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진설 - 근황 인문학 수프 시리즈 6
양선규 지음 / 작가와비평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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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작가들이 이처럼 깊이 있고 문장의 맛도 은근한 본격 수상록을 잘 내어 놓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냥 단편적인 주장만 내 놓거나, 독자의 편의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단문, 구호로만 채워진 글을 쓴다거나, 그도 아니면 정치색 강한 목적성 위주의 글을 쓰거나.... 자기 개성도 뚜렷이 나타내면서, 독자가 그를 통해 은근 곱씹고 배울 구석도 많고, 문학적 향취도 짙게 배어나는 글은 좀처럼 만나기 힘듭니다.

 

저는 작가님의 전작을 한 권도 읽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따로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론에 동의를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이런 본격 수상록을 만나기 힘든 요즘, 한 권도 아니고 지금까지 어떤 일관된 컨셉 아래 여러 권이 시리즈로 나왔다는 자체가 고마웠다고나 할까요. 어떤 챕터는 내용이 어렵고, 어떤 장은 다들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괜히 늘려 이야기하시는 느낌도 있었고, 어떤 대목에서 털어 놓는 (작가님 자신의) 취향이나 소신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인 독후 소감은, 믿음직하고 품격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정도였습니다.

 

남자는 얼굴을 보고 여자는 옷을 본다. 여자 얼굴만 따지는 게 남자의 본성이라는 게 우리의 상식이긴 하죠. 그러나 이런 말은, 중립적 입장에서 진술되어야 신뢰가 가는 법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性)의 중립지대는 있을 수 없으니, 이 역할은 많이 배우고 수양이 쌓여 색에 흔들리지 않는 남자가 이야기하면 무난한 타협이 되지 싶습니다. 여자 얼굴 어지간히 안 본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님 같은 분이 이야기를 해야 말이 먹히지 싶은데, 작가님은 소싯적에 본 홍콩 영화의 어느 묘하게 생긴(생겼던) 주연배우를 좋아하신다 하니 이는 얼굴을 안 보는 게 아니라 취향이 독특하신 게 아닌가 독자로선 생각이 들더군요. 검색을 해 보니 한국에서 그 특정 배우가 인기를 끌 때 여고생들의 반응이 특히 유별났다고는 하나, 그 또래 남자아이들 사이에선 딱히 열광의 분위기가 없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불안의 대상화. 작가님의 태도에 의하면, 불안이란 전적으로 이를 느끼는 주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교란의 결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불안을 제거하거나 치유할 때, 밖에서 원인을 찾으면 안 됩니다. 나의 덜 익고 상처난 내면을 다스리는 게 순서입니다. 그런데 나의 결함은 인정하기 싫으니 특정 대상을 지목해 이를 타자화하는 것, 이게 작금의 세태를 지배하는 악습이다, 대충 이런 식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불안의 유형이 따라,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대응 방법과 처방전이 다르지 않을까도 생각됩니다.

 

소통이란 무엇인가. 작가님이 하신 말 중 "요즘 소통은 그 자체로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다기보다, 오히려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매도하기 위한 명분, 트집으로 자주 악용되는 듯하다"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저 사람은 불통이야!"란 단정은, 이유가 제시되지 않으면 그건 객관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불통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지 타인에게 있는지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단죄는 그저 일방적일 뿐 아니라, 오히려 건강한 소통을 방해하기까지 합니다. 조선 시대의 "역적 고변"에 빗댄 건 그런 의미에서 참 적절했습니다. 거사는 본디 성공하면 충신이요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게 고정 훌이었으니까요.

 

소설의 기원을 설명할 때 자주 거론되는 어구가 이 "소가진설"이라고 합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작가님의 깊이 있고 진득한 이야기에 잔뜩 취하기는 했으나, 제목과 제가 감상한 책의 내용이 얼마나 부합했는지는 잘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건 책을 쓰신 작가의 의도를 제가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도 되겠습니다만, 반대로 "인문학 수프"를 들고 나오신 이 책의 컨셉 그 하위 섹터까지 일일이 동의를 보낼 필요는 없겠다는 독자로서의 의식적인 자각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명인의 레시피도 교조가 꼭 될 수는 없고, 다만 여러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훌륭한 참고가 되는 정도라고 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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