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 1930 1
김민주 지음 / 단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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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카와 타이요우라는 이름이 소설에 등장했을 때,  왜 긴 금발에다 날씬한 몸매를 한 남성이 일본인 이름을 갖고 있을까 하고 의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로맨스 소설에서 흔히 보는, 어려서 인형처럼 예쁘고 커서 남신(男神)처럼 위압적이리만치 이기적인 미모를 유지하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건 어찌 보면 공식이겠지만, 배경이 (아주 사실적으로 세팅된) 일제 강점기이다 보니, 그리 예사롭지만은 않게 다가왔습니다.

 

로맨스 소설에서 구현하는 세계란, 현실은 물론 소설에서도 있을 수 없는 극단적인 낭만주의가 지배해야 합니다. 왠지 이치카와 타이요우에 대한 세세한 묘사(유모 사치와의 아찔한 장면에서, 그의 나신에 대한 징글징글할 만큼 육감적인 그림이 그려지죠)가 없더라도, 우리 독자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생겼을지) 머리에 훤히 넣고 있습니다. 게다가 영국인 여성과의 혼혈이라지 않습니까. 자신 代의 아름다움을 후손에 물려 주기 힘든, 1세로 끝나야 하는 절정의 아름다움을 지닌 혼혈은, 아름다움을 제 몸에 다 구현했다는 둘도 없는 행운 못지 않게 숙명적 비애도 간직한 셈이죠.

 

이치카와 타이요우는 이런 아름다움과 (아마도 근원적으로 일본인들의 그것과 조화되기 어려웠을) 영혼의 순결함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가 가진 치명적인 이 두 매력 요소는, 이국적(exotic)한 희소성에 대한 갈망 이방적(foreign)인 낯섦에 대한 병적인 경계를 동시에 드러내는 일본인의 심성을 정면 자극했습니다. 그가 외부에 대해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할 어린 시절부터 말이죠. 타이요우는 이런 까닭에, 일본에서 가장 고귀한 화족의 혈통이었으면서도 성장 과정 내내 그들 사이로 화학적 융화를 이루지 못한 에일리언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역설적 의미에서 태생적 반일주의자의 길로 내몰린 셈입니다.

 

모석정은 훌륭한 가문의 태생에다, 매혹적인 미모를 지닌 여성으로서, 그리고 재능 있는 젊은이로서, 그 진로에 아무 장애와 역경이 없는 평탄한 행로를 밟아야 마땅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제아무리 중추원 참의에다 백작의 지위(이 백작은 일본에서도 통하는 백작이죠)까지 지닌 권세가의 딸이었어도, "센진"이라는 태생으로부터의 낙인에서 어딜 가든 자유롭지 못합니다. 조선에서건 내지(...일본)에서건 일단은 존귀한 계층으로서의 대접을 받고, 압도적인 겉모습과 품위 있는 행동거지로 남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한 걸음은 더 들어가면 문제가 달라지죠. 동족으로부터는 "이민족의 개로 식민 지배 체제의 밑바닥을 핥는" 아버지의 원죄까지 다 떠안아야 하며, 지배 종족인 일인들로부터는 결국 "야만적이고 거친 반도인 계집" 이상도 이하의 처지도 아닙니다.

 

이런 석정과 타이요우가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에게 운명적 이끌림을 경험한 건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아무리 이런 로맨스 소설에서 남녀 간의 연을 맺는 데에 외모가 결정적 요소라고는 하나, 결국은 영혼의 궁합이 안 맞으면 좋은 끝을 못 보는 게 또 보통이더라구요(그런 경우, 치명적 매력을 가진 남자 캐릭터의 이해할 수 없는 완패로 끝나는 게 정해진 길이기도 하죠). 다만 여성 캐릭터는 순정(純正)의 조선 혈통과 천부의 무용 재능만으로 승부를 보는 진성의 천재인 반면, 타이요우는 그 출생에서 서양 어머니의 유전적 개입(반칙이죠) 덕을 본 데다 깨놓고 말해 사회인으로서 딱히 잘하는 재주가 없는 한량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석정보다 열위의 존재입니다. 모석정을 위기마다 구해 주는 유력 신분이지만, 그가 언제나 갈구하던 모성의 위안을 통해 받을 영혼의 구제는 결국 모석적이 예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둘 사이에서 주도권은 여성인 석정이 쥐고 있습니다. 타이요우가 그녀에게 베풀어 주는 백마 탄 왕자의 노릇은 결국 써빙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두 영혼의 만남이, 당최 가망이 없어 보이는, 세계적으로도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던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점이 이 소설의 비극성을 더합니다. 가장 아름답고 여린 것과, 가장 잔인하고 살벌한 것의 만남. 모석정은 열차 안에서 헌병 오장에게 수색을 당하는 와중, 태어나서 처음 겪었을 수준의 모욕을 당하고, 일황 암살 미수 사건 후에는 곧바로 수사 당국에 연행되어, 앞의 오장과는 신분과 자질, 그리고 학대의 세련도(?)에서 차원이 다르다 할 장교 데오루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은 물론(이 장면에서 많이 놀랐습니다. 아무리 국사범 혐의라지만 바로 막장 고문으로 이어지다니), 능욕을 당하기 일보 직전까지 갑니다. 이 결정적 시점에서 바로 타이요우가 등장해 마지막 선을 넘지 않게 하는 건 장르물의 공식이 또 그러하니 넘어가기로 하죠. 하나 아쉬운 건, 로설에서 빠질 수 없는 에로틱 씬의 묘사가 좀 진부하다는 점입니다. 탄탄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과 설정은 본격 소설을 능가할 정도여서 더 아쉬웠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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