있음을 알았다 해도, 우리 한글과는 제자 용자의 원리가 근본적으로 다른 프랑스어의 암호 풀이에 대해선, 무슨 평가는커녕 대체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간다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커서 프랑스어를 꼭 공부해야지!"란 다짐을 그 어린 나이에 이미 했더랬습니다. 정규 교육 과정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한 적이 없지만, 지금 떠듬떠듬 수준이나마 해독이 가능한 건 이 <기암성>을 읽고 받은 감동이 평생의 내적 동기로 작용한 덕이 큽니다.
홈즈는 여기서 극단적인 찌질이로 나오는데요, 충격인 건 명탐정인 그가, 이 활극의 핵심 뼈대인 "암호 해독"에 거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냥 비열한 인질극으로, 중간 과정 일절 생략하고 뤼팽의 목줄기를 매복 상태에서 물고 늘어지는 게 고작입니다. 어렸을 때는 "이 역시 고수의 수단인가?" 하고 그것도 나름 깊은 의미가 있으려니 여겼는데(심지어, 해협을 건너 온 그가 극이 시작하자마자 뤼팽에 납치되어 무대에 아예 모습을 못 드러내는 것도, <배스커빌 가의 개>에서 그가 극도로 출연을 자제하는 만큼이나 의의가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지금보니 그냥 르블랑이 이 위대한 탐정을 "개" 취급하고 만 거네요. 마치, 어느 여인이 목석 같은 남자에게 순정을 바치려 들었다가 매몰찬 냉대와 거절을 당하자, "내가 저런 따위를 좋아했었다니!" 하고 격분하며 온갖 저주를 퍼붓는, おとり人形나 voodoo effigy를 보는 느낌입니다. "죽어! 죽으라고!"
사실 이 소설에서 핵심 퀘스트로 향하는 관문인 암호풀이는, 그닥 세련된 구조를 지니지도 못합니다. "뤼팽"이라는 그 이름부터를 르블랑이 따온, 뒤팽의 창조주 포우가 쓴 <황금 벌레>에서 등장하는 솜씨가 훨씬 낫습니다. <춤추는 인형의 비밀>에서 "... 영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철자는 e인데.."로 시작하는 그 멋진 논리는 또 어떻습니까. 냉정히 살피면, 이 소설의 암호는 저런 전례에 대면 암호라고 할 것도 못되는 아주 원시적이고 단순한 구조입니다. 단지 그를 둘러싸고 착각에 빠지는 현대인(20세기인)들의 실수가 일을 복잡하게 만들 뿐이죠. 하긴 고대인, 중세인들(그게 누구인지는 스포일러라서 말할 수 없습니다)이 고안해 낸 "매뉴얼"이라고 하니,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게 오히려 모순이기도 하죠.
서구어들은 공통으로, 좁은 지명에서 시작해서 넓은 단위를 뒤에 붙이는 관습을 갖고 있습니다. "뉴욕 뉴욕"에서 앞의 뉴욕이 도시이며 뒤의 것이 "주(州)" 이름입니다. 한편 프랑스어 등 로망스어 계열(그 중에서도 프랑스어가 특히 심합니다만)은, 수식어가 피수식어 뒤에 오는 통사 구조입니다. 따라서 소문자로 쓴 "에기유 크뢰즈 aiguille creuse"는, 불어의 컨벤션에 익숙하면 할수록 "빈 바늘"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creuse는 본디 모습이 creux이며, 이것이 여성명사를 수식하면서 변한 꼴입니다. 이걸 지명 나열로 대뜸 받아들이는 건 오히려 외국인에게 더 그럴 법한 경우의 수입니다. 이지도르 보트를레 정도의 수재라면 이런 역발상에 능할 만도 한데, 현지에 가서야 비로소 감이 왔다는 건 좀 납득이 안 되기도 했습니다. creuse를 단박에 Creuse로 보는 게 그렇게 힘이 들었을까요.
맹자도 천시보다 더 앞서는 게 지리(地利)라고 했습니다. 르블랑의 그럴싸한 변설을 듣고 보니, "노르망디를 쥔 자가 천하를 쥔다!"는 호언이 새로운 역사 법칙으로 자리나 잡는 것 같습니다. 듣고 보니 과연 그런걸요? 샤를마뉴, 롤로, 정복왕 윌리엄, 프랑수아 1세, 앙리 4세를 이어 최후의 적사(適嗣)로 등장한 게 아르센 뤼팽이라니. 이 소설에서 하나 빼어난 건, 전작들의 여러 배경과 사건을 이 장편에서 각각 연계 고리를 가지게 한번 정리해 주고 지나간다는 점입니다. 소위 설정 충돌이 홈즈 시리즈에 비해 적다는 것도 (아직까지는) 뤼팽 프랜차이즈의 장점인데요. 이는 어디까지나 생부(生父)의 애정면에서 두 작가가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rhq<기암성>은 구성상 여러 허술한 점들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재미있는 활극입니다. 냉정히 살피지 않으면 과연 그런 구멍들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지나칠 만큼, 독자를 휘어잡는 스피드와 마력이 엄청나다는 걸 도저히 부인할 수 없습니다. 평면적이라고 비난은 받지만, 우리는 이 현실감 없는, 만화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매혹적 주인공인 뤼팽의 초대를 거절할 수 없습니다. 그와 사랑에 빠진 여성들은 한결같이 위험에 처하거나.... OOOO지만, 흡사 <사막의 여왕>에서 사내들이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녀를 향해 돌아가듯, 이 가공할 마술사의 재주에 독자는 뻔히 알면서도 혼을 팔고 있습니다. 이는 흔한 "옴므 파탈"과는 달리, 뤼팽이야말로 순정에 살고 의리에 죽는 무구의 영혼을 소유한 캐릭터라서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