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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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아 읽기 전이었습니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에서 "... 그래서 사튀르닌은 칼을 들고 푸른수염의 침실로 돌진했다. 그가 결코 살인마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라는 대목을 읽고, 여러 이유에서 고개가 갸웃해졌습니다.


- 그런다고 뭐가 증명이 되나? 증명하려는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 제법 내공을 갖춘 저술가라고 해도, (여성의 경우) 소위 "팬심"에 빠져 作中에서 무리한 시도를 하는 수가 있다. 어려서부터 이 캐릭터에 너무 깊이 빠져 왔던 나머지, 이제는 돌아 와 거울 앞에 그저 조용히 서야 할 중년(어느새 그렇게 되었죠)의 노통브가 드디어 뒷감당 못할 일을 벌이는구나.
- 이미 닫힌 결말이 굳은 이 설화(페로 이전에도 근원 설화는 존재)를 두고, 근사한 어떤 재해석의 시도도 무위로 끝날 것이다.


반면, La Barbe bleue를, 이름도 긴 "돈 엘레미리오 니발 이 밀카르"라는, 스페인 귀족으로 국적과 혈통을 바꿔 놓은 것은 정말 기발했습니다. 이 돈 엘레미리오가 뭐라고 하는지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너무도 고귀한 혈통이라, 어차피 누구와 결혼해도 신분을 떨어뜨리게 된다."
"귀족은 '스페인 귀족'이라고 해야 어색하지 않다. '프랑스 귀족'이라니,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들리는가?"
"헨리 8세라니? 어떻게 감히 그 천박한 튜더 녀석과 나를 비교할 수 있나?"


월세방을 구하러 왔다 사라진 8명의 여인은 다 평민들인데, 어떻게 그녀들을 사랑할 수 있(었)냐고 하니, 그가 내놓은 대답이 저 첫번째 것입니다. 그 뒤엔, 어설픈 귀족 행세를 하는 자들보다, 차라리 소박한 평민과의 결합이 더 낫다는 말도 이어집니다.

두번째 말도 틀린 게 아니죠. 프랑스는 대혁명 이전에도 신분 질서가 문란하여, 귀족의 족보도 금전으로 사 들이고 칭호와 작위를 사칭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반면 스페인은, 비록 그 때문에 역사 발전이 가로막혔건 아니건 간에, 누구의 조상이 어디서 뭐 하던 자였는지는 명확했고, 한번 틀어진 기득권이 좀처럼 혈통의 손아귀에서 놓여 나지 않았던 까닭에, 계층 이동이 불가능했던 건 확실합니다.

감히 그의 가문이, 랭커스터와 요크의 영향을 고루도 받은 튜더를 우습게 볼 격(格)과 위신을 갖추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여튼 "그 튜더"의 행동거지가 지극히 천박했던 것도 도저히 부인 못 할 "역사적 사실"입니다.

사튀르닌이, 시중에 파다한 나쁜 평판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 놓는 방을 얻기로 결정한 건 여러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첫째, 일단 그런 나쁜 소문을, 방을 구하러 면접을 보러 가지 전까지는 듣지 못했다. (이유가 있는 것이, 속물스러운 경향이 상당히 적은 아가씨였고, 다음으로 그녀는 프랑스 토박이가 아닌 벨기에인이기 때문이죠)


둘째, 그 정도 가격(오백 유로라고 하네요. 물론 배경은 현대 프랑스입니다)에 그 정도의 호사와 편의, 쾌적을 누릴 수 있는 방은 파리에 없다.


셋째, 그녀는 도무지 겁이 없고, 오히려 그런 나쁜 소문의 주인공을 한번 만나서 제 할 소리를 퍼부어 주고 싶은 당찬 기질이 있다.


