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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을 지휘하라 - 지속 가능한 창조와 혁신을 이끄는 힘
에드 캣멀.에이미 월러스 지음, 윤태경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뿌듯한 보람이 느껴지는 내용이었습니다. 정말 이런 책이라면 누구한테 권해 줘도 욕 안 먹겠다 싶었고, 만약 만족 못 하는 이가 있다면 찾아가서 제가 욕을 해 주고 싶을 만큼요^^ 책을 잡고 보통 하루면 끝을 냅니다만, 이 책은 지난 9월 말에 사서 지금까지 읽었습니다.
일단 자계서 같은 책 제목도 그렇고, 첫 1장의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권두에 "스티브 잡스에게 이 책을 바친다" 같은 말이 뜬금 없이 붙어 있는 것도 그렇구요. 잡스 책은 그간 너무 많이 읽어서 좀 지겨웠고, 에드 캣멀의 첫 저서라고 해서 샀는데 잡스 이야기가 나오면(이 사람 이야기가 일단 나왔다 하면, 어디 적당히 나오고 마는 수준이겠습니까?) 에드 캣멀에 대해서 좀 알고 싶었던 독자로서는 아무래도 품었던 기대가 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에드 캣멀 단독 명의가 아닌, 에이미 월러스라는 (제게는) 낯선 이름의 공저자가 같이 붙어 있는 것도 일단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썼다고 해도 대필인 경우가 많은 세상이지 않습니까. 그러고 나서 다시 제목을 보니, 더더욱 자계서처럼 보였습니다. 자계서라고 해도 진정 자기 발전을 위한 의욕으로 가득한 독자에게는, 설사 흔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다 성장을 위한 자양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특히 기업가의 책이라면 정말 그 기업가 본인의 육성을 듣고 싶은 게 독자의 바람입니다. 명언 인용은 이제 좀 지겹다고나 할까요.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최소한 제게는 "이 책은 에드 캣멀 본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책이고, 할 수 없는 말이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어느 책이든 그렇듯, 책 처음(혹은 뒤표지)에는 각계 인사들의 다양한 추천사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 중 어떤 것을 보면, "..... 인 작품"이란 말이 나와 있더군요. "작품"이라... 유명 인사의 회고록, 혹은 어떤 형식의 테마북이라고 해도, 그걸 "작품"이라고까지 불러 주는 건 그리 흔치는 않습니다(아니면 단순한 오용이던지). 그 말을 읽고 나서 다시 책 표지를 보았더랬습니다. 라틴어로 "작품"이라고 하면 opus, 그 복수 형태는 opera죠. 벌건 배경에 실루엣으로 표현된 어느 지휘자가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하자면 지휘자이니, 그 지휘자가 내 놓은 책이라 '작품'인가?" 처음 책 읽기 싫을 때는 이처럼 온갖 잡생각이 꼬리를 무는 게 제 버릇이어서요.

읽어 보니, 이 책은 정말로 "창의성을 지휘하는" 내용이더라구요. 에드 캣멀은 다들 아는 것처럼, 그냥 팀이라고 해야 할지, 밴드라고 해야 할지, 정말 회사로 분류해야 할지 모를 어메이징한 집단 픽사의 설립자이자 CEO입니다. 다들 기억하는 것처럼 1990년대 초반은, 한때 활기를 완전히 잃었던 미국 애니메이션이 화려한 중흥을 맞이했던 시기입니다. 1990년부터 4년 연속으로 흥행 대박을 쳤던 디즈니의 성과는, 지금에 들어서야 분석가들의 평가 대상이 되고 어느 정도 고착된 어구로 자리매김된 게 아닙니다. 이미 그 당시에도 (심지어 한국 언론에서도) 대중 문화가 아닌 경영이론상의 관심사로 떠오른 바 있습니다.
캣멀은 제가 보기에 화려한 변설가는 못 되지 싶습니다. 그 예로, 과연 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싶은 사람 입에서 나올 만한, 이거는 진짜 자기 표현 맞는가 보다 싶은 개념이 나옵니다. "아기 키우기"와 "짐승 먹이 주기"가 그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뭔 소린가. 소규모 조직을 정성 들여 성장시키고, 본래의 목적에 맞게 매뉴얼한 주의를 매 단계마다 일일이 기울이는 건 "아기 키우기"입니다. 아기를 키우는 건, 엄마가 들인 노력에 꼭 양적으로 비례해서 성과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양적으로 정성을 들여도, 자기가 원하는 보호를 못 받는다 싶으면 꼭 울고 보채고 하는 게 아기겠죠(모르긴 해도). 별 노력을 안 쏟는다 싶어도, 꼭 필요한 정성이 제공되면 바로 만족하고 해맑은 웃음을 띠는 게 아기겠죠. 이러다가도 언제 한 순간 돌변해서 자기 집은 물론 이웃들 잠까지 다 깨울 지도 모르는 게 아기입니다. 회사에서 분명, 이런 "아기 키우기"의 마인드로 임해야 하는 작업과 섹터가 따로 있다는 게 그의 의견입니다.

