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백작부인
레베카 존스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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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북에 그 기록이 올라 있는, 세계 역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마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에르제베트(엘리자베스) 바토리 백작부인입니다. 삼백 년 후에 등장한 하층민 출신 잭 더 리퍼 따위와 나란히 악인의 대명사로 일컬어져 왔고, 현재에도 그 악명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서구권에서는 악녀의 아이콘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한 실존인물인데, 예를 들어 일라이 로스 감독의 <호스텔 2>를 보면, 여대생 로르나를 납치하여 천정에 매달아 놓은 후, 상처에서 떨어지는 피를 욕조에 받아 가며 바로 아래에서 목욕을 하는 변태성욕자(이자 살인자)인 어느 여성 캐릭터가 나옵니다(당연히 이 영화는 현대가 배경이구요). 조금만 변형을 가해 줬어도 좋았을 텐데 너무 전형적인 기믹으로 출연시킨 까닭에,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코믹한 느낌까지 풍기는 장면이고 설정이었습니다.

 

여튼 이 소설은 종래에 완전히 굳었다 할 이런 통념을 뒤집고, 그녀의 진면목이랄까 대안의 해석 비슷한 것을, 작가 레베카 존스의 관점에서 시도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시선에서 언제나 "역사상의 마녀"들이 억울하고 불쌍한 희생양으로 비치는 건 아니더군요. 엉뚱하게도 자신의 비뚤어진 심성 같은 걸 맹목적으로 악녀의 (정당한) 악평에 투사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그저 타인의 미모와 고귀한 출신 성분 따위가 부러워서 별 근거도 없이 매도와 폄하를 일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그런 말을 내뱉을 때는 "정의, 객관"의 이름을 빌리며 절절한 말투의 외관을 덮어쓰니(예를 들면 이 소설에서, 바토리 백작부인에게 추궁당한 후 본인 혹은 죄르지 투르조에게 항의하는 하녀들도, 자신의 잘못과 거짓은 조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제 나름 크게 억울하다는 듯 거짓말을 울며불며 늘어놓죠),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첫인상만으로 오판을 하지 않게 주의할 일이겠습니다. 사회생활 하면서 이런 중상모략은 흔히 겪는 일입니다.

 

아무튼 작가 레베카 존스의 이 최근작 하나로, 그 악명 높은 바토리 부인이 당장 오명을 벗는다든가 복권된다든가 할 가망은 거의 없습니다. 수백 년 동안 흔들림없이 굳은 선입견이라는 게 있고, 사람들은 대개 이성과 근거에 의해 판단하기보다 오래 간직해 온 자신의 느낌과 가치관에 따라 편한 판단을 하는 게 그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바토리 백작 부인에게는 대단히 안된 일이지만, 역사적 자료와 증거 따위가 남은 바로도 그녀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바가 없습니다. 이 소설의 액자처럼 기능하는 "성의 탑루에 감금되어, 아들 팔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에서 드러나듯, 그녀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부지한 채, 상당히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 몇 년이나 더 연명하였습니다. 그녀의 성정이 독한 까닭도 있었겠지만, 처우가 (이 소설에서 드러나듯 추위가 심했다는 점 말고는) 그다지 열악하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겠고, 무엇보다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건 그녀가 너무도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있었던 이유가 큽니다.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녀가 저지른 죄과는 모조리 그녀의 하인, 하녀들이 받았습니다. 이 소설에는 일로너 요, 도로처 센데시 정도만 큰 존재감으로 부각되지만, 실제 재판 기록에는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하인, 하녀들이 그녀의 잔혹행위에 관여했다고 합니다.

 

이 시대 역사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서양 독자라면, 아마 개중에 "이것은 역사 왜곡이다!"라며 분노를 표시하는 이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근거가 딱히 있어서라기보다, 자신의 선입견에 묘하게 침투된 신조 한 자락에 어긋나는 바가 있으면, 대개 평범한 사람들은 "윤리적 거부감(본인은 이를 두고 "정의감"이라고 인지합니다)"을 느끼기 마련이죠. 하지만 바토리 백작 부인에 대해 별반 아는 바 없는 한국의 독자들은, 이 재미있게 쓰여진 소설을 읽고 신나게 주인공에 공감하면서 1부까지 읽어나가다, 2부 중반 남편 페렌츠의 죽음 이후로 급전직하하는 그녀의 운명을 보고 격하게 안타까워할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녀를 마녀, 살인마로 몰았던 당대인과, 사태의 진상도 모른 채 남 따라 증오를 퍼붓는 대중들에 대고, 한심하다며 혀를 끌끌 찰 것 같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여인은 흔히 남들의 질시를 사는 법이지!" 어디 여인 뿐이겠습니까.

