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과의 대화 -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신장섭 지음 / 북스코프(아카넷)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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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과 경제인(사업가)란 언제나 악마적 공생 관계를 이룹니다. 중국도 고대 이래 언제나 상(商)인은 권귀(權貴)에 편의를 제공하면서, 많은 화폐적 혜택을 입어 왔습니다(화폐의 발행이 지배 세력의 독점 권한이었으므로). 권력은 또한 무력과 권위로서, 새로운 사업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고, 이런 기회를 두고, 자신이 애호하는 상인에게 미리 중요 정보를 귀띰하거나, 혹은 칙령, 사실상 압력에 의해 독점적으로 보장해 줄 수 있습니다. 사업가는 그래서 언제나 권력자의 주변에서 그 비위를 맞추어야 했고, 권력자는 다양한 편의와 사치를 제공 받아 왔습니다.

놀라운 것은,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등을 거쳐 현재 자본주의에까지 이행해 오면서도, 이 패턴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청렴 결백한 관료의 미덕이란 교과서나 유교 사서를 벗어나면 현실에서 찾아 볼 길이 거의 없습니다. 최고 권력자는 그 임기가 몇 년이든 간에 언제나 부패했고, 제 분야에서 제 할 일만 성실히 수행하는 사업가란 (어찌 보면) 책에서조차 찾기 힘듭니다. 정(政)과 경(經)은 거의 언제나 유착 관계에 있었으며, 이 책의 주인공인 김우중 창업주의 경우,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 정부 초기에 이르기까지 한 차례도 남한 수뇌부와 모종의 연이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여기까지는 다들 아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시사에 둔감한 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이 책이 가르쳐 주는 내용 중 좀 충격적이다 싶은 건 다음의 두 가지일 것입니다.
1. 김우중 회장은 이미 전두환 정부 후기 무렵부터 북 정권과 매우 긴밀한 연락과 친분을 유지했다.
2. 김 회장이 성취하고 잘 홍보했던 업적 중 소위 "세계 경영"이라는 것의 실체가, 생각보다 규모가 큰 것이었다.

좀 부수적이다 싶은 내용 중에서 약간의 놀라움을 안겨 주는 건 "노무현 대통령과 김 회장 간의 관계가 생각보다 돈독했다"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많 은 이들은 대북 사업에서 가장 앞서 갔던 기업으로, 1989년 방북해서 김일성을 만났던 사실 때문에 아마 고 정주영 창업주의 현대를 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도 인용되어 있듯, 이건희 회장은 1994년 당시 "매출액에서는 현대에 뒤지고, 가전에서는 엘지에 뒤지고, 대북 사업에서는 대우에 뒤진다"며 임직원을 질책한 적이 있죠. 이 책에서 저자 신 교수에게 자랑스럽게 털어 놓듯, 그 경색된 상황에서도 결국 최고지도자를 끼고 가장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던 이는 김 회장이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 김 회장 자신이 강조하는 건 "직언"입니다. 최고 권력자, 특히 독재자 주위에는 직언자가 드문 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입니다. 아무리 영리하고 냉철한 인간이라도, 측근자는 언제나 도전자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몇 전 직언을 용납하다 보면 권위의 실추를 겪게 되고,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 정치의 문제로서 이런 측근을 경계해야만 하죠. 김일성, 김정일 뿐 아니라 리비아의 카다피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김 회장은 최고 지도자의 은전에 목을 매어야 하는 처지가 아니므로, 독재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와 판단을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에서 제공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일단 실용적인 정보와 조언부터가 아무나 제공할 수 없는 희귀한 자원이지만, 김 회장의 경우 그를 넘어 최고 지도자들의 기분과 눈치를 잘 파악하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 김 회장은 아무 언급이 없지만, 그것이야말로 사업가의 밑천이자 승승장구의 비결이요, 어쩌면 자신의 치부와 직결되어 있는 사항인데, 하물며 책을 통해 불특정 다수에 공개할 리가 만무합니다. 여튼 책을 통해 김 회장이 계속 강조하는 비결은, "눈치 보지 않는 직언"입니다. 이것만으로 독재자로부터 그만큼이나 큰 환심을 샀다는 뜻입니다. 읽는 이들은 고성능 필터를 동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관점에서만 볼 것도 아닙니다. 여튼 그는 갓 개방이 시작될 무렵의 동유럽에서, "대우"라는 브랜드를 어린아이들에게조차 익숙한 브랜드로 만들었습니다. 기업의 마케팅 역량이 전례 없이 강조되고 있는 요즘,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그 광대한 미개척의 시장, 언어와 인종, 문화가 판이하게 다른 시장에서 그만한 성과를 냈다는 건, 거의 경이에 가깝습니다. 초인이라야 해 낼 수 있는 성과를 그는 그토록 광범위하게 이뤄 내었던 거죠. 지금도 최소한 이머징 마켓 중 베트남에서 이뤄 낸 업적은 저 과거의 성취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사업이란 어느 정도의 성과가 나오면, 주주와 투자자에게 공정히 배분하는 절차가 있어야 합니다. 성과란, 가시적이고 손에 쥘 수 있는 달러 뭉텅이가 일단 사업가 본인의 손에 들어 오고, 그 다음으로 돈을 댄 물주들에게 서운치 않은 나눔이 이뤄져야 하죠. 김 회장의 경우, 그가 이룬 놀라운 성과와 빼어난 수완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 성과가 끊임 없는 외적 팽창에 투입되기만 했을 뿐, 그가 빌려 간 그 막대한 자본이 원 주인에게 회수되는 일이 매우, 매우 드물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선단식 경영, 차입 경영은 대우만의 문제가 아니었지만, 대우의 경우는 대체 무엇을 위한 세계 경영이었는지가 의심될 만큼, 내실과 중간 정산을 외면한 사업 확장에 집착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이미 대우는 1991년에 조선發 부도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 전혀 사업의 방향을 전환하지 않은 채 기존의 패턴만 일관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황제식 경영의 폐단은 대우에서 아주 집약적으로 찾아 볼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는 자신의 장점에만 나르시스적으로 빠져 있을 뿐, 일단 큰 문제를 일으킨 단점에 대해 전혀 돌아보지를 않았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또 나오는 그의 말은 "GM이니 뭐니 하는 미국 굴지의 대기업도, 실제 경영하는 모습을 보면 허술한 구석이 많이 보였다."입니다. 그런데, 시스템에만 의존하는 행태도 물론 문제지만, 대우처럼 한 천재적 개인이 전사적으로 간여하고, 회장 한 사람이 빠지면 되는 일이 없는 기업도 문제입니다. 둘 중 굳이 택일을 해야 한다면, 당연히 안정적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 쪽을 골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일성 부자와의 에피소드도, 그처럼 잦은 방북(정주영 씨의 경우, 국가 보안법 위반 여부가 문제되자- 당시에는 아직 교류 기본법이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정부에서는 "통치행위"라는 궁색한 구실을 내걸기도 했습니다)이 있었으면 그것만으로도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만큼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 소개된 건 딱 하나입니다. "김 회장이 체제 상호 보장을 거론하자, 김정일이 '남쪽의 보장이 없으면 우리가 존속할 수 없기라도 하단 말인가'며 고성을 내었다. 밖에서 듣던 이들은 '이제 김우중은 남으로 귀환 못한다'며 술렁였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김 회장 자신은 결코 저자세로 대북 사업에 임하지 않았고, 당당한 태도를 견지했다는 메시지를 애써 전달하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요? 진실은 현장에 있었던 이들이나 알 수 있겠죠.

