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물의 이력 - 평범한 생활용품의 조금 특별한 이야기
김상규 지음 / 지식너머 / 2014년 8월
평점 :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면, 과연 김상규 선생님께서 이 책에 담으신 주제가 되는 다양한 사물들이, 그저 "소소한 사물들"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니, 의문이라기보다는, 흔히 보고, 눈에 채이고 발에 채이던 것이, 그저 흔한 사물이 아니라 우리 삶에 있어 중대한 동반자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고나 할까요?
저자는 이 책 서문에서, "디지털의 문법이 이제는 아날로그의 그것을 배워 가고 있는" 새로운 트렌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저는 조니 아이버의 책을 읽었습니다만, 그 책에서는 "디자인은 종래의 디자인 개념, 세련된 겉모습의 논리에 그치지 않고, 쓸모와 용도 자체가 디자인임"을 새롭게 설파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분명 "사물의 디자인"에 대해 한 말씀 하시고자 하는 의도였음에도, 내용을 보면 오히려 미시사의 한 범주가 아닐까 싶게, 사물에 얽힌 "역사"를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Every Picture tells a story." 모든 그림은 그 그림에 나타난 한 장면만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제법 지속된 과거의 이력, 그리고 장래의 예측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책에 나타난 그 상세하고 자상하게 풀어헤쳐진 "사물의 이력을 보며, "Every Thing(일부러 띄웠습니다) tells a history."라고 말을 바꾸어도 될 것 같았습니다. 아니면, "Every Design tells a story."라든지요.
그 사물이 하고 있는 모양은, 그 사물의 지난 이력을 알려 주며, 동시에 그 사물이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양과 용도는 일체이며, 가장 우수한 디자인은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고, 그 효용을, 쓰는 사람 보는 사람에게 바로 알려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거죠.
사물은 우리 일상에서 아주 흔히 만날 수 있어서, 그 소중함과 깊은 가치를 우리 가 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당신이 흔히 보던 사물이 결코 하찮은 게 아니며, 너무 소중해서 오히려 하찮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잘 다듬어지고 잘 발전해 온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위에 흔하게 굴러다니는 물건, 예를 들면 전구, 책상, 의자, 냄비 등은, 어느 날 하늘에서 불쑥 떨어진, 영화 <부시맨>의 콜라병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무리 경이로운 쓰임새를 담고 있어도, 우리에게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올 수 없고, 결국 일상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죠(영화에서도 결국 부시맨은 그 병을 들고, 그것이 속해야 할 곳으로 돌려 주러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물이 가장 일상적이라면, 그 일상적임은 우리 느낌처럼 "흔함"이나 "무가치함"이 아니라, 반대로 "가장 일상에 긴요함"을 의미한다는 걸, 이 책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저는 가장 기막한 역설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 책 중에서 "지게"를 꼽고 싶습니다. 지게가 아무리 한국적 일상에서 가장 고맙고 쓸모 있는 사물로 발전해 왔어도, 우리들 현대인은 물론 당대인조차 "지게나 지고 다닐..."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천대의 대상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한국전 당시, 미군 인사들은 "A-frame"이라 이를 지칭하며, 그 기능에 대해 "디자인 일체적 표현"으로 감탄을 표시했습니다. 이 사례에서처럼, 희소성(교환 가치와 연결되는)과 효용성(사용 가치)가 서로 얼마나 괴리를 보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 읽으면서도 진정 놀라웠습니다.
디자인에 있어 기능과 미학적 수월성은 과연 상충하는 가치일까요, 아니면 여러 선구자들이 지적하는 바대로 일체를 향해 나아가는 중일까요? 이 책에 소개된 여러 사물들은, 지금까지 자신의 몸에 품어 온 기능상의 진화와, 외관상의 화려함이 반드시 한 방향으로 가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한계가 앞으로 우리 일상에 속출할 그 모든 사물들이 걷게 될 길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물은 쓰임새가 다하여 시장과 일상에서 퇴출되는데, 이걸 가리켜 저자는 "퇴물'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퇴물이란 물론 흔히 쓰는 말이지만, 책 내내 강조되고 있는 "보편 개념"으로서의 "사물"을 접하고 머리에 새기다 보니, 이제는 상당히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퇴물이 신선하다니 참 역설적입니다만).
사물은 지속되기도 하고, 퇴물이 되어 일상에서 퇴장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하고 귀치 않은 취급을 받을망정 일상 요긴한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는 사물이 되느냐, 아니면 예쁜 모양의 정체성만 고집하다 퇴물이 되느냐 역시, 내력과 비전을 균형감 있게 정신 속에서 길러낼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