 

이 소설에서 묘사된 에르제베트 바토리 부인은, 애만 안 낳고 결혼만 안 했다 뿐 스칼렛 오하라의 면모와 비슷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복당하길 싫어하고 시시한 남자에게는 눈길도 안 주는 그녀와는 달리, 바토리 부인은 남자를 꽤나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렇게 야심과 자긍으로 뭉친 여성치고는, 언드라시 같은 시시한 귀족(더부살이꾼)에게 너무 쉽게 몸을 주고, 피임도 서투르게 해서 고향까지 먼길을 가 해산하는 수고를 겪고, 자신의 배로 낳은 첫 딸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들려 보내며 차마 못할 짓을 행합니다. 이런 게 다 자기 자식에게 못할 짓일 뿐 아니라, 본인의 마음 한구석에 씻지 못할 죄의식이 남는다는 점에서, 부도덕하기 이전에 어리석은 짓입니다.

 

물론 진성 마녀 스타일로 비판받아 마땅한 인간형은, 아예 이런 거리낌이나 죄의식, 명예감 따위가 없더군요. 손톱만한 이득이 된다, 혹은 이 남자와 자는 게 향후 로또식 요행이 터질 통로가 된다 싶으면, 기꺼이 상대가 늙은이든 추남이든 행동에 옮기고 터무니없는 합리화를 일삼습니다. 도덕률이나 양심이 자신의 품위와 존재 가치를 위한 게 아니라, (가상의) 남성 우월 세력이 자신에게 부과한 부당한 속박이기라도 한 양 여기나 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자기를 파괴하는 줄도 모르고, 무슨 투사로서 대단한 명분이나 수행하는 줄로 자신을 기만합니다. 하긴, 즐기기도 하고 투쟁했다는 허영(환각)도 채우니 일석이조이긴 합니다.

 

소설을 읽으신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1부에서 어렵사리 페렌츠의 마음을 얻고, 삼십을 넘기면서까지 남편과 사이에서는 불임인 채로 있다 늦게나마 딸 하나를 본 후로는 아이 넷을 연달아 낳고, 드디어 이 백작이 그토록 갈망하던 아들-즉 후계자-를 낳은 대목에서는, 주인공과 함께 환희, 뿌듯함 같은 걸 느꼈을 겁니다. 또, 제발 좀 에르제베트에게 잘해줬으면 하고 우리가 바라던 페렌츠가, 예쁜(예쁘기야 하겠지만 절대 미인은 아닌 것도 같은 게, 소설 초입에 거울을 보면서 아쉬워하는 캐릭터 본인의 고백도 있으니까요) 부인, 약혼자를 오래도 외면하고 천한 하녀들과만 어울리는 게 그리도 밉살스럽다가, 하녀 어말리어를 "별차기" 수법까지 가르쳐 줘 가며 가학적으로 혼내는 데 동참하고서부터 친해지는 장면에서, (하녀가 겪을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큰 안도를 느끼기도 했을 겁니다. 이상하게 저도, 소설 속 주인공에 대해 필요이상으로 감정이입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러다가도, <엉클 톰스 캐빈>이나 <노예 12년> 같은 걸 읽으면서는 무자비한 귀족들의 처사에 얼마나 분노하겠습니까? 사실 이 소설에서, 얼굴 좀 예쁜 하녀는 무조건 주인을 홀리려 들고, 반대로 어느 이성도 거들떠 보지 않을 것 같은 추녀는 같은 하녀 계급 중 예쁜 이를 시기하고 모함하는 타락한 성격으로 묘사되는 게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에르제베트의 어머니인 언너 바토리야말로, 미모와 영리함, 귀족으로서 나름 고충일 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지혜와 무자비함을 고루 갖춘, 이 소설의 주인공 에르제베트보다 더 "바토리스러운" 원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가 사위에 대해 예언한 대로 "그는 좋은 사람이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라"는 말은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어쩌면 에르제베트는 자신만의 매력(이라기보다 결점)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후천적으로 배운 잔혹함을  그대로 실천하고서야, 남편의 마음을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걸 보면 페렌츠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장모 언너의 눈에 찼을 뿐인 "우둔할 만큼 아랫사람에게 잔인하고 냉혹한" 전형적 귀족이라는 점에서만 "좋은 귀족"이었나 봅니다.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아랫것들이란 그저 하루가 멀다 하고 버릇을 고치고 제 분수를 깨닫게 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존재로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런 전제가 깔려야, 바토리 백작부인이 행한 엄한 처분이 합리화도 되겠고 말입니다.