이 책의 핵심은 아무래도 외환위기 당시 "대우 자산의 헐값 매각"과 "정치적 외압    " 여부입니다. 그럭저럭 잘 굴러갈 수 있는 기업집단을 공중 분해시켜, 국부의 유출과 손실을 공연히 입었다는 주장입니다. 이 점에 대해 저자 신 교수는, 이헌재 전 부총리의 주장과 김 전 회장의 주장이 어디서 어디가 다른지를, 상세한 표와 함께 정리하여 책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사건 당사자의 일방적 주장 정도를 넘어서는 건 이 점에서 분명합니다.

과연 대우는 당시의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기업이었나. 대우만큼 오너 한 사람의 역량에 많은 걸 기대는 기업이 없었으므로, 기업의 역량 평가는 이 경우 결국 김우중이 과연 빚을 갚을 만한 사람이었냐로 바꿔 물을 수 있습니다. 빚을 갚을 능력이 되는데도 기회를 주지 않았다면, 당시의 정부가 중대한 판단 착오 혹은 부조리를 저지른 것으로도 볼 수 있겠죠.

하지만 대우는 이보다 훨씬 이른 시점부터, 유동성 경색의 위기에 몰린 적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특혜 시비를 유발했고, 청구 유예는 물론 추가 자금 지원까지 챙기곤 했죠. 1999년에도 같은 방법으로 당시 정부가 대처했다면, 아마 엄청난 정경 의혹 유착이 일었을 겁니다. 당시의 취약한 기반으로는, 정권이 그 의심의 식선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으라는 것도 짐작이 됩니다. 책에서도 김 전 회장의 "투정"은 주로 이헌재 등 실무자 선을 올라가지 않습니다. 독자가 기대한 건, 당시 정부에 뭔가 밉뵈어 (예컨대 전두환 시절의 국제그룹처럼) 부당한 운명을 맞이했다는 "뭔가 한 방" 같은 거였겠지만, 그런 건 유감스럽게도 없습니다.

김 회장은 막판까지 승지원에서 이건희 회장과 소위 "빅딜"을 두고 심야 담판을 시도하는 등 필사적이었습니다(대우의 가전을 주고 대신 삼성자동차를 받는). 우리가 다 알다시피 이 협상은 무산되었고(일부 신문에서는 일이 성사된 것처럼 오보를 내기도 했죠), 그 결과는 대우의 공중분해였습니다. 증권 등 일부 업종에서 여전히 대우라는 브랜드가 시장 인지도면에서 퇴색하지 않는 걸 보면, 김 전 회장이 이뤄 놓은 업적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공은 공대로 인정하면서도, 이미 한계 상황에 달했던 부실 경영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단군 이래 추징금 규모로 능가할 자가 없는 특등 경제사범이 된 김 회장은, "중복 계산에 징벌적 의도로 이처럼 고액이 매겨진 건 부당하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며, 저자 신 교수가 (자신의 전공과는 무관하게) 법리적 관점에서 이를 다시 가다듬어 주고 있습니다.

확실히, 벌금도 아니고 추징금에서 "징벌적" 추산을 행한 건, 영미법이 아닌 독법계를 따르는 우리 법제상 무리한 처사입니다. 아마도 저는, 형벌인 "벌금"으로 처리할 경우 "사면"의 형식으로 유야무야될 수 있기에, 부가형인 추징금으로 이의 감면을 어렵게 한 숙려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법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연 어떨까요? 이에 대한 판단 역시 독자가 해야 할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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