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소녀
미셸 뷔시 지음, 임명주 옮김 / 달콤한책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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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은 정말 진부한 소재입니다. 지금까지 이 흔한 소재를 두고서 너무도 많은 소설, 오페라, 영화, 그리고 막장드라마 들이 나왔기 때문에, 어떤 작품이 이런 테마를 품었다면 그로부터는 아무것도 새로운 걸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결말까지 다 읽고 나면, 처에 막연히 가졌던 기대(그러나 이 기대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거나, 혹은 진상이 드러난다면 상당히 독자의 기분이 좋지 못할 그런 기대)가 다 배신당하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최소한 세 번에 걸쳐 독자는 소위 "반전"을 구경하게 됩니다. 이런 미스터리물을 읽는 보람 중 상당한 비중은 그런 "반전"이 주는 쾌감을 맛보는 데에 있기 때문(최소한 저는요)에, 솔직히 이것만으로도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독자가, 그런 착각에 가까웠던, 그리고 불쾌했던, 기대를 형성했던 , 작가의 서술 트릭 때문이었습니다. 책에서 크레줄 탐정에게 접근해 와서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던 아마츄어 사기꾼(그러나 나중에 모두 진실을 말한 것으로 밝혀지는)의 손재주처럼, 다 알면서도 속아 주고, 다시 의외의 통쾌함을 맛보는 결말을 기대하는 게 우리 독자들이기에, 그러나 이런 트릭은 불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속아 줄 용의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또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곱씹어 보면, 결국 작가가 불공평하게 차려 놓은 테이블을 두고 마지막에 자기가 엎었을 뿐이라는 식으로 독자가 제 맘 편하게 정리하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영어에서 "파멸"이라는 의미로 undoing이란 게 있습니다. 작가가 마지막에 마련해 놓고 있는 결말은, 결국 지금까지 픽션 안에 차려 놓았던 모든 설정과 (비도덕적) 발전을, 스스로 다 취소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독자는 일단 1) 그 영리한 솜씨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고 2) 그렇게 취소된 모든 전개가 빚어내는 그 모든 도덕적 마무리에 대해, 후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스테리의 정교한 창조에도 감탄하게 되지만, 사실 빼어난 점은 그뿐이 아닙니다. 작가는 은근 보편의 상식이나 도덕감정에 반하는(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불편한 진실로 판명되는) 단정을 소설 곳곳에서 늘어 놓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독자는, 쓴 입맛을 다시면서 그 당부를 판단하고, 다시 큰 불편을 느끼며 말없이 수긍하게 됩니다. ("어쩌겠어, 현실이 그러니....") 이처럼 어두워진 마음을, 충격적 반전(이는 기술적 빼어남입니다)과 함깨, 다시 도덕과 상식의 승리를 알려 주며, "병 주고 약 주는" 솜씨로 어루만지는 게 작가의 기특한 수습(이는 마음이 착해서입니다^)에 우리는 두 겹으로 쾌감을 얻게 됩니다.

 

비행기 사고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고 알려진 아기를 놓고, 거의 빈민에 가까운 부부와, 유럽에서 첫손에 꼽히는 갑부- 귀족 집안의 부부가, 서로 조부모의 자격을 주장하며 데려가겼다고 법정 싸움을 벌입니다.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비행기 사고에서 아기가 살아 남은 것도 기적인데, 이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혈연이라며 다투는 가족들까지 등장했으니, 매스 미디어가 온 신경을 집중할 세기의 특종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한쪽은 유럽에서, 그 성취한 부(富)와 명성으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냉혈한이자 사업가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능숙한 승부사라기보다, 자본주의(특히 언론 자본과 흡혈귀 변호사들)의 콜드 블러드에 놀아나는 꼭두각시, 그리고 장난꾸러기 신의 농간 앞에 속수무책인 졸(卒)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이 책에는 공교롭게도 "끈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는 표현도 나오더군요).

 

저는 이 작품에서, 귀족의 피를 이어 받은, 진정 냉정한 사업가인 마틸다 노부인에게 가장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결국 적임자(아!)에게 일을 맡겨서, (비록 큰 희생을 치르기는 했으나) 여튼 사건의 진상만큼은 제대로 알아 내고 만 것입니다. 소설을 다 읽은 분은 알겠지만, 그녀는 자신과 남편이 저지른 그 무수한 mess도 다 치우고 무대에서 퇴장했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그녀 역시 완전히는 몰랐던 탓에, 젊은이(전적으로 무고한)에 게 마음의 상처를 좀 안기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보인 능숙하고 현명한 처신 역시 감탄을 자아내게 하더군요. 거의 동년배인 니콜(출신은 천하나 결코 만만치 않는 depth를 지녔던)과 보이는 정신적 승부도 볼 만합니다. 반면 남편은, 그처럼이나 사업에서 놀라운 수완을 보였지만(아내 가문이 보유한 재산만으로는 그런 權貴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한번 마음이 흔들리자 걷잡을 수 없는 추락과 동요를 보이고,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게 바로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자와, 한순간에 벼락 출세한 자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미스터리물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캐릭터의 섬세한 설정이 빛나는 대목이었습니다.

 

앞서 제가 1) 작가의 서술 트릭 2) 결말에서 스스로 차린 모든 상을 스스로 엎는 태도에 약간의 불만을 표현했지만, 지금 리뷰를 쓰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작가는 제법 "위험한 수준"의 힌트를 작품 중에서 이미 주고도 있었습니다(지금 생각이 나네요). 재미도 있으면서, 공정하면서, 도덕적 쾌감까지 안겨 주는 스릴러를 오랜만에 읽은 것 같습니다. 어 리고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치명적인 사랑에 빠지다 파멸적인 파국으로 몇 발 디뎌 나가다 결국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되고, 사악한 탐욕의 손길과 시선이 그들을 뒤에서 엿보며, 그 뒤에는, 세상을 통째로 바꾸진 못하지만, 몇 사람의 인생은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놓을 수 있는 무서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는 이야기, 이야기들, 아주 진부해서 뭐 하나 기대될 여지가 없을 만큼 통속적인데, 이처럼 새롭고 재미있는 사연을 큰 스케일로 꾸려낸 게 신기했습니다. 다만 예컨대 나짐의 애인이 터키 반체제 운동가의 딸(그래서 프랑스에 흘러들어옴)이라든가, 마르크의 고향을 "공산주의자의 도시"로 꾸려 놓은 건, 공연히 시대적 무게 같은 걸 소설에 덧입히려는 의도 외에 별 필연성이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자면, 우리말 제목 번역이 기가 막히다는 점이어요. 원제와눈 전혀 무관한 표현인데, 오히려 작품의 가치와 함의, 분위기를 더 잘 전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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