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화 - 원형사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김용운 지음 / 맥스미디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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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비슷한 생김새, 피붓빛, 신장(身長)을 가지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서로 부딪히고 갈등하는 일이 잦을까요? 한, 중, 일 3국의 서로 차별되는, 그리고 많은 경우 상충하는 정서가 이 모든 사단의 근원이 아닐까 짐작은 합니다.

 

우리 동아시아 3국은 유교 문화권이라는 점도 비슷하고, 감성이 풍부하며 쌀밥을 주식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닮아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역사를 통해서도 그렇고, 현재 격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국외자(局外者)인 서양인들이 보면 대단히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도 동남아시아에 자리한 타이,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말레이시아인들이 서로 얼마나 감정이 좋지 못하며 민족 간에 분쟁이 잦은지를 접할 때마다 놀라곤 하죠.

 

냉정히 돌이켜보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남들이 보기에나 닮았지, 내부 당사자끼리는 엄청 이질감이 느껴지고, 닮은 듯하면서 속이 엄청 다른 것이 오히려 곁에서 더 못 견딜 일일지도 모릅니다. 환경과 섭생의 산물인 외모와는 달리, 내면의 원형적 정서는 외관을 배신하며 서로 상극의 차이를 보이는 일이 허다합니다. 이를 두고, "원형(原型)적" 정서의 차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았습니다. 싸움을 하고 갈등을 빚고 서로 증오하는 일이 너무 잦으면, 당사자의 생존이나 세계 평화에 큰 지장을 줍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각 민족의 마음과 생각, 지향을 구성하는 문화 원형적 요소에 눈을 크게 뜨고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 김용운 박사님은 "한국의 버트란드 러셀"이라는 평가를 받는 분입니다. 러셀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20세기 전반에 활약한, 수학자(수학자로서의 경력이 가장 먼저입니다), 철학자, 그리고 사상가이자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한 운동가이기도 했습니다. 박학다식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투옥도 겪으면서 자신과 생각을 달리하는 이들을 감화하고 설득한 분이었죠, 러셀 경과 생각을 같이하는 이들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세계는 이미 지난 세기에 3차 대전을 겪고 핵전쟁의 여파로 멸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김용운 박사님 역시 수학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펴시고, 기초과학의 대중화에 공헌한 대원로이십니다. 그는 일본에서 수학하고 미국에서 청장년기 연구 활동을 행한 국제적 석학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이분이 쓰신 <재미있는 수학(數學) 여행>을 읽고 기본 마인드를 다진 경험이 있어서, 박사님의 존함이 나온 모든 책들을 읽을 때 각별히 호기심과 신뢰가 생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이 책을 읽으면서, 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신세계를 체험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우리가 아놀드 토인비의 <세계사 대계> 같은 책을 읽으면, 그 보는 시야의 웅대함과 비전의 깊이에 압도되곤 합니다. 책을 읽을 때는 각론을 세밀하게 판 전문서를 읽어 줘야 할 때가 많고, 그런 책을 읽어 내어야 뭔가 뿌듯하니 공부한 느낌이라도 들곤 하죠. 그러나 때로는 아주 높은 하늘 위에서 아래를 조감하기도 해야, 정신이 맑아지고 방향 감각을 잘 조율할 수가 있습니다. 애를 써서 한 분야를 천착하긴 하지만, 너무 좁은 범위에만 집중하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잊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게 보통이죠.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탁월합니다. 토인비도 우리 한국인의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인 석학이었지만, 이 책은 마치 그 토인비가 잠시 한국인의 몸과 영혼과 언어와 스탠스를 빌려, 자신의 저서에 대한 동북아시아판 각론을 차분히 설명해 주고 있는 느낌입니다. 박사님은 지금 치열한 대립, 소모적인 감정 싸움을 벌이는 한 중 일 3국의 갈등, 그 근원이 과연 어디에 있었는지를 세밀하고도 거대한 스케일로 해명 해 주고 계십니다.

