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산다는 것에 대하여 - 백 년의 삶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들
박상설 지음 / 토네이도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자연을 사랑하는 이의 마음에 사악함이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사악함이 그런 분에게도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건 아마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본디 사악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00세 시대를 쉽게 운위하는 요즘이라지만, 실제로 우리 주변에 그 정도 연세를 드신 분은 쉽게 보기 힘듭니다. 더군다나 기력이 정정하시고, 젊은이들 못지 않게 정신도 또렷또렷 맑으신 분이라면 말입니다. 저자 박상설 선생은, 평생 동안 글로벌 무대에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며 타의 귀감이 될 인생을 살아 온 분입니다.

 

연치 높으신 분들 중에 자신의 영역에서 뚜렷한 성취를 이룬, 존경할 만한 인사들을 우리 사회는 많이 모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 중에는 지난 시대 한국 고유의 정서, 가치관, 신념에 충실하시다 보니, 지금의 젊은이들과 많은 국면에서 충돌, 갈등을 빚는 분들도 많습니다. 한국이 지금 치르고 있는 내홍 중 상당수는 세대 갈등이거나, 아니면 세대 갈등에서 파생된 것들입니다. 젊은이들도 반성과 수련을 행해야 하겠으나, 세대 갈등의 첫 고리를 푸는 이니셔티브는 (제 생각에) 노년층에서 먼저 취해 주셔야 하지 않나 싶었습니다.

 

세대 갈등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에는 여러 가지 현상과 동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겠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인자를 꼽자면 제 생각에 아마, 지난 시대의 소중한 가치관과, 현재에 있어 표준이 되는 여러 트렌드가, 서로 모순, 상충을 빚는다는 사실도 한몫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제나 그런 건 아니겠지만, 현재의 트렌드는 글로벌 표준과 호흡이 잘 맞는 수가 많죠. 결국, 전통적 미덕과 지향, 그리고 글로벌 가치가, 문화 안에서 서로 유리한 자리를 잡으려 다툼을 빚는 와중에 그 모든 대립과 다툼이 세대갈등이란 이름으로 빚어지는 것 아닐까 합니다.

 

박상설 선생은, 외국에서 오래 생활한 경험이 있는 젊은이보다 더 현대적인 마인드를 지니신 분입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제 생각에, 그 비결은 간단합니다. 처음부터 정신의 좌표를, 글로벌 표준에 맞추고 청년기와 경제활동기를 보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거푸집이 먼저 마련되어 있어야, 그로부터 생성되는 컨텐츠("내용"이라는 원칙적 의미에서의)가 올바른, 혹은 보편적인 성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죠.

 

자, 이런 박상설 선생이, 젊은 시절에도, 그리고 뜻하지 않은 병마로 쓰러지시고 그로부터 기적적인 회복을 한 후에도, 그의 생에서 줄곧 손에서 놓지 않았던 쾌락, 혹은 성찰의 장(상반되어 보이는 이 둘을 겸한다는 게 놀라웠습니다)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오토 캠핑이었습니다.

 

오토 캠핑은, 본디 자연의 아들인 인간이, 자연 속에서 생명을 영위해 나가는 방법의 현대적 재현입니다. 자연이란 엄한 부모님입니다. 자식 귀하다고 오냐오냐 하며, 된 욕구 안된 투정 일일이 다 들어 주다가는, 인간 하나 망쳐 놓기 십상이죠. 자연은 인간을 빚을 때에, 죽지 않고 훌륭히 생존해 남을 만한 자질과 도구를 다 베풀어 주었습니다. 적응에 유리한 신체 구조, 자연의 도전을 이겨 낼 수 있을 만한 적당히 강인한 신체, 앞으로의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빼어난 두뇌 등입니다. 그러나 모든 위험을 한번의 노력으로 다 배제할 수 있는, 만능의 도구는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열심히 노력하면 만물의 영장이 될 수도 있으나, 태만한 마음으로 노력을 않는다면 바로 생존을 위협 받습니다. 자연의 정의롭고 오묘한 이치가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박 선생은 그래서, 자연에 마냥 순종하지 않고(그러다가는 목숨을 잃기나 딱 좋죠) 적정 선에서 나의 편의를 추구하고 자연에 도전도 하되, 자연을 마냥 정복하려 들며 나의 기본 생존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인간이 어머니 대지를 섬기는 초심을 회복하는 훈련, 도락, 그리고 제의(祭儀)가 바로 오토캠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업화되고 불순한 목적이 끼어 있으며, 그로부터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는 편의 위주의 캠핑 프로그램은 경멸 받아 마땅합니다. 오토캠핑이야말로, 인간이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자아와 타인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마당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글로벌 표준을 논하면서 웬 오토캠핑인가? 미국인, 독일인 할 것 없이, 자신의 분야에서 뚜렷한 성취를 이루고, 생각하는 삶, 존재 이유를 반추하는 인생을 추구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 오토캠핑에 기쁨과 정성을 들이고 있더라는 게 저자의 경험입니다. 오토캠핑은 준비가 번거롭고, 가벼운 신체 부상의 위험도 언제나 따르며, 순간순간 머리도 써야 하고, 신체적으로도 주의를 항시 기울여야 합니다. 적다 할 수 없는 노동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완수 후에 찾아오는 기쁨은 무엇에 비길 게 아닙니다. 완수 후에 기쁨만 체험하는 게 아닙니다. 깨달음이 있습니다. 자연이 낳아 준 원초적 모습의 "내"가 누구였는지, 오토캠핑은 총체적으로 깨닫게 도와 줍니다.

자연에서의 삶이라고 해서 마냥 낭만적으로 볼 건 아닙니다. 낭만은커녕, 산이란 사회에서 도태되고 천대 받던 이들이, 흘러흘러 갈 데가 없어 주저앉은 곳이기도 합니다. 미국 애팔래치아 산악 지대는 아직도 그런 이들이 주거를 이루고 있고, 이런 계층 출신들은 사회로 다시 나와도, 피부색에 무관하게 차별을 받습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굳이 할 것도 없습니다. 나이 든 분들에게 여쭤 보면(이 책을 읽고 실제로 제가, 곁에 계신 분께 물어 봤습니다), 산에서 사는 삶에 대해 손사래를 휘휘 치는 분들이 태반일 겁니다. 그분들은 대뜸 "화전민"을 떠올리기 때문이죠. 박 선생도 이 책에서 "화전민" 이야기를 하십니다.

 

화전민들은 참으로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선 농사가 제대로 안 되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지극히 열악한 작물만을 섭취해야 합니다, 사람이 무서워 산으로 숨어 들었건만, 생활에서 느끼고 겪어야 하는 불편이란 지옥을 방불케 했나 봅니다. 그 와중에, 구성원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의 심각함도 이루말할 수 없습니다. 박 선생은 이 주제를 이야기하며, 박정희 정부 당시 일어났던 이승복 사건과, 이것이 계기가 되었던 강제 이주 정책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본디 어느 외계에서 떨어진 게 아닌, 오랜 진화 과정에서 발달시킨 천성 면에서나, 지금 당장 보유한 체질, 성향 면에서나, 자연 속에서만 최상의 건강과 활력을 발휘하게 설계된 존재입니다. 그런 숙명을 거부하고, 지금 우리는 도시라는 허울 안에 포장된 허위와 기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간단한 발상의 전환, 그리고 그리 큰 무리가 따르지 않을 실천만 해 준다면, 다른 차원의 체험과 각성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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