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국새를 삼켰는가 - 우리가 모르는 대한민국 4대 국새의 비밀
조정진 지음 / 글로세움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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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착잡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국민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 기관인 사법부입니다. 사법부의 정치적 독립은 그래서 헌법의 보장 사항이며, 재판에는 그 어떤 외부의 압력이나 간여(干與)가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는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건이 관심의 초점에 놓일 때는 반짝 열을 내다가,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런 일도 있었나?"하며 까맣게 잊고 마는 게 우리 대중들의 큰 문제입니다. 저 역시, "국새 사기 사건"이라고 해서 한때 신문, 방송에서 크게 다뤘던 건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그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범인"의 근황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주지 않았고, 따라서 아는 바도 거의 없다시피했습니다.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을 해 보니, 그런 저의 무지도 크게 책잡힐 일은 아니더군요. "범인으로 지목된" 민홍규씨가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까지만 언론이 다루고 있었습니다. 이게 2011년 말의 일입니다. 그 이후에는 언론이건 대중들이건 관심사에서 멀어진 게 이 사건입니다. 솔직히 저는, 사건 발생 당시에도 "그런가 보다"하는 정도로 넘어갔기 때문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갖가지 팩트들(이 책에서 주장하기론 말이죠)이 아주 상세한 디테일을 적어 놓고 있어도, "아 내가 알던 것과 이렇게나 달랐구나."하는 충격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죠.

 

책을 제가 너무 쉽게 넘기는 것 같아서, 긴장감을 주려고 인터넷에서 수시로 기사를 검색했습니다. 당시 신문, 방송에서 보도된 내용을 대충 읽어 보니, 이슈는 크게 네 가지더군요. 1) 민씨가 금을 횡령했다. 2) 이 국새제작단 단장으로 선임되기 전에, 정계에 로비를 했다(자신이 만든 금 도장을 뿌리고 다님) 3) 민씨는 전통 국새 제작 기법을 지니고 있지 못한 무자격자다. 4) 국새에 자기 이름을 슬쩍 새겨 넣었다. 여기에, "국민 앞에 사죄한다."는 본인 자신의 기자 회견 내용까지 크게, 그의 사진과 함께 기사화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평균적인 한국인으로서 뭐 주저 없이 사람 하나 매장시키는 대열에 동참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좀 사전 지식을 갖추고 나서 이 책을 읽으니까, 내용이 머리에 더 잘 들어오더군요. 올바르고 그르고를 판단하는데, 지식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가? 물론이죠. 오히려 그게 이런 책의 취지이기도 합니다. 저자들이 재판부와 검찰, 경찰을 비판하는 이유는, 민씨를 유죄로 보기 힘든 강력한 반증, 정황들이 여럿 존재했고, 변호인들이 증거로 제출하기까지 했는데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묵살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또, 검찰 측의 증거, 증인들에 대해, 상당한 정도로 그 신빙성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애써서 믿고 또 믿어 준 끝에 민씨를 유죄로 몰아갔다는 그 점을 계속 지적하고 있습니다. 과연 민홍규씨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이를 판단함에 있어 사실 문제, 객관적 팩트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없습니다. 판사를 비판하려면, 우리 독자들은 그 판사보다 더 객관적이고 더 공정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한쪽 말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책 한 권 읽고 한쪽 말만 듣는 사람은, 나중에 읽은 다른 책(혹은 시청한 방송)이 다른 말을 하면, 언제 그랬더냐는 듯 금방 입장을 바꿀 것입니다.

 

1) 금 횡령에 대해서는, 이 책의 주장에 의하면 검찰 공소장에서 모두 빠졌다고 합니다. 아무리 책이 한쪽 입장만을 대변한다고 해도, 이런 기초적 사실을 왜곡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시간이 없어 판결문을 찾아 보지는 못했지만, 일단 책의 내용만으로도 금 횡령 건은 사실 무근에 가까운 것 같더군요. 책은 오히려 민씨가 사비(私費)를 털어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만약 이 부분 횡령죄가 기소 대상이되었으면, 당연히 재판 과정에서 배척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혐의의 인정에까지 간접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사실이라면,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갸륵한 일이겠습니까.

 

2) 인터넷에서 기사를 검색하면, 실제로 몇몇 정치인들이 민씨로부터 도장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일반인 수준에서는, 이 정도면 게임 끝으로 판단합니다. "뇌물"을 받은 사람이 스스로 받았다고 하는데, 무슨 발뺌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나 책의 내용은 다릅니다. 정동영 씨 등이 "도장을 받았으나, 대금으로 50만원을 주었다."고 말한 게 정확한 내용이랍니다. 이건 완전히 다른 뉘앙스 아니겠습니까? 이런 걸 두고 "도장 받은 사실을 시인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 신문 기사를 읽을 때 참 조심해야겠다 싶었습니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른 수준이 아니라, 아예 극과 극으로 차이 나는 결과입니다. 여기에 대해, 최소한 신문 기사 수준에서는 재반박의 내용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3) 민씨는 과연 자격이 있는 장인인가? 신문 기사들은 석불 정기호 선생의 장남의 말을 인용하여, "민씨는 선친의 집에 두어 차례 방문했을 뿐이다. 최소 6년은 숙식을 같이하며 배워야 하는데, 집에 오래 머물지도 않은 이가 수제자는커녕 어떻게 제자라고 할 수 있는가?" "선친이 말년에 노망기가 있어서, 민씨에게 착오로 증명서 같은 걸 써 주었을 수 있다."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명장의 친아들이 이런 말을 하는데, 대중은 그저 믿을 수밖에요. 그러나 책은 여기에 대해서도 반론을 가합니다. "정 선생의 집은 타인이 묵고 지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버스나 다른 차로 선생을 방문하여 배우러 가곤 했다."는 다른 증언을 소개합니다. 그 외에, 정 선생과 민씨가 인적 연계를 맺었다는 다양한 방증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민씨가 명문가의 후손이고, 어려서부터 각종 대회에 입상하는 등 자질을 입증해 보였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습니다.

