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명화 한 점 - 명화 같은 인생, 휴식 같은 명화
이소영 지음 / 슬로래빗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칸트의 저술을 읽어 보면, 인간의 지각과 이성에 대해 대단히 유보적인 정의를 내려 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수학이나 자연과학의 공리에 대해서도, 그 출발점은 "동시대인 사이에서 합의된 선지식"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을 정도죠. 그 이른 시기에조차 "절대 진리"에 대한 섣부른 인정을 이처럼 꺼리고 있는 신중함이 놀랍습니다. 심지어, 가시광선 7색이 섞이고 교차하며 빚어내는 시각을 비롯한 오감에 대해서도, 그저 "인간의 망막과 광선 사이의 상호작용이 유발하는 한계" 안에서의 현상이라는 점을 명확히하고 있습니다. 객관적 실재(만약 그런 게 있다면)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고, 다만 우리 눈에 그저 그렇게 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비치는 상, 색깔, 모습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에 동의하고 나서야, 사실주의, 고전주의 이후에 꽃을 핀 그 모든 개성적인 화풍이, 제각기 자기만의 타당성 있는 어법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이성적 사유 이전에도, 우리는 마네, 쇠라, 고흐,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중에, 마음이 평온해지고, 채 잊고 있었던 푸근한 심상을 아득히 먼 이전으로부터 끌어올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눈에 비치고 우리의 뇌가 해석하는 바 한 가지 가능성만 존재한다면, 사진을 제외한 모든 시각 예술품들은 그저 우리 마음만 산란하게 하는 유해물일 것입니다. 화가들이 그런 파격을행하고도 우리의 환영을 받는 건, 현실 혹은 형이상에 대한 그런 식의 포착이, 지금 우리 망막이 놓치고 있는 어떤 비주얼을 "영혼의 눈"을 통해 전달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은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이 책 저자인 이소영 대표가 우리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도 그런 쪽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요즘 9호선 연장 때문에 배차간격이 늘어서, 해당 노선 이용하시는 분들은 극한의 불편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자차를 이용하지 않고 대중교통에 몸을 싣는 건, 그나마 그 시간을 독서 등에 선용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걸 꿈도 못 꾸게 되었으니 실망이 더 크죠.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내 마음을 푸근하게 이끌어 주는 그림, 조형은 어떻게 해서건 출근길의 벗이 되어 줄 수 있더군요. 이 책은 요일에 따라 총 7부로 나뉘어 편집되었는데, 아침에 집을 나오기 전 해당 페이지를 펼치고 내 눈에 뚜렷하게 이미지를 새겨 놓습니다(마치 튜브 물감이 발명되기 전 야외에서 재빨리 스케치를 한 후, 기억을 되살려 아뜰리에에서 채색 작업을 하던 이전의 화가들처럼 - 이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철에 몸을 실으면 눈을 감고(사람이 많으니 손잡이를 잡을 필요도 없고, 때가 되면 인파에 쓸려 저절로 내려지죠), 그 그림의 이미지만 재생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마음이 편해지고, 동시에 그 그림 밑에 저자 이 대표가 적어 놓으신 이 구절을 떠올리면서, 예컨대 "당연한 것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같은 말을 떠올리면서 짜증을 가라앉힙니다. 그림을 통해 이 각박한 물리계를 넘어 저 피안의 조형도 떠올리고, (인위적이지 않은) 마음 수양도 하니 일석 이조입니다.



이 책은 기계적이지 않은 구성이 가장 큰 매력입니다. 요일에 따라 7부로 나뉜 각 챕터는, 챕터마다 시대에 따른 유파를 설명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런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고, 그런 책들을 익히 읽은 우리 독자들도 웬만한 지식은 갖추고 있단 말이죠. 이 책은 그런 우리 심리를 미리 꿰뚤어보기라도 했다는 듯, 교과서적인 설명은 최대한 자제하고, 대신 (얼핏 보아) 신변잡기나 개인 회상 같은 작가 개인의 말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림의 해설(이 역시 필자 개인의 주관이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물론 개인 감상이라 해도 전문가의 그것이니 무게가 다르긴 하지만)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니, 그냥 친구나 아는 분이 옆에서 들려 주는 이야기 같아 공감이 더 빠르게 이뤄지더군요.



