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데카이
키릴 본피글리올리 지음, 성경준.김동섭 옮김 / 인빅투스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정형적이고 반듯한 세계관을 가진 모범생과는 달리, 위선적이고 타락한 사회에 대해 반항과 배신을 일삼되,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재치와 순발력으로 적수들을 희롱하고 좌절시키는 모습을 보이며, 독자와 팬들을 열광시킵니다. 가상의 세계라곤 하나 일단 그에 정신의 일부를 몰입시킨 청중이 다시 현실로 복귀헸을 때, 통상의 가치관과 생활 감각에 혼선을 빚어서는 안 되기에, 픽션의 주인공은 일단 보편적인 독자가 쉽게, 기꺼이 지지를 보낼 수 있는 유형이라야 합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 속에서 일탈과 규범 파괴를 사소하게나마 저지르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기에,  순진하고 충직하기만 한 성격으로는 전폭적인 공감을 내내 끌어낼 수 없습니다. 반영웅은 이런 점에서, 우리들의 현실 또 다른 모습의 반영이요 포기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아이돌입니다.

 

앵글로색슨 문학에서 정석적인 영웅 못지 않게 인기 있는 타입의 주인공은 바로 "반영웅(反英雄), 안티히어로"입니다. 프랑스어권 문예도 뤼팽이나 비독(실존인물이기도 합니다) 같은 예가 있지만, 이들은 포지션이 범죄자일 뿐 가치관이나 외모 면에서 표준적,  평면적 모범생의 속성을 그대로 유지하거나(뤼팽), 체제에 순응, 편입되는 모습을 보이며 반항아 고유의 매력을 순일하게 보존하지 못합니다. 반면 K. 본피그릴리오리가 창조한 이 모데카이는, 뤼팽과는 정반대로 1) 반기사도적 비열한 스타일에 2) 출생성분은 다소 미심쩍긴 하나 일단 고귀하고(그러나 내력이 뭔가 미심쩍은 것이어서, 예컨대 귀족다운 행동거지를 능숙히 보이지 못해 크램프의 장모에게 바로 대접을 낮추어 받기도 하는 장면이 이 소설에도 나오죠) 3) 자신의 말에 따르면 화려한 과거의 흔적이 살짝 연상될 정도로만 잘생긴 얼굴에, 평균에도 못 미치는 작은 키, 뚱뚱한 체형의 소유자일 뿐입니다. 특히 대중이 열광을 보내려면 외모만큼은 훤칠한 스타일이어야 하는데, 이 모데카이는 그렇지를 못합니다. 다만 과거 군 복무 경력의 산물인 "의외로 빼어난 격투술"이 있어서, 방심하던 상대를 혼내주는 모습을 가끔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의 행동 원칙은 귀족 출신 답지 않게 도덕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오히려 밑바닥 출신들이 어렵사리 사회에 적응하며 자신의 몸에 배게 한, 구질구질한 생존 기법 같은 게 대부분입니다. 자기 출신을 배반하는 격룰과 스타일(외모 포함)이라고 할까요. 대신 시종(이 번역본에서 그런 표현을 썼습니다) 조크 스트랩이 홀딱 반할 만한 재치, 지능, 순발력, 그리고 쿨한(그저 쿨하기만 할 뿐입니다.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없습니다) 세계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랫사람을 마음으로부터 자신에게 반하게 하고 (그들이 흔히 쓰는 표현으로) "대신 총알도 맞을 만한" 각오와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건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닙니다. 조크 스트랩은 머리가 둔하고 오로지 힘만 쓰는 타입이 아니라(진정 괴력의 소유자이긴 하죠), 위기에 닥쳐 비상한 머리를 굴릴 줄 알고, 세상사 어두운 구석을 훤히 꿰뚫는 나름 달인형의 인간입니다. 이런 그가, 완력 면에서 상대도 안 되는 모데카이에게 그처럼 충성을 바치는 건, 자신의 상전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판세를 정확히 읽고, 최종적 위력을 지니는 전략을 짜내는 비상한 전략가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층민 정서를 격하게 감동시키는 "융통성(좋게 말해서)"이 있어, "저 양반은 귀하게 자란 분이 나보다 더한 사람일세!"같은 탄식 반 경탄 반 고백이 나오게 하는 거죠.

 

엄격하고 고상한 인격과 영혼을 가졌던 아버지에게 지리하게 훈육 받은 아들이 흔히 겪는 성장기의 갈등, 그리고 배태한 반감 같은 것이 이런 타입의 "성공적 악한"을 낳았다고도 보입니다. 모데카이는 가만히 보면 쉴새없이, 그리고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유쾌한 영혼이긴 하나, 사실 내면으로부터 행복한 타입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상속자 크램프 3세가 거침 없이 제 부친을 폄하하는 언사를 내뱉을 때, 그는 그 질나쁜 젊은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일부 보기도 하지만, "난 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다"며 이내 선을 긋습니다(그리고선 바로 이자를 제압하는데, 그 날카로운 두뇌회전에 조크는 또다시 감탄하죠). 그는 수시로 자신이 악당임을 자인하며 소위 인지부조화가 초래하는 정신의 타락과 쇠약을 멀리하려 애쓰는 모습도 보입니다("악당도 행동 원칙이 있어야 한다." 등등).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 은근 자유롭게, 그리고 여러 대목에서 프로이트적 패러다임을 갖고 자신과 타인을 분석하는 대목이 많습니다. 모데카이의 직업인 미술품 딜러라는 신분부터가, 프로이트의 고향이기도 한 비엔나적 아우라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설정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때로는 자신들의 치명적 판단 실수와 탐욕 때문에, 정신 없이 위험한 모험에 던져진다는 점에서 모데카이- 조크 듀오는 오백 년 전 스페인의 돈 키호테- 산초 판자 커플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얄미울 만큼 정확한 이해를 하고 있고, 자신을 적대하는 세상을 다 합친 것보다 더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점이 차이이긴 합니다만... 이 소설 p279에 잠시 언급되기도 하는 P G 우드하우스의 작풍, 캐릭터와 유사하다는 평가도 종종 듣는 본피글리올리(이탈리아계 영국인이므로 g를 빼고  "본필리올리"라고 읽는 게 더 바람직합니다)는, 이 소설에서 독자들의 혼을 빼놓는 위트와 풍자, 블랙 유머를 통해, 모데카이라는 캐릭터를 영상화 없이도 완벽하게 독자의 눈 앞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모데카이 역에는 잭 니콜슨(본피글리올리가 활동하던 시절의 그보다 좀 더 젊은 모습- 실제로 동안이라 그렇지 조니 뎁도 지금 적은 나이는 아닙니다)이나, 약간 과거로 돌아간 데이빗 서칫 같은 배우가 잘 어울렸을 것 같지만, 그리 뚱뚱하지는 않고 텍스트 속의 캐릭터에 비해 과분하게 매력적인 조니 뎁이 이번 영화에 캐스팅되었습니다. 소설의 풍미와 개성을 다 살릴 순 없지만, 플롯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미스테리, 사기극, 그리고 첩보물이므로, 영화화가 오히려 늦은 감마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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