넷째, 그녀는 천박한 호기심 때문에 스스로 맺은 약속(집주인인 돈 엘레미리오의 암실, 즉 사진 현상실에 들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지금까지 여덟 명의 젏은 여성 세입자가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을 깨지 않을 자신이 있고, 호기심에 굴복하기엔 너무 시니컬한 성격이다(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난 관심 없어)


다섯째, 그녀는 사실, 아주 옛적부터 "푸른 수염"에 푹 빠졌던 아멜리 노통브의 분신이고, 지금 작품 속에서 이 푸른 수염을 열심히 인터뷰도 하고 다른 미션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농담입니다)

푸른 수염, 아니 돈 엘레미리오는 자신과 자신의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위인입니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세상의 질서는, 레콩키스타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규범으로 확정되었던 그 가치관, 그 제도, 그 이상과 신념과 명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는 골수 가톨릭 신자요, 다만 현대의 썩고 타협적인 미사에 나갈 수 없어 전담 신부를 불러 자기 집에서 예배를 올립니다.


"왜 미사에 나가지 않으시죠?"
"미사가 내게로 오니까."


그는 집 안에서 여러 문헌과 서적을 탐독합니다. 그 중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녀 사냥이 한창일 때, 토르케마다로 대유(代喩)되는 종교 재판 기록도 포함됩니다. 그냥 재판 서류를 읽어도 재미는커녕 독해 과정에 엄청난 고통이 따를 만한데, 하물며 수백 년 전의 마녀 처단 기록이라니! 사튀르닌은 묻습니다.

"그 재판이, 이전 시대의 야만과 비교하여 엄청난 진보라고 하셨는데, 그 재판을 거쳐서 살아남은 마녀가 얼마나 되나요?"
"한 사람도 없소."
"풋, 정말 엄청난 진보군요."
"어차피 그 신명(神明) 재판은, 마녀를 마녀로 밝혀 내었을 뿐이니까!(그런 마녀들이 재판이라는 호사를 누린 게 어디냐는 뜻)"

돈 엘레미리오는 사튀르닌과 한 치의 양보 없이 치고받습니다. 그 배경은, 바로 이 유서 깊은 가문의 전통과 사치가 압축되어 있는 저녁 식사 자리입니다. 식사가 준비되면, 하인 멜렌이 와서 정중한 어조로 사튀르닌에게 주인의 초청 의사를 전합니다. 물론 사튀르닌은 거절할 수 있습니다. 초청에 응하고 그 비싼 한 끼 식사를 대접받아도 그녀가 추가로 부담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어느날 정찬 자리에서, 마침내 스스로를 신이라고까지 칭하는 엘레미리오의 말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사튀르닌은 쏘아붙입니다. "정신병원에 가기 딱 좋은 분이시네요!" 사실 사튀르닌은 그 전, 첫 만남 자리에서 "왜 자살하지 않으세요?"라 는 더 심한 말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렸을 때 급사했다는 당신 부모님은 실제로 당신이 죽인 것 아니냐고까지 몰아 붙입니다. 고독한 귀족은 강력히 부인하는데, 사실 그는 물어보지도 않은 질문에 애써 대답을 하지 않을망정, 거짓 증언을 하지는 않습니다. 귀족이니까요.

이런 발칙하기 짝이 없는 사튀르닌에게, 엘레미리오는 정직한 고백을 털어 놓습니다. "난 당신을 사랑하오. 운명인 것 같소." 일단은 처음 면접 자리에서부터 반했다고 둘러대지만, 사실은 사튀르닌이 색채로서의 "노랑"을 거론했을 때 본격적으로 눈이 번쩍 뜨였던 것입니다. 물론 키가 크고 날씬한 몸매(엘레미리오는 "표범 같은 당신의 몸을 상상했소."라고도 털어 놓습니다)를 지닌 사튀르닌의 외양에도 매혹된 바 있었을 겁니다.