명장의 수제자다 아니다를 떠나, 과연 전통 기법을 현재 보유한 인물인지 여부가 더 중요합니다.

 

앞의 1) 2)는 재판 과정에서 쟁점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법원이 확정 판결을 내릴 때도 이유의 핵심은 "전통 기법으로 제작한다고 해 놓고, 막상 적용한 건 현대식 기법이었다."였습니다. 그래서 사기라는 거죠.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든 생각은, "과연 공인된 전통 기법이란 게 존재하는가?"였습니다. 전통 기법을 보유한 사람이 명장인 거냐, 아니면 명장이라는 이가 보유한 그게 바로 전통 기법이냐. 재판부와 수사 당국은 민씨를 처음부터 명장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통 기법을 보유하고 있는지 여부로 이 사건의 핵심에 접근하려 했고, 그 결과는 "아니다"였습니다. 그럼 전통 기법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아니, 전통 기법의 실체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마다 입장이 다 다릅니다. 여튼 수사 당국은 민씨의 제조 방법은 "아닌 것"으로 보았고, 그게 바로 민씨가 유죄 판결을 받은 유일한 근거입니다.

 

in dubio pro reo.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형사사법의 대전제입니다. 실제로 민성재 사건이나 낙지 살인 사건 등에서도 우리가 본 것처럼, 어지간한 심증이 가는 경우에도, 반대의 정황이 얼마라도 존재하면 무죄 판결이 내려지곤 하는 게 우리 사법부의 태도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 견해가 달라질 수 있는 문제를 두고, 너무도 쉽게 유죄 판결이, 형식적 증거 조사 과정만을 거쳐 내려진 게 아닌지 충분히 아쉬움이 느껴질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저자의 주장처럼 "배후에 정치 권력이 숨어 있다"까지 비약할 필연성은 부족하다고 해도 말입니다.

 

4)에 대해서도 이 책은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장인이 자신의 작품에 "싸인"을 하는 건 당연하다는 겁니다. 3대 국새를 제작한 장인 역시, "그게 뭐가 이상하냐?"는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참, 똑같은 사실을 두고서도, 앞뒤에 어떤 배경을 배치했느냐에 따라 이렇게 느낌이 달라지는 걸 보고, 사람이란 정말 간사하고 못 믿을 존재구나 싶었습니다. 신문 기사를 보았을 때는 "민씨가 잘못했네!"라는 판단이 바로 내려졌는데, 이 책의 내용을 보니 또 그게 아닌 것 같으니 말입니다. 현재로서는 이 이슈에 한해서는, 책의 내용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결국 남은 건 3)뿐입니다. 민씨가 전통적 방법으로 국새를 만들었는가 아니었는가! 이는 사실 재판부가 쉽사리 판정을 할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론에 맡길 일도 아닙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섰어야 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몸을 사리거나, 아니면 무슨 이유에서건 서로 의견이 판이하게 갈리니, 결국 증명 불능의 상태로 남은 셈입니다. 다시 떠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in dubio pro reo의 원칙을요.

 

책의 내용에 다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의문의 교통 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 하셨다고 하지만, 그게 꼭 정치권력이나 반대편 세력의 사주로 인한 것인지는 명확지 않습니다. 또, 결국 재판을 확정한 건 대법원 해당 재판부입니다. 아무리 최종심이 법룰심이라고는 하나, 결국 오심(만약 오심이라면요)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대법관들입니다. 책은 1심 재판부에 대해서는 강력히 비판하고 있으나, 대법관들에 대한 언급은 거의 않고 있습니다. 형량을 다 채우고 출소했다는 사실의 진술에서, "아 이 사건이 이미 대법원에서 확정되었구나"하는 생각이 겨우 들었을 뿐입니다. 독자로서는, "대법관들도 결국 그런 판결을 내렸다면, 이 책에서 말하지 않은 뭔가 다른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이래서 배심 재판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에도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습니다. 언론이 그렇게나 효과적으로 여론몰이를 하고 난 후였는데, 배심원인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저자분은 동료 언론인들의 자질과 진정성을 문제 삼으셨어야 순서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책의 프롤로그, 에필로그는 모두 거물 법조인이 담당하여 집필하였습니다. 두 분은 민홍규씨의 사정이 억울하다고 판단하여, 무료 변론을 맡은 소송대리인이기도 합니다. 이런 거물들이 사건을 맡아 대법원까지 간 사건인데도 결국 유죄 판결이 났다면, 사건의 진상은 보다 복잡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책은 나와야 합니다. 오심의 가능성은 어떤 경우에도 존재하며, 무작정 억울하다는 식이 아니라 이처럼 치밀하고 자세한 팩트에 근거한 반론이라면, 마땅히 공론의 장에 나와 여론의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사법부가 이미 판결 확정이 끝난 사건에 대해 일일이 답할 책무는 없더라도, 최소한 설득력 있는 항변에 대해 뭔가 입장 표명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고는 하지만, 형식보다 중요한 건 국민의 인권이고 정의의 실현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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