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구나무
백지연 지음 / 북폴리오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20대 시절, 아니 유아, 청소년기부터 거의 한 시기도 빼놓지 않고, 엘리트, 정상의 위치만 골라 디뎌 온 인생이 우리 나라애 그리 흔할까요? 그런 분들이 있다고 해도, 대중의 시선 한복판에 자리하며 전 국민의 선망과 애정이 되기까지 한 경우는, 드물다기보다 아예 없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입니다. 요즘 자라나는 세대들도 이 방송인 백지연씨의 이름은 알 정도니, 한국에서 이분이 얼마나 희귀한 인생을 가꿔 온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남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사신 분이니만치, 한때나마 어처구니없는 비방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사필귀정이라고 그 모든 소동은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의 요구에 따라 마무리되었습니다, 저는 그런데 그 사건이 터질 무렵, 뉴스를 통해 이분이 얼마나 광범위한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는지 부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인맥"이라고 하니까 무척 타산적이고 속물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단어 같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의 인맥이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며 정(情), 그리고 가식 없는 교분을 나눈 "1차 집단"성 지인들을 말합니다. 사회 나와서 쌓은 인맥은, 결정적일 경우 사이가 틀어지는 게 빈번합니다. 혹은 요즘 말로 "갑을권력관계"가 선명해서, 인맥이라기보다 일방통행성 소통에 가까워지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명문 학교만 거친 백지연씨의 경우, 자신과 비슷한 출신과 레벨의 인사들을, 오랜 세월 살가운 친구들로 두고 교류하다 보니, 사회 생활의 기반이 누구보다도 탄탄하겠다는 추측도 해 보았습니다.

 

이 책은 물론 소설입니다, 그러나, 어느 작가의 무슨 작품이라도 그러하듯이, 허구로 꾸며진 세계라도 자신의 체험과 그 과정에서 얻어진 절실한 생각이, 그 구조와 내용 안에 물씬 묻어나는 법입니다. 백지연씨처럼 인생의 어느 한 순간도 허투루 지냄 없이, 치열하고 효율적인 삶을 살아 온 분이라면, 그 과정에서 마주쳤을 만한 사람들도 다 자신 못지 않은 순도 높고 성취 가득한 인생들이었을 텝니다. 이분이 처음으로 장편 소설- 방송인들이 자주 시도하는 에세이 집필이 아니라 창작 소설 - 을 펴내셨다는 소식을 듣고, 냉큼 주문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여성 독자라면 아마 자신의 삶 궤적 하나하나와 비교, 대조해서 공감하거나 혹은 선을 긋거나 하는 재미가 있겠습니다만, 남자인 저는 저 위에 적은, 그런 면들에 주안을 두고 솜솜 뜯어 읽어 보는 맛이 있더군요. 제 주위에도, 학생 시절 잘나가다가 최근에 좌절한 친구, 학창 시절 내내 문제아로 찍혀 죽을 쑤다가 성년을 넘기고 의외의 대박을 친 친구, 성적이나 교우 관계나 모두 별볼일 없었지만 여튼 아버지 사업 물려 받아 한량 행세 하는 친구, 초등학교 때 천재 소리 들었으나 부모님과 크게 싸운 후 대학 진학에도 실패한 이래 과연 어떻게 풀렸을지 궁금해지는 친구.. 뭐 다양합니다.


그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때 그 친구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뭐하면서 지낼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절실한 감흥으로 와 닿는 질문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 역시, 꼭 백지연씨 같은 유명인의 그것이 아니라 해도, 누구의 사연이건 제 나름의 답안이건 간에, 재미있고 감동적일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제가 평소에 개인적으로 궁금해하던 이분의 창작 - 다시 말하지만, 어느 창작이라도 순수 픽션은 없습니다 - 이라니,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마치 19금 소설을 읽을 때처럼 살짝 떨리기도 하더군요(물론 이 책에 그런 점잖지 못한 내용은 없습니다만). 다 읽어 갈 무렵에는(일부러 천천히 읽었습니다), 창 밖에 발그스레하게 동이 터 왔고, 알게모르게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허무함, 해탈이 가득 담긴 미소를 만면에 머금는 그 장면을 본 후처럼...

 

극중 화자이자 사건의 중심에 서서, 내러티브를 취합하고 그에 대해 해석을 가하며 지면 밖을 향해 전달하는 이는 백민수입니다. 이름에 무관하게(혹은 깊은 관련을 맺고?), 이 인물은 작가 백지연씨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봐야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고교(여고) 졸업 후 지속적으로 만나 온 친구들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O 헨리의 <20년 후>처럼, 기억의 한편에 선명한 음각으로 새겨져 있으나, 단지 직접 접촉만은 단절되어 왔던 그런 관계더군요. 조금 작위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장편 하나에다 6인의 이야기를 쏟아내듯 풀어 놓으려면 이처럼 "어느 날 그녀들을 갑자기 만났더니..." 같은 구성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이해도 되었습니다.

 

남자는 이후 인생이 어떻게 풀렸건, 다 자기 책임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백지연씨 세대 여성들은, 자신 아닌 다른 변수에 의해 인생이 좌우되는 면이 크다는 사실,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힘이 센 진리가 아닌가.. 새삼 확인하게 되더군요. 물론 그 점을 인정하더라도, 주된 책임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이 소설(물론 소설이긴 합니다만)에서도, "제 발등을 찍었다"며 큰 아쉬움을 토로하긴 하지만, 결국 별 유감 없이 후련한 인생을 사는 인물은, 어려서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는 승미 아니겠습니까?

 

미묘하게나마 저는, 인터뷰어 백민수가 "수경의 실패"에 대해 다소 안도를 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가장 찬란하고 성공한 인생을 살아야 마땅했던" 그녀가, 저처럼 외화내빈의 피곤한 여정을 끌고 가는 모습이, "난 차라리 괜찮구나."하는 이기적 위안을 제공해 주는 좋은 소재나 아닌지. 그리고 이 소설의 제목인 <물구나무>에도, 제재적으로 가장 잘 부합하는 케이스가 아니었는지. 우리 모두는 확실히, 질시와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한 이의 좌절로부터 가장 만족스러운 쾌감을 얻는 속물들이 아닌지. 이 소설은 그런 점에서, 솔직하기에 공감이 되는 공범의 회고담이었다고나 하겠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삶이나 다른이들의 삶이나, 어쩌면 물리적으로 거꾸로 서기 전부터 이미 시선을 뒤집은 채로 지켜 보거나, 훔쳐 보거나, 혹은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한다는 듯 내 욕구를 투사하여 왜곡해 보거나... 그렇게 꿈을 품고, 혹은 욕구와 희원을 덧칠한 대로, 세상의 만화경은 어느 새 그대로의 현실이 되어 이처럼 기묘한 풍속도를 그려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사실 더 살아 봐야 그 깊은 묘미를 알 수 있겠습니다만, 확실한 건 지금의 모습, 추세가 그의 미래를 그대로 반영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너무나 뻔하고 통속적이어서 재미없는 인생이라고 하지만, 끝에 가면 이만큼이나마 의외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불공평해서 공평하고, 속살을 들춰 보면 누구나 고르게 아픔을 나눠 갖는 것, 이 법칙은 누구의 인생에 있어서도 비껴 가지 않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철칙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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