 

페렌츠는 아내에게 완전히 마음을 준 후에도, 지속적으로 하녀들과 통간하는 걸로 나오는데, 그 중에 별로 예쁘지도 못하고 (그가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는) 가문의 위신과 부를 위태롭게 할 만한 여인에 대해서도 분별 없이 가까이하는 걸 보면, 봉건 질서에 의심 없는 충성과 신념을 간직한 인물일지는 몰라도 지혜는 결여된 타입으로 보입니다. 투르조가 그처럼 악질적인 배신자(이 소설의 관점에서만 그렇다는 걸 유의해야겠습니다. 역사적 판단은 별개입니다)일 줄도 모르고 생전에 그와 재혼하라고 아내에게 권하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죠. 이는 물론 지극한 아내 사랑이긴 합니다. 그가 가문의 보존, 후계자 승계에 얼마나 큰 집착을 보였는지를 감안하면 큰 파격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천한 하녀들을 건드리고 다닌 걸 보면 참... 아시아의 술탄이나 파디샤도 한 여인에 대해서만 일생의 순정을 유지한 경우도 있는데 말이죠) 그가 어리석다는 건, 사촌이라기보다 하인과 같은 존재였던 언드라시가, 자기 약혼녀와 놀아나는 걸 방치한 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약혼녀에게 본인이 애정을 느끼고 안 느끼고와는 별개로,  아랫사람이 본인 허락도 없이 "자기 물건"에 손대는 짓은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바토리 벡작부인은 역사상 기록으로는 각종 고문 기구를 들여 놓고, 하녀뿐 아니라 귀족의 영애들까지도 교육의 명목으로 자기 성에 들인 후, 가학적 만행으로 목숨을 앗은 걸로 나옵니다. 이 소설에는 하녀, 하인들의 권익도 당시 헝가리 법제가 제법 잘 보호한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 귀족의 영지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누가 번거롭게 정의를 내세우며 개입하려 들었겠습니까? 이 소설에서 설정한 대로, 그 귀족의 재산과 지위를 빼앗는다거나 정치적 공작이 깔려 있지 않았으면, 하녀 따위야 죽든 말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겁니다. 실제 역사에서 이 바토리 부인이 파멸을 맞은 건, 1) 종교적으로 문제가 될 법한 방식으로 하녀들의 목숨을 앗앗고, 2) 귀족 자제들의 신변에 위해를 가했다는 이유가 끼어들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뿐입니다.

 

소설 속에서도 그렇고, 실제 행적으로도 바토리 백작 부인은 대단한 교양과 학식을 갖춘 인물로 보입니다. 한국의 일부 부유층 자제가, 영어는커녕 모국어로 행하는 의사 표현마저도, 정신박약이나 문맹자의 그것이나 다름 없는 수준을 보이고도 부끄러운 줄조차 모르는 모습과는 크개 대조됩니다. 귀족이 되려면 아래 신분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는 서양의 컨벤션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율 브리너,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의 영화 <아나스타샤>를 보면, 로마노프 대공을 두고 집사가 "이 글씨 쓴 꼬락서니 하곤.." 하며 경멸 가득한 표정을 짓는 장면이 있습니다. 자신보다 필체가 안 좋다는 뜻이 아니라(자신은 당연히 그게 자기 본연의 일인데 필체가 좋아아죠), 귀족이 으레 갖추어야 할 자질을 연마하지 못한 채 세상에 나온 "불량품"이라는 뜻입니다. 귀족이 되려면 지식 뿐 아니라 판단력도 좋아야 합니다. 이 소설에서도, 하녀들 사이의 분쟁을 말끔히 해결하지 못하면, 아랫사람들로부터 조소의 대상이 된다는 분위기가 분명히 제시되고 있죠.