 

제목에 대해 착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요. 풍수화는 독립 키워드 세 글자를 하나씩 따서 연결한 형태입니다. 한국인의 정서는 바람 즉 風으로 대변되고, 중국인의 마음 그 원형은 물, 水이며, 일본인의 그것은 불, 즉 火란 뜻입니다. 음양오행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동아시아인들이 그 사상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기본 프레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만, 박사님은 그 중 한 글자씩만을 골라 내어, 복잡다기하고 그 깊이를 모르게 꼬이고 꼬인 동아시아인 무의식 심층 구조를, 정말 재미있게 해부해 주고 계십니다.

 

박사님은 과연 전공이 어느쪽이신가 궁금할 만큼, 역사와 언어학에 대해 탁월한 식견과 통찰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계십니다. 일단 박사님은, 백제 멸망을 확정지었던 백강 전투에서, 왜군이 패퇴하고 열도로 물러나 앉은 사건이, 이후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십니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한반도에는 본디 백제계와 신라계가 그 남부를 반분하고 있었으며, 백제계와 신라계 모두 일본 열도에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던 것이, 당나라 세력을 등에 업은 신라가 수륙 양면에서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 왕실이 무너지고, 그 잔존 세력이 일본 천황가를 세워 반도에 대한 극단적 적대 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겁니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생긴 것도 이때 이후이며, 엄청난 트라우마를 안긴 한반도 패주사에 대해 철저히 망각하고자 정반대의 기술로 새로운 정체성을 앙양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책이라는 게 저자의 시각입니다.

 

일본서기를 두고 저자는 신화적 접근 방식으로, 저술 당시의 일본인들이 지난 역사와 앞으로 열도인들이 취해야 할 방향성이 어떠했는지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진구 황후가산욕을 참으며 돌로 자궁을 막고 반도에 진출하여 정벌을 마치고 귀국하였다는 대목은,  낯선 중국인들의 힘을 빌려 백제계의 토대를 말살한 신라계에 대한 적대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 준다고 합니다. 알려진 것처럼 일본에는 두 천황가가 양립하며 남북조를 형성하고 대립한 분열기가 있었는데요, 저자는 이 역시 다이라씨(平氏)와 미나모토씨(原氏) 사이의 항쟁도, 백제계와 신라계의 싸움으로 봅니다.

 

이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게, 실제로 다이라씨의 후손을 자처한 풍신수길은 임진왜란을 일으키며 한반도를 쳐들어 왔고, 신라계라는 미나모토 씨의 후예(역사적으로는 확실치 않습니다)인 덕천가강은 조선 왕국과 화친을 꾀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하나하나 맞아 떨어지죠. 그뿐이 아닙니다. 메이지 유신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조슈 - 사쓰마 번 연합체가 일으킨 패권 전환 모멘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서쪽에 웅거한 번 세력도, 알고 보면 일본 열도 서쪽에 기반을 둔 백제계의 후손이라는 거죠. 결국 백제계는 끊임 없이 반도를 적대하고, 외세와 연대하여 자신들을 반도에서 쫓아 낸 신라계에 응징을 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증적 근거를 떠나 참 재밌는 논의이며, 아귀가 척척 맞기도 합니다. 중일전쟁 등 일제의 대륙 침략도 백강 전투 괴멸의 분풀이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하겠네요.

 

박사님은 이처럼 고대사에 대한 개관을 마친 후, 언어적 탐구를 통해 2라운드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반도인들이 쓰던 언어는 "가라어"라는 게 있었는데, 이를 반영한 게 향찰 문자이며, 가라어의 원형을 계승하고 향찰을 개량한 게 가나라는 주장입니다. 재미있는 건 가나가 고안되기 전 쓰이던 만요 문자(만엽집에서 쓰던 문자)를 보면, 이 가라어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는 건데요. 가나가 쓰이고 나서는 역으로 문자 언어가 음성언어를 규제하는 일이 벌어져, 현대 일본어는 가라어 원형에서 거리를 두고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겁니다. 물론 우리말은, 한자어의 대대적인 침투로. 가라 어 원형은 거의 찾아볼 수도 없게 바뀌고 말았구요.