야만과 문명을 가르는 첫째 조건을, 날로 먹느냐 요리를 해서 먹느냐로 꼽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 지극히 까다롭고 세련된 취향의 귀족은, 그래서인지 직접 요리를 해 먹기도 합니다. 사튀르닌에 대한 그의 첫째 고백은, 손수 만든 생토노레를 꺼내 귀가하는 그녀에게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생토노레를 내밀며 사튀르닌에게 뭐라고 하는지 인용해 보겠습니다.
"이 케이크에 에스파냐의 위신을 부여하기 위해
부글부글 끓는 캐러멜에 금 잎을 몇 장 슬쩍 넣고 싶은 유혹을 느꼈지만
내가 타인의 취향에 열려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꾹 참았소."


마지막 줄이 얼마나 귀여운 말인지 한번 보십시오. 사실 엘레미리오는 에스파냐의 위신 부여(소위!)라는 동기 말고도, 생토노레에 금을 집어 넣어야 할 더 강력한 내적 욕구가 있었습니다. 다만 스포일링이 되므로 여기에 제가 적을 수는 없네요.  귀족들에게 금 흡입이라는 오랜 풍속이 있었다는 사실 외에도, 이 절박한 귀족은 여태 자신이 살아 온 이유(적은 나이도 아닙니다)를 증명하기 위해 ars magna(라틴어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위대한 기예"라는 뜻입니다. 이 맥락에서 어떤 뜻인지는 이상해 선생의 역주를 보시구요)를 드디어, 드디어 이 "제 5원소"에게 당장 베풀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반칙입니다. 그렇게 귀착되어야 할 마땅한 운명이긴 한데, 그런 방법으로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왜 자기 아들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죽게 했을까요?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려면 그냥 해 주면 안되나요? 대가를 치러야만 해 주겠다니 장사꾼이나 마찬가지군요."

사튀르닌으로부터 이 말을 들었을 때, 돈 엘레미리오는 속으로 뜨끔했을 겁니다. 그는 끝에 가서 "한 번도 그렇게 생각(무엇인지는 스포일러라서 적을 수 없습니다)해 본 적 없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소"라고 합니다. 그는 착각과 환상 속에, 자신의 가문을 "그리스도의 핏줄'이라고 여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왜 제가 이 리뷰에 이 말을 썼는지 다시 생각해들 보셨으면 합니다.

그의 혈통은 솔직히 좀 수상쩍기도 합니다. 아랍 어는 읽지를 못하고(이베리아 반도의 자랑스러운 귀족치고는 좀 부끄럽습니다), 조상은 카르타고에서 건너온 카탈루냐인인데, 다만 그도 그렇고 그 선조도 그렇고 에스파냐 인이 되기를 선택한 카탈루냐인입니다(이런 예는 너무도 많습니다. 꼭 민족 반역자로 볼 건 아닙니다^^ 그건 우리식 기준이구요). 그러니 순전히 혈통으로만 보자면 꼭 돈키호테와 자신을 동일시할 이유는 없습니다(라만차는 어디까지나 마드리드의 영향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돈키호테의 특징을 취해서 거기에 15를 곱해 보시오.
그러면 그리스도가 나올 거요."

라고 말합니다.

사실 여기서, 돈키호테를 "돈 엘레미리오"로, 그리스도를 "돈키호테"로 바꾸어 놓아도 이 명제는 (돈 엘레미리오 본인에게와 소설의 맥락에 한해) 타당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돈 엘레미리오에 225를 곱하면, 이번에는 그리스도가 나오는 셈입니다.  요 다음 장면에 스스로를 신이라 부르므로, 이는 아주 일관성 있는 내러티브입니다.

사튀르닌이 언제나 직설적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자기 생각에 상대가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한다 싶을 때, "당신의 말은 기묘한 인과성을 지니고 있군요."라며 점잖게 꼬집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과연 돈 엘레미리오는 광인일까요? 그가 이런 말을 할 때는 정말 정신의 건전성(sanity)이 염려되기도 합니다.


