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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지음 / 다섯수레 / 2014년 8월
평점 :
선입견이라는 게 그래서 무섭습니다. 가톨릭 교회라고 하면 보수주의, 전통에의 완강한 집착 같은 막연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현존하는 종교 조직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유지된 실체이니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보는 시선이 그렇다는 것이고,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하면 그렇게나 긴 시간 동안 마냥 변화를 거부하고 지냈다면, 아마 오늘날까지 교회가 존속하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실제, 16세기 초의 로마 대 약탈, 19세기말의 이탈리아 통일 등, 교황청은 아예 그 존폐가 문제될 정도의 위기를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그런 시련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이어져 온 건, 끈질긴 생명력 같은 이유라기보다, 변화하는 시대에 (우리 일반이 생각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열심히 적응해 온, 아니 그를 넘어 어쩌면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시대를 이끌어 온, 성직자들의 노력 그 결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마 그 역할은, 보수적이고 고지식한 교황보다는, 진보적이고 열린 생각을 지닌 교황들이 보다 더 비중 높게 맡아 왔을 것 같아요.
이 책의 제목은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입니다만, 이런 비슷한 제목을 달고 있는 다른 책들과는, 그 보는 시야와 취지, 담고 있는 내용이 사뭇 다릅니다. 아마 이 교황, 호르헤 베르골료는, 지금까지 구교가 맞이했던 교황 중 가장 진보적 색채가 짙은 인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이 교황이 어떤 족적을 보이고, 어떤 업적을 남기고 가실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만(뉴스에 의하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임자처럼 생전에 은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자들에게 시사한 적 있다고 합니다), 이 정도씩이나 진보적인 인사가 교황직에 착좌(이런 용어를 쓰더군요)했다는 자체가, 교회사에 뭔가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저자는 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 담긴 내용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타원의 초점 중 하나로 놓고, 다른 하나의 초점을 보수 세력에 둔 후, 가톨릭 교회가 그려 나갈 타원의 반경이 앞으로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을지, 혹은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고 움츠려들지, 최근 한 세기 정도를 주된 범위로 잡아 교회 전반의 형편, 내력을 조명한 책입니다. 물론 교황 개인에 대한 여러 신변 사항,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 그 전임자인 대교황(아직 정식 호칭은 아닙니다만) 요한 바오로 2세 등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신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신변잡기가 아니라 보수-진보의 대립, 혹은 발전적 갈등에 대한 저자 나름의 정리와 해석입니다. (그래서 저는 <보-혁 구도를 축으로 놓고 본 현대 가톨릭 교회사> 정도로 부제를 달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이 책의 저자는 가톨릭계 언론 기관에서 주필로 오래 봉직했던 한상봉 선생입니다. 저자는 사제가 아니지만, 학문적 배경을 구교 관련 영역에서 갖춘 분입니다. 저자는 먼저 "현 교황은 공산주의자인가?"라는 당혹스러운 질문으로 책의 서두를 열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 같은 분이 그런 시각을 가질 리는 없고요, "현 교황처럼 온건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인사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자'로 손쉽게 매도하려는 세력이 교회 내에 엄존한다."는 논의를 열기 위함입니다. 진보적 분위기, 민중과 호흡을 같이하려는 성직자에 대해 언제나 마뜩지 않은 시선을 주어 왔던 세력이 교회에는 상존해 왔고, 이는 물경,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활약하던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도 잘 나오듯, 가난한 이와 함께 하고 민중의 아픔을 지배층에 알리려는 움직임은, 언제나 이단으로 경원시되어 왔습니다. 아시시의 성인이 활약하던 시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당사자가 세상을 떠난 후 그리 오랜 시간을 끌지 않고 시성함으로써, 교회가 결코 변화의 움직임에 눈을 감고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해 보였습니다. 반면, 교회가 변화를 거부하고 타락한 소수의 책동에 놀아날 때에는, 프로테스탄트와의 대립 등 파국적인 결과를 맞이해 왔다는 점을, 저자는 여러 역사적 사실을 들며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저자의 관점은 그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는 언제나 빈민과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해 왔다. 지금의 교회가 가져야 할 사명 역시 그것이다. 너무도 단순 명쾌하지 않은가?" 마르크스의 명제 중에 유명한 것으로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가 있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쟁쟁한 명성의 해방 신학자들(예: 볼프)은 한결같이 지적합니다. "이 명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무엇이 다른가?"
저자는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인입니다. 한국인 평신도로서 그는, "용산 참사 등 민중이 억압받고 생존의 위기에 몰렸을 때, 교회 관계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고 묻습니다. 한국의 경우 예컨대 정진석 추기경 등은 현장에 몸소 나와 이들의 고충을 묻고 위로를 건넨 일이 전무하다는 게 저자의 지적입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면, 현 교황은 대주교 베르골료이던 시절, 나이트클럽 화재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던 때, 누구보다 먼저 현장을 찾은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사가 이제 세계 십 수억 가톨릭 신도를 이끄는 수장이 된 시점에서, 실천과 탈권위의 소통을 보이지 못한 고위 성직자들은 반성해야 하지 않냐는 게 저자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이 책에서도 여러 번 나오는) 강우일 대주교처럼 진보적인 인사도 한국 교회에는 존재합니다. 아니, 주필직 같은 중책을, 이 책의 저자처럼 진보적인 성향의 인사가 오랜 기간 동안 맡아 왔다는 사실부터가 무엇인가를 강력히 시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입견은 엄연한 현실 앞에 아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 책은 편한 마음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저는 현 교황을 담은 여러 사진을 보면, 자애롭고 깊은 수양이 담긴 표정이 있는가 하면(저자의 평가로는, 현 교황이 외모 면에서도 아주 출중하다고 하십니다), 뭔가 수심 가득하고, 인간적인 불안이 짙게 배어나오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가 지극히 소탈하고 가식 없는 분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앞으로 교황으로서 그가 교회 내부의 반대 세력, 교회 외부에서 가해져 오는 심각한 위협, 부정 부패 등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 그 전망이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걸 암시해 주는 것도 같더군요. 앞에서 인용한 "전임 베네딕토 교황처럼 조기 은퇴할 수 있다."는 언급도, 해석하기에 따라선 상당히 무거운 의미로 다가오기도 하고요. 교황이 나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기보다, 내가 교황께 무엇인가 힘을 보태고 싶다는 성숙한 생각이 드는 가톨릭 신자라면, 이 책을 읽고 현 교황이 얼마나 어려운 입지에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