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 고 백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잭 리처의 정신적 본향은 어디까지나 군대입니다. 그는 아직도 특수 부대 대장으로서의 정체감이 자아의 최우선이며, 그를 가장 존경하고 따랐던 이들도 군인들이고, 그의 가장 자랑스러운 행적도 군인으로서의 그것들입니다. 하지만 그는 전역 후에는 영낙없는 떠돌이 신세인데, 사실 사내로서 멋진 그의 모습에 감탄하기도 하면서도, 대체 왜 저 정도 되는 사람이 저렇게 살아야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여튼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군대로부터, 그 중에서도 모부대發로, 커다한 위기가 바로 그에게 닥칩니다. 하나는 그가 특수부대원 시절 모 민간인(이라고는 하나 질 나쁜 깡패입니다)을 구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 또 하나는 서울(!)에 군인 신분으로 체류하던 시절(군인 신분이 아니었으면 큰 문제가 안 됩니다), 한 여인과 간통 끝에 아이 하나를 낳게 한 사건입니다. 이상하게도 이 두 사건이 동시에 소송의 형식으로 그의 발목을 옭죄어, 그는 간만에 접근한 부대 소재지로부터 멀리 떨어지라는 압력을 받습니다.  

 

범법을 저질렀으면 공권력으로부터 구금이나 출두의 압박이 가해져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그를 최우선적으로 찾은 물리력은 "당장 이곳을 떠나." 같은 어설픈 협박입니다. 누가 이런 시도를 했던 간에, 그 방법이 옳지 못했습니다. 옳지 못했다고 판단하는 이유 중 하나는, "FIGHT OR FLIGHT"의 상황에서 그는 언제나 "맞서 싸우는 편"을 선택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가 대단히 치밀하고 잘 돌아가는 두뇌를 가진 이여서, 사리에 맞지 않다 싶은 상황에 대해서는 겁에 질리기보다 "왜 이런 현상이 내게...?" 같은 의문을 먼저 품는다는 점입니다. 

 

람보(의 완력, 용기)와 셜록 홈즈(의 두뇌)를 결합한 사기 유닛 답게 그는 이 거대한 음모에 맞서 싸우는 편을 선택하고, 반(半) 자진(自進)하 여 영창에 구금되었다가, 같은 시설에 수감된 터너 소령(시리즈 역대급으로 꼽아야 할 미모의 소유자인데다, 사리 판단도 참으로 현명하게 돌아가는 여성입니다. 리처와의 두어 번 정사신을 통해 우리 독자에게 주는 서비스의 강도도 녹록지 않습니다)과 함께 동반 탈옥하여, 모든 정보망(카드 결제 내역, 항공기 탑승 이력, 거대 호텔 체크인 사실 등등)을 손 안에 넣고 둘을 추적하는 가공할 적을 따돌릴 뿐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역으로 압박하기까지 합니다.  

 

리 차일드의 이 시리즈를 가리켜 페이지 터너라고 하는 건, 단지 스토리 전개상의 재미라든가 캐릭터의 매력 형성에 과다 투자된 자원 따위의 덕분이 아닙니다(매력이 고작 그것뿐이었다면 이 시리즈가 그리 장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건의 진행은 최대한 빠르게 하되(따라서 간결하고 호흡 짧은 문장이 사용됩니다만), 리처의 심리 묘사(특히 상대의 육체적 공격 전술을 미리 읽고, 자신의 대응 방법을 연구하는 모습)나,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풍경, 배경의 묘사(외계인이 보았을 때, 이 별의 생명체들은 음료수나 손톱 관리가 외과 시술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여길 것이라는 등의 표현),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블랙 유머와 repartee가, 마치 이 소설이 헤밍웨이식 간결체로 일관하는 듯한 착각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는 독자에게 안기기 때문입니다. 밀도와 깊이 있는 내용 이해를 버거워하는 독자에게도 그 수용 범위 안에서 선택적으로 쾌감을 안겨 주고, 소설에 푹 몰입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그만의 깊이를 따로 선사하는 데에서, 리 차일드의 작가적 역량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과연 15세 소녀 사만다는 잭의 딸일까 아닐까? 악당들의 하수인들을 마침내 거리에서 퇴치하고, 이 가공할 음모 최종의 mastermind를 마침내 밝혀 내는 과정 말고도, 이런 자잘한 재미를 곳곳에 심어 놓아 독자가 대체 딴 데 정신을 못 팔게 만듭니다. 페이지 터너가 아니라 페이지키퍼입니다. 빨리 읽어내고 나면 그 아까움과 아쉬움을 어찌할까 하는 행복한 걱정에, 아끼고 살펴 가며 책장을 넘기게 하기 때문이지요.

 

아주 불만이 없는 건 아닙니다. 소송 사건(그 중 하나는 형사사건인데요)의 개시와 진행이, 변호사(군인 신분이라고는 하나)들의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붊명확할 수도 있을까 하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한때 그렇게나 리처를 옭죄던 압박이, "편하게도(리처의 해명에 대해 불만을 털어 놓던 당국자들의 표현이기도 하죠)" 한순간에 그리 "관련 서류 열람"만으로 해소될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리뷰에서  결말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결국 "태산명동에 서일필"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들었구요. 정경호씨의 시원시원한 번역은 언제나 감탄스럽지만(번역문 같지가 않습니다), "파슈툰"처럼 굳이 우리 눈과 입에 익은 고유명사를 "패쉬턴"으로 쓸 필요가 있었을지요. I'll see what I can do를 "내가 할수 잇는 게 무엇인지 찾아 볼게요."라고 옮긴 건 좀 기계적이라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불만은 다 잠재울 수 있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나, 너무나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오래 전 원서로 한 번 읽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독자인 저에게도, 이 한국어판은 여전한 쾌감, 스릴러가 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만족을 다 안겨다 주었습니다. 영화도 빨리 개봉했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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