"우리 가문이 이리 프랑스로 망명 온 건, 조상 중 한 분(할아버지나 조부라고 하면 될 걸 굳이 "조상"이라고 하네요)이, 프랑코 총독을 급진 좌파(헉!)로 취급했다가 그만 그의 눈밖에 나고 말았소."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의 적들 역시 우리를 눈꼴시어 한다오."

노통브 특유의 유머가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프랑코를 좌파로 취급할 정도의 완고한 우경이라면, 대체 본격 좌파는 어떻게 본다는 뜻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이유를 모르겠다니!

그러나 돈 엘레미리오는, 사튀르닌을 반하게 할 만한 섬세한 위인이었습니다. 생토노레를 손수 만들어 먹인 데에 이어, 이번에는 자기가 직접 바느질을 하여, 쓰다듬으면 손 끝이 미안해 질 만큼의 질 좋은 샌노란 안감과, 만든 이의 섬세함과 장인적 정성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촘촘한 바느질이 인상적인 치마를 선사합니다. 어쩌면 귀족의 본질적 정의는, 그 족보사항이 아닌 기질과 취향, 행동거지, 사고방식의 섬세함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은 진짜 귀족이고, 나는 그와 사랑에 빠져야만 하겠다!

그래서 사튀르닌은, (제가 이 리뷰 맨 처음에 적었듯이) 식칼을 들고 (별로 뭘 걸치지 않은 잠옷 바람으로 "거의 벌거벗다시피[엘레미리오의 표현입니다]") 푸른 수염의 침실로 쳐들어 간 겁니다.

"당신 같은 이가 살인마일 리 없어!"

이 소설의 주제는 색(色)의 탐구입니다. 색상표를 보면 색만큼 선명하고 똑 부러지는 게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런 색 역시 빛이 사물과 부딪혀서 내는 파장의 장난일 뿐입니다. 그저 우연의 산물입니다. 책에 그런 말은 없습니다만, 영미인들(타 백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은 yellow란 단어에 "비겁한. 천한"의 뜻을 그대로 집어 넣고 사용하지 않습니까? 반면 약간의 채도와 명도 차가 있을 뿐인 gold에 대해서는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면서 말입니다. 똑같은 백발인데도 grey hair와 white hair가 현저한 차이의 느낌인 것처럼요.

사튀르닌은, "색을 몰라도 사는 데에는 전혀 지장 없다. 색을 두고 일본인들은 그래서 쾌락의 동의어로 쓰기도 한다(그건 그녀의 착각입니다. 당연 중국의 구법승들이 오리지널이죠. 일본이 여기서 왜 나옵니까). 그러나 색을 모르면, 궁극의 쾌락은 결코 모른 채 생을 마치게 된다."고 합니다. 엘레미리오는 "그건 미처 몰랐던 바지만 멋진 이야기"라며 동의합니다. 수수께끼(무엇이었을까요?)를 풀어낸 사튀르닌에게, 이 귀족은 이제 전폭적인 인정과 대등한 지위를 허(許)합니다. 이는 그로서는 영혼의 동요를 불러일으킬 만큼 중대한 결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부른 결과는,... (책을 직접 읽어 보십시오)

"니발 이 밀카르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문 바깥의 사람은 모두 평민이라오. 어느 가문이 감히 우리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할 수 있다는 말이오? 나는 그런 망상보다는 차라리 우연이 좋소."


결국, 색(色)도 그렇고 공(空)도 그렇고, 모두가 우연일 뿐입니다. 그 우연 속에서 성(聖)스러움을 발견하는 능력을 serendipity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암실은 비어 있기도 하고, 일곱 빛깔과 나머지 두 색채의 결합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할 것입니다. 돈 키호테와 연쇄 살인마 사이에 그리스도가 있을 수도 있고, 번화가를 지나가는 어느 새침한 아가씨의 백 안에서 느닷 세상의 종말과 기적이 동시에 튀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 사튀르닌은 으로 변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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