"짐승 먹이 주기"는 그 반대입니다. 짐승은 질보다 양입니다. 일단 외적 시설을 잘 갖추고, 먹이를 풍부히 공급하고, 치밀한 시스템적 관리에 소홀함이 없는 게 "사랑" 같은 비정형적 요소보다 더 우선입니다. 캣멀은 예컨대 GM이나 IBM 같은 대형 회사가 보다 더 의존하는 조직 패턴이 이것이라고 분류합니다. 반면 자기가 꾸려 온 픽사 같은 회사는 "아기 키우기"를 하는 조직이라는 거죠.
자, 그럼 "짐승 키우기"는 나쁘고, "아기 키우기"는 무조건 좋은 것인가? 그가 한때 상관으로 모시고, 지금도 여전히 숭배하는 스티브 잡스라면, 아마 "A는 좋고, B는 나쁘다"는 식으로, 명쾌한 도그마화를 시도했을 겁니다. 그런데 저자 캣멀은 (이 책 곳곳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잡스와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른 유형"의 인간입니다. 그런 그가, "모든 회사는 아기 키우듯 키워야 한다"고 주장할 리 없습니다. 사실 캣멀 아니라 누구에게도, 회사를 "전사(全社)적으로" 아기 키우듯 키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요즘 구멍가게도 그런 식으로 운영되지는 못하지 싶습니다.
캣멀은 오히려 "짐승 먹이주기"는 어느 회사에 있어서든 필요하고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합니다. 당연하죠. 외연 확장에 무관심한 회사가, 어떻게 지속 가능한 성장은 고사하고 그저 현상 유지라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사실 디즈니가 1990년대 초 이래 계속 픽사와 외주의 형태로만 관계를 유지한 건, 캣멀이나 디즈니로나 최상의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그때는 디즈니 역시 (의식을 했건 못했건) "아기 키우기"를 잘하는 기업이었고, 캣멀은 아직 신출내기라 경영에 눈에 뜨이지 못했을 시점이었겠죠. 결국 그를 알아 본 것도, 기이한 독불장군이자 나르시스면서도 인재를 감별하는 안목만큼은 탁월했던(안 그럴 것 같아도) 잡스였습니다.
캣멀은 드디어 디즈니의 CEO로 부임합니다. 첫날 회사를 둘러 보니, 직원들의 책상 위가 깨끗합니다. 다른 회사도 아니고, 직원의 개성이 최대한 살아 있어야 할 사무실 개인 책상의 모습이 이러니 그는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세 번을 묻고서야 "오늘 사장님 부임을 맞아 좋은 인상을 드리기 위해 일제 점검 지시가 내려졌습니다."라는 실토를 들었습니다. 캣멀은 이미 밖에서부터, "왜 디즈니가 점점 하향세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답을, 무려 취임 첫날에 들은 셈입니다.
저는 이 책이, 특히 이런 점에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떤 책은 정당한 질문, 필요한 질문 자체를 제기하지 못하고 시시한 주제만 거론하다가 끝납니다. 어떤 책은, 강렬한 힘을 발산하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러고 뒷감당을 할 듯 말 듯하다가 대충 얼버무리고 끝납니다. 하긴, 이 두 가지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그건 대단히 드문 이른바 "명저"의 반열에 속하는 책이겠습니다만. 캣멀의 이 책은, 올바른 질문을 제시하고(독자의 구미를 미리 예상한 계산적인 주의 환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정직하게 품어 왔던 질문), 그에 대한 자기 자신의 성실한 답을 내어 놓고 마무리짓습니다. 정답 강박증 때문에 애써 정형화한 답을 내어 놓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이 살아 온 치열한 과정이 빚은 딱 그 수준 만큼의 정직한 답을 성실히 이야기합니다. 이런 문제에 정답이 사실 어디 있겠습니까. 정직하고 성실한 소통 자체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정도지요.
경영학 개론 교과서에서 앙상하게 그 이름만 접해 왔던 저스트 인 타임이니 하는 개념들이, 이 책에서는 캣멀의 버전(혹은 에이미 월러스의?)으로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창의력 있는 인재를 기용하는 섹터에선, 아기 키우기 식으로 조직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요즘, 존중받는 직원이 일도 잘한다는 식의 주장도 여러 군데서 제기되고 있습니다만, 캣멀은 철저히, "그들의 창의성을 북돋워주라"는 강력한, 그러나 부드러운 톤의 촉구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뽑을 때, 똑똑하다 싶어 뽑은 인재들 아니었는가. 그런데 왜 뽑고 나서는 부품 취급을 하는가"가 그의 말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맞는 말입니다.
한때 창의력은 CEO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죠. 영화 <토털 리콜>에서 회장님은 그렇게 말합니다. "생각을 하지 마, 누가 생각하라고 했나?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바로 이런 독선적이고 디미니셔스러운 스탠스가, 죽은 조직을 만듭니다. 지휘는 지시가 아니죠. 불협화음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가이드일 뿐입니다. 아무리 지휘자가 빼어나도, 박자 못 맞추고 음 틀리는 단원을 연주 도중에 교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휘자라는 위치가 어차피 한계가 있다면, 단원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고 기를 살리는 게, 요즘 시대의 오케스트라를 가장 잘 이끄는 방책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CEO는 지시가 아닌 지휘를 하는 시대이며, 기계적 능률 부양이 아닌 창의력의 고취야말로 기업이 살아 남을 유일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