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헤겔의 신학론집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 인간사랑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칸트와 헤겔은 근대 독일, 나아가 유럽 철학의 토대를 확립함에 있어 큰 공헌을 세운 두 위인입니다. 두 사람의 뚜렷한 공통점이라면, 철학의 어느 한 분과에 한정하지 않고, 거의 모든 분야의 철학, 그리고 당대의 성취 수준 범위 안에서 자연과학, 역사학, 문학, 종교학 등 포괄적인 영역에 대해, 그 이전까지의 성과를 거의 망라하다시피하여, 후배 학자들에게 잘 정리된 형태로, 넘겨주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종합과 편집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이 두 거인은 종전의 철학자들이 전혀 엄두를 내지 못하던 방식으로 사물과 현상을 보고, 비판하고,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위대한 종합 만으로도 그것은 큰 성과인데, 두 사람은 종합을 뛰어넘어 철학 전반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종합을 성취해 낸 이들은, 대체로 그 세계관이 보수적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바로 "종합"이라는 개념 속에 이미 그 (보수주의의) 단초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종합"이라면, 그것은 기성, 기존의 것들에 대한 종합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종합의 대가들은 대체로 conservative의 아성에서 그리 먼 발짝을 떼려 하지 않습니다. 아퀴나스의 성 토마스가 그런 인물이며, 심지어 적폐 타파의 상징과도 같았던 마르틴 루터마저도 그 학문상 방법론이나 정치적 노선의 특징은 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거인, 칸트와 헤겔은 어떻습니까? 임마누엘 칸트는, 생애 단 한 번도 동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고 하죠. 물론 자신의 고향에 진중히 은거했다고 해서 항상 보수적 기질을 지녀야 한다는 단정은 대단히 억지스럽지만, 칸트는 실제로도 그러한 성향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어구를 보십시오. "네 자신의 의지의 격률이 항상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게 하라." 이런 도그마대로라면 아마 숨조차도 마음 놓고 못 쉴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저는 학부 시절 그의 <실천이성비판(삼성문화사판)>을 읽던 때에, 그 서문에서 자신을 후원한 모 주권자(soverign)에 바치는 그의 헌사를 읽고, (좋게 말해서) 그의 질서와 체제에 대한 강한 신뢰와 외경심을 감지할 수 있었고, (나쁘게 말해서) 그의 다소 비루하다 싶은 권력 추종 성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이런 말투와 형식은 당대의 관습이었다는 사실을 넉넉히 감안해도 그렇습니다).

 

반면 헤겔을 보죠. 이 사람이 남긴 무수한 명언 중에 "예술가는 군주의 기상을 가져야 한다."는 게 있습니다. 물론 제 분수도 모르고 날뛰라는 게 아니라, 군주의 처지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현실에 굴하지 않고, 오로지 예술혼을 불사르며 불멸의 미학적 성취를 남기라는 그의 당부가 주된 취지였겠지만, 그렇다손 쳐도 함부로 군주를 거론했다는 자체가 그리 예사롭지만은 않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또한, 헤겔의 연구에 있어서는, (이 책 역자 정대성 교수님도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청년 헤겔"이라는 분과가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노년 원숙기에 이르러 헤겔은 그 엄청난 폭과 깊이를 자랑하며 후세 독자와 연구자들에게 극악의(?) 하중을 안기고 떠났지만, 반면 38세가량까지의 청년기(이 시절이라면 더군다나 38세라는 나이가 "청년" 범주에 들기 어려워겠습니다만, 헤겔의 그 아득한 사상 반경을 감안한다면 진정 자연스럽습니다. 시점을 20세로 잡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겠습니다)까지의 헤겔이라면. 그 진취성과 대담함, 기존의 사유 체계와 그를 둘러싼 현실의 낙후성에 대한 비판이 워낙에 강경한 모습이라, 그를 피상적으로 알던 이들을 당혹하게 만듭니다. 최소한 "청년 해겔"은 누구 못지 않은, 강경 좌파였던 셈입니다!

 

본디 프랑스에서도 그러했듯, 기독교(특히 구교)는, 계몽주의의 대두 무렵에서는, 사회 발전을 가로막고 온갖 구폐와 기득권을 대변하는 사회의 公敵 비슷하게 치부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놀라는 건, 헤겔 역시 기독교에 대해 일반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신랄한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두고입니다. 헤겔은 기독교의 구, 신 을 가리지 않고, 민중의 자발적 개과천선과 자유에의 희구를 철저히 가로막는 장벽 구실을 하고 있다면서, 새로운 오성과 자유의지를 자극하는 종교의 탄생을 강력히 열망하고, 그에 대한 試論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사이비 종교 창시자(?)로 오해 받을 지경입니다. 물론 이성과 오성에 대한 철저한 숭배자인 그가, "묻지마"와 "막무가내", "거짓과 허위 선전"으로 대표되는 사이비 세력과 엮을 가능성은 전무합니다만 말입니다.

 

이 책 제목은 <신학론집>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실제로 헤겔이 생전에(혹은 사후에라도) 이런 제하의 단일 저서를 출판한 건 아닙니다. 역자 정대성 교수님이, 헤겔의 저작 중 그의 의도에 맞는 여러 저술을 추려 이렇게 모양 좋은 한 권으로 번역해 낸 것입니다. 엄밀하게는 "신학"의 주제에서 다소 벗어나는 것도 있고, :"논문"이라기보다는 중수필에 가까워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청년 헤겔" 나아가 "인간 헤겔"을 이해하는 데에, 지금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는 문헌들이라서, 독자는 잠시 충격을 받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 헤겔의 글이었단 말인가?"

 

마르크스, 아니 그 이전의 유물론 전통이, 헤겔을 깊은 사상의 호수로 하여 태동하게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변증법"을 빼면 대체 무엇이 남을까요? 헤겔의 適子는 우파 체제 옹호론자일지 모르지만, 설사 마르크스를 사생아로 분류한들 이 사나운 자식을 빼면 그 가계의 족보가 심심해지는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확실한 것은, 마르크스야말로 이런 아버지의 씨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여태 아들을 보고 그 범상치 않은 기질에 놀라곤 했지만. 이제 그 아비의 젊은 시절을 보니 "씨도둑질은 못한다."는 우리 속담의 타당성을 되씹게도 됩니다.

 

칸트는 저 먼 동방의 벽지, (그 당시에도)거의 러시아에 가까운 고장에서 평생을 보내고, 게르만 겨레가 일군 나라 중에 가장 보수적이었던 프로이센의 신민으로 생을 마친 사람입니다. 반면 헤겔은 그때나 지금이나 게르만 종족의 거주지 중 가장 서편에 치우친, 프랑스와 등을 대다시피한 뷔르템베르크 공국 출신이고, 상당 기간을 타지 유람으로 보낸 이력이 있습니다. 종합의 거장이자 초인적 두뇌의 소유자인 두 사람이지만, 이처럼이나 남긴 업적의 성향이 차이남은 반드시 그들이 각각 산 시대의 격차에만 기인하는 건 아닐 것입니다.

역자 정대성 교수님의 해제가 일품입니다. 번역도 유려하지만, 과연 이처럼이나 명쾌한 헤제가 아니었다면 헤겔과의 대화가 가능했을까 하는 회의가 듭니다. 됵일 본토에서 정통 코스로 박사를 따신 분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감탄, 이 서평에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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