설명도 입체감이 있습니다. 이런 책들은 보통 보면 필치와 기법에 대한 기술적 설명을 나열하거나, 앞 유파, 그리고 이후의 전개와 고립된, 당해 트렌드에 대해서만 자세한 이해를 의도하는 게 보통인데요. 이 책은 (때로 느닷없다 싶은) 통시대적 설명이 적시에 끼어드는 게 좋았습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이처럼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넘나드는 건, 저자가 오랜 세월 이 주제와 밀착한 환경에서 살아올 수 있었기에 이런 정직한 표백이 가능했을 텝니다. 자신만의 아이템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뻔하고 흔한 구호의 나열 끝에, 세상이 자기 부모처럼 제 응석을 안 받아주더라는 어처구니 없는 원한을 싸구려 무족보 페미니즘 타령과 얼기설기 섞은 넋두리와는 크게 구별됩니다.




존 윌리엄 고드워드는, 인상파와 입체파가 화단을 풍미하던 시대에 신고전주의 터치를 고수한, 일종의 낙오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후기 인상주의 파트 뒤에 이 사람 이야기를 뜬금없이 싣고, 또 그의 대표작 몇 점을 같이 실어 독자에게 감상을 권합니다. "나는 그가 좋았고, 이런 그림을 남겨 준 그에게 감사한다." 그 말을 듣고 나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독자 중 한 사람인 저도 그의 선명하고 깨끗한 화풍이 마음에 들더군요. "스타일을 개창하고 열어 젖힌 사람뿐 아니라, 그를 마무리하고 떠난 이에 대한 기념도 있어야 한다." 사실 고드워드 같은 사람은 "마무리를 했다"고 하기엔, 루벤스 등의 시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죠. 피카소 같은 이도 그런 기법 구사에 서툴러서가 아니라, "새로운 표현법으로 세계와 소통하고 싶었던" 욕구가 강했기에 대가가 될 수 있었겠죠. 고드워드 같은 이는 사실 안이하게 자기 세계에만 머물렀지, 거듭나려는 의지가 부족했기에 그가 동시대로부터 박한 평가를 받은 건 당연합니다. "어쨌든 나는 내가 잘하는 걸 계속하겠다!"라는 타협과 거짓 없는 그의 정신은 그러나 높이 평가해야 하겠죠. 다만 저는, 고드워드가 작품 제목을 잘 지었다는 평에 대해서는 그리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시회를 자주 가 보지 않으면, 유명한 화가가 생전에 얼마나 많은 작품을 남겼는지 감을 잡기 힘듭니다. 전시회란 그래서, 그 많은 작품들 중 어떤 피스들을 모았느냐를 통해서도 모종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으며, 오너십이 단일하지 않은 그 작품들을 한 장소에 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이, 대가들의 대표작 아닌,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컷 여럿을 싣고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소개할 때에도, 사진 중에 번호를 삽입하지 않고(사소하나마 벌써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죠), 매개 인덱스를 거치는 방식을 쓰신 점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림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저자 이 대표는 개인적으로 소중히 여겨 온 다른 미디어에서의 체험과 감상도 곁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점도, 이 책이 입체적 개성을 지니게 하는 비결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 서양고전음악, 대중가요, 소설(예를 들어 최근 히트작인 요나스 요나손의 <창문...>).. 또한 그런 추억을 환기하는 배경으로는 반드시 홍대, 건대앞 등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장소, 아니면 친구들과 함께 다녀온 파리 등이 곁들여져, 일종의 공감각 효과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심오한 감상이나 상념이 아니라, "서른을 넘기니 불안하다" 같은, 친근하고 보편적인 느낌이 대부분이라서, 이 책에 실린 그림들과 우리 평범한 독자 사이의 거리를 더 좁히고 있습니다.

결국 예술이나 업적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우선"입니다. 이 책에 실린 예술가들 중 일부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내세웠겠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은 평범한 대중인 우리 같은, 관객과 청중이 있어야 그 존재 의의도 사는 법입니다. 심각하지도, 고매하지도 않은 채, 그저 팍팍한 일상을 사는 우리 곁에 머물며 작은 위안을 주고, 다시 일선의 경제활동으로 복귀한 우리들에게 재생산의 활력을 부여하는 그런 그림들이야말로, 예술을 넘어 영원의 가치에 기여하는 그런 불멸의 존재로 남는 것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시각의 창조와 해석에는 한 가지 정답만 있는 게 절대로 아니겠습니다. 정직한 인생과 함께하는 우리 모두에게 고유의 해석권이 주어지는, 완벽한 민주주의의 장이 바로 그림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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