 

언너 더르불리어는 그 음산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하다 할 만큼 긍정적 인간형으로 묘사됩니다(실존 인물은 아닌 듯합니다). 에르제베트는 그녀와 처음 마주칠 때부터, "당신이나 나나 여기선 똑같은 하녀 처지니, 형식적이고 외교적인 모습만 보이지 말고 속을 터 놓아 보라"고 요구합니다. 이때 에르제베트의 속셈이 따로 있어서 정보 따위를 캐내려는 게 아니라, 진짜 외로워서 친구가 필요했던 걸로 보입니다. 가식이 아니라 이 소설에서 에르제베트가 유일하다시피 사람 제대로 알아 본 게, 사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이 더르불리어를 두고서였습니다. 사람이 자기 분수와 본분을 안다는 것만으로, 이처럼 가치가 올라갈 수 있구나 하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실 에르제베트는 나름대로 순수한 성격이지, 음모를 꾸미고 계산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타입이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언드라시, 투르조, 그 외 그녀를 거쳐 간 인물들을 보면 대개 그녀를 이용해 먹고 버린 셈이지(소설의 시점이 1인칭이라 이 점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독자가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런 결론이 나옵니다), 정작 악녀라는 그녀는 상대의 속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피해만 보았습니다. 페렌츠가 처음에 그녀에게 끌리지 않았던 것도, 가슴과 둔부가 덜 발달한 아이라서기보다는, 어딘가 맹해 보이는 타입이라 매력이 안 느껴진 건 아니었는지, 그러다가 의외로 독해 보이는 면을 발견하고서야 마음이 열린 게 아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물론 이건 졍상이 아닙니다. 남자라면 당연히 순수한 여성을 좋아하기 마련이죠).

 

페렌츠의 대사 중에 "난 처음에 돈과 작위만 보고 내게 시집 온 여자인 줄 알았소."라고 하는 게 있는데, 사실 계보를 따지고 보면 에르제베트의 바토리 가문이 더 높은 지위이기 때문에, 이건 좀 사실성이 결여된 대목 같습니다. 결혼 후에도 바토리라는 성을 유지한 건 그런 내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왕"이라는 칭호로 자주 나오는 루돌프, 마티아스 등은, 물론 "헝가리의 왕"이지만, 그 이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람은 바토리 백작 부인 사후에 터진(물론 상관관계는 없습니다만) 30년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무능한 군주들이었습니다(같은 시기 프랑스에는 앙리 4세라는 현명한 왕이 나와 여튼 프랑스의 중흥을 이끈 것과 대조되죠). 마티아스 왕은 헝가리 왕으로는 마티아스 2세이며, 제국 황제로선 그냥 마티아스 황제일 뿐입니다. 이 사람은 사실 친계 조모가 헝가리 왕실 공주 출신입니다. 따라서 바토리 부인과는 그리 멀지 않은 친척인데, 이 소설에서는 투르조의 농간에 넘어가 커니저이 가문의 돈(따라서 상속자 바토리 부인의 채권)을 떼먹는 걸로 나옵니다. 소설에는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투르조가 마티아스와 황제 사이에서 얼마나 이중플레이를 열심히 벌였는지는 눈에 선히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앞서 말했듯 "나름 순수한" 캐릭터 바토리 부인은 자신만 그 사정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결국 이때 마티아스 황제와 사이가 벌어진 게 그녀의 몰락을 자초한 걸로 암시됩니다.

 

이 소설 최대의 악역인 투르조의 신분은 "영주"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약간 이상한 느낌입니다. "영주"라고 하면 남작도 종남작도 그저 기사 신분도 자기 영지 안에서는 다 영주입니다. 그런 시시한 보편 지위에서, 불입권을 지닌 백작 부인의 성 안에 범죄 조사차 수색을 할 수 있고 처분을 내린다는 게 어색하죠. 영어 원문은 "영주"가 아니라 "팔라틴"입니다. 우리 나라 역사책에서 흔히 "궁정백" 혹은 "궁중백"으로 번역되는 그 작위입니다. 이 자리는 법적으로 황제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바토리 백작의 영지에 이처럼 진입을 하는 게 경우에 따라 가능한 것입니다. 그저 친분만 있다고 이런 실력 행사가 가능한 게 아니죠. 투르조의 이름은 죄르지인데, 이는 사실 바토리 부인의 아버지의 그것과 같아서 묘한 아이러니를 풍기는 듯 보이지만, 조지, 조르쥬, 게오르그 따위가 다 같은 계통이며, 유럽에서 가장 흔한 이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 큰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헝가리 인명은 안드라시, 안나 등으로 쓰는 게 보통이나, 이 책에서는 액센트가 놓인 a는 "아", 없는 a는 "어"로 철저히 구별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좀 어색해도 정확한 현지 발음에 가까운 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왕국 수도 "포조니"는 현재 슬로바키아의 수도인 브라티슬라바의 헝가리식 이름입니다. 슬로바키아는 역사상 오랜 기간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기에 이런 사연이 있고, 저 위에 적은 현대 호러물 <호스텔 2>에도 느닷 바토리 부인 캐릭터가 나오는 게, 배경을 브라티슬라바로 삼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연관 고리가 있다고 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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