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에 비친 달
정찬주 지음 / 작가정신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날 우리들은 세종대왕을 두고, 위대한 정치가다, 혹은 탁월한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같은 생각을 맨 먼저 떠올리지는 보통 않습니다. 물론 그는 가시적인 정치적 업적을 너무도 뚜렷이, 다수 남긴 군주였고, (이 소설에서도 잘 묘사되는 것처럼) 때로는 강경하게, 때로는 온화하고 너그로운 모습으로 관료와 사대부, 뭇 백성을 잘 다독인 리더였습니다. 하지만, 세종 대왕 하면 그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개념, 단어는 바로 "한글"입니다. 한글이야말로 우리에게 세종대왕이 선사해 준 가장 값진 선물이요, 이후 그 숱한 민족적 수난을 겪으면서도 우리가 우리의 혼과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해 준 근원적 신분증이자 고통과 간난의 항해 중 가라앉지 않게 우리를 꼬옥 품어 준 방주와도 같습니다.

 

이런 한글의 창제 과정에, 집현전 학사 외에 다른 누군가가 개입하여, 없어서는 안 될 소금 같은 역할을 해 내고 있었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크게 당혹스러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피치 못할 곡절이 있어 그의 공헌이 기록에서 누락되었다면, 우리는 매우 늦었으나마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저 당연히 우리에게 주어진 게 아니라 그의 공적이 아니었으면 영영 우리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던 한글에 대해, 다시금 고마움을 되새겨야 할지도 모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일단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한 것은 서력으로 1443년이고, 이를 시용(試用)한 후 세상에 반포한 건 그로부터 3년 후입니다. 한편, 조선이 대체한 고려 왕조의 대(代)에, 승려 묘청이 서경 천도 운동을 통해 민족 정기의  부활을 시도한 건 1135년의 일입니다. 두 사건 사이에 대략 삼백 년의 간격이 뜨나, 한글 창제의 시점과 우리 시대는 그 곱절인 육백 년을 격(隔)하고 있습니다. 아주 큰 관점에서 보자면(더군다나 기계적으로 측량 불가요 순환적이기까지 한 불가적 시간 개념에서는) 묘청과 세종의 시대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서로이웃의 구간인지도 모릅니다.

 

신라 원광 법사가 세속 오계를 통해 해동 식의 호국 불교 개념을 정립한 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이웃의 거대한 중화 제국의 유교적 문화 유입에 맞서, 민족적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치열한 움직임을 보여 왔습니다.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사대주의적 유교 관료에 맞서, 이들은 대체로 풍수 지리 사상, 전통의 풍류도를 대폭 수용하여, 차츰 의식과 예법이 대륙의 그것을 좇아가는 겨레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바로잡으려 애썼습니다. 그 중에 원효가 있었고, 묘청이 있었으며,  무학 대사가 있었고,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인 신미대사가 있었습니다. 아마 백 오십 년 후의 휴정, 유정 대사 같은 이들도 이 범주에 넣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은, 신미 대사를 축으로 하여, 민족 정기와 부처님의 가르침(유학보다 이 땅에 정착한 지 훨씬 오래된)을 지키려는 세력과, 반대편에 서서 사대와 모화를 촉진하여 자측의 기득권을 유지, 확장하려는 세력 간의 집요하고 처절한 투쟁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종 대왕은 그 선왕인 태종 이방원과는 달리, 한편으로는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한 모후 원경왕후에 대한 애틋한 추모의 정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개인적 소신과 성향 때문에, 유학도들의 등쌀 때문에 궁지에 몰린 불교계를 음으로 양으로 후원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어리석은 백성에게 행정적 통치 지침이 잘 전달되게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행적을 정확히, 그리고 널리 깨우치게 하기 위한 의도로, 한글이라는 표음 문자를 창제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세종 자신도 산스크리트어의 문자 표기인 범자의 원리에 대해 밝은 편이었지만, 신미 대사 역시 남다르게 영특한 두뇌와 스승인 함허 대사의 가르침에 힘입어, 젊은 시절부터 범자의 원리에 익숙한 편이었습니다. 세종 대왕을 우연히 알현하고(꼭 우연은 아닌 게, 법석에서 신미 대사의 독경 소리가 유난히 낭랑하고 우렁찼다고 합니다), 그의 신임을 받아 여러 차례 독대한 끝에, 그는 민족 고유의 문자를 고안하라는 밀명을 받게 됩니다. 한자와 다른 문자를 만들어 내는 건 사대의 원칙에 반하고 공맹의 가르침(특히 성리학인 걸로 이 소설에선 설정되고 있습니다)에 어긋난다 하여, 이 사실이 알려지면 대역죄로 추포되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현대의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소설은 그런 정황을 치밀하고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미대사를 남몰래 사모하던 희우(기쁜 비라는 뜻으로, 신미대사처럼 몰락 양반가 출신의 처녀입니다)는 역시 우연한 기회에 미행(微行) 중이던 세종 대왕을 만나 사헌부의 다모로 발탁됩니다. 양반가라고는 하나 이 집안 역시 불교를 오래 숭상하던 가풍이 있었고, 그 때문에 풍비박산의 아픔을 겪은지라, 희우는 행동거지 말 한 마디마다 부처님 섬기는 마음을 숨기질 못합니다. 물론 이를 지켜 보는 우리 독자는 조마조마하기 이를 데 없구요.

 

우리는 한글 창제 작업이라면, 세종 대왕이 주도하고 그 기술적 실무를 집현전 학사 정인지가 맡아, 책 <훈민정음>에 그 서문까지 쓴 걸로 알고 있습니다(이른바 정인지 序). 그러나 이 소설은, 정음청 학사를 제수 받은 신미 대사야말로 創과 製 중 후자의 핵심 직무를 위임 받아,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떠 자 모 28자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정인지가, <훈민정음> 서문까지 쓴 공로자로 기록되었는가? 그 속깊은 사연(작가가 창조해 낸)은 이 소설을 직접 읽어 보셔야겠죠.

 

문장이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표현이 많아, 월탄이나 김성한 풍의 역사 소설 줄겨 읽으시는 분들이 크게 반길 만합니다. 몇몇 고문(성녕대군 추도문)은 작가님의 뻬어난 한문 실력과 우리말 표현력으로 (원문인 한문으로부터) 번역되어 있어, 그것만으로도 좋은 공부가 되고 뜻 깊은 문학 감상이 됩니다. 다만 생소한 불교 용어가 몇 있어서(예를 들어 院主 같은 말은 한자 표기도 빠져 있어, 저는 사람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읽어 나갈 때 다소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세자 문종, 수양, 양녕, 이 세 왕자가 모두 신미 대사를 스승으로 섬기고, 그에게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꼼꼼히도 받아들이는 모습은 흥미롭습니다. 실제로 삼형제는 하나같이 불교에 경도되었고, 수양은 특히 <석보상절>을 직접 지어 부왕 세종으로부터 그 화답인 <월인천강지곡>을 받아들기도 했죠. 천 개의 강에 달 하나가 그 빛을 고루 내린다는 이 소설의 제목은 여기서 따 온 것입니다. 신미대사는 소설 말미에 세종을 "살아 있는 부처님"으로 칭하는데, 결국 백성을 살리고 바른 정치를 베푸는 위정자가 부처님이나 마찬가지고, 부처님처럼 중요한 위상이라는 작가의 메시지로도 들립니다. 아니면, 깨어 있는 백성 하나하나의 몸짓과 덕행이 모여 이 더러운 땅(예토)을 서방의 극락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일까요? 오늘 밤에도 떠오를 달을 보며 깊이 생각에 잠길 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