 

일본 학자들이 <만엽집>을 해석할 때 애로를 겪거나 "알 수 없음"으로 얼버무리고 마는 대목은, 바로 이 가라어라는 유용한 도구를 적용할 때 바로 해결이 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저자가 대단히 안타까워하는 대목은, 일본인들의 한반도 컴플렉스, 즉 "우리는 저 반도인들과 아무 관계 없어!' 같은 열등 강박 때문에, 분명히 보이는 해답도 애써 외면하며 먼 길을 우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자는 이 책 말미에 "천 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난제를 내(저자 김용운 박사님 자신)가 풀 수 있었던 건, 바로 한국어와의 연관성에 처음부터 주목했기 때문"이라고도 적고 있습니다. <만엽집>의 해석은 예전에 이영희라는 수필가가 조선일보에 성적 담론으로 일관한 해독을 장기간에 걸쳐 연재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었지요. 저자는 그 일에 대해서도 실명 거론 없이 잠시 언급을 합니다. 참고로 이것 관련해서 저자분은 좀 특이한 이력을 갖고 계시기도 한데요. 혐한 중상 모략이 요즘에만 있는 게 아니라서, 1970년대에 한국인을 가장한 익명의 저자가, 한국의 문화와 정체성에 대해 대대적으로 헐뜯는 책을 낸 적이 있습니다. 이때 자신의 명의로 그에 대해 일일이 반박하는 주장을 정리해서 대응한 분이 바로 이 김용운 박사님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도 그에 대한 회고가 있습니다.

 

박사님은 한국어에 대해서도 신선한 분석과 시각을 내어 놓습니다. 저는 예전에 재미 음악인들이 "한국어는 받침이 많아서 음에 가사 달기가 어렵다"고 하는 걸 들었습니다(요즘은 랩 때문에 오히려 유용하다는 평가를 듣죠). 과연 일어나 중국어(관화 보통어 기준)에는 받침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본디 가라어는 받침이 거의 없고, 이런 종성의 보편적 확산은 한자어를 수용하며 이뤄진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럼 현대 북경어에 받침이 거의 없는 이유는 뭔가(광둥어는 그렇지 않거든요). 이는 언어의 간이화라는 대세를 겪기도 했고, 저자도 이 책에서 (명시적으로는 아니라도) 은근 암시하는 대로, 몽골 족의 침략을 대거 겪고 나서 남은 흔적이라는 겁니다. 몽골 역시 우리와 형제뻘인 알타이 어족이므로(논란이 있는 이슈지만 일단 저자의견해를 따릅니다), 받침이 없는 원형을 그대로 간직했기에 가능하죠.

 

이 다음부터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한중일 삼국의 민족성 분석입니다. 일본인은 원수를 곁에 두지 않고, 자기가 죽든가 철저히 복종하든가 둘 중 하나이며, 한국인은 "두고 보자"는 태도이고, 중국인은 대륙 문화에의 장기적 흡수로 이를 해결한다는 거죠. 대담한 도식화를 열 두어 가지 토픽에 대해 시도하고 있는데, 하나 하나 읽어 보면 공감이 가면서도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유교에 대해서도, 일본인은 열도의 체질에 맞게 변형하고, 중국인은 실용적으로 융통성 있게 활용하며, 우리 한국인만 별나게 원리주의적 집착을 보인다는 겁니다. 참 맞는 말입니다. 이 책에는 왜 유독 한국인만 평등주의에 집착하는지에 대해서도 이른바 "문화적 원형"에 의한 재미있는 설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근래 우리 주위(특히 수도권이라면)에서 자주 마주치는 게 중국인이고, 그런 중국인들의 특이한 습성을 본 이들이라면 정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간결체 문장(석학 중에서는 드문 개성이죠)을 구사하셔서, 독자가 읽기 편하다는 것도 마음에 들더군요.

 

저자는 결론적으로, 중국인은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저자는 문화적 원형(저자의 시각에 따른)을 동원한 체계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날마다 긴장이 고조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볼 때, 저자의 이런 진단은 의미심장합니다. 저자는 우리 민족의 특성에 대해, 종족적 개성을 죽어도 포기하지 않으나, 한 중 일 삼국 중 단연 높은 수치로 "보편 문화를 지향"하는, 매우 바람직한 성향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로써, 한국이 동아시아 중심, 벨런서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해야, 항구적인 평화가 자리핳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일본인에 대해서는, 애써 왜곡된 정체성으로 반도인을 경원, 적대할 게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응시할 것을 권합니다. 이는 "일선동조론"이나 "만선사관" 따위와는 달리,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정립에 매우 중요한